고대의 던전(1)
던전.
본디 던전이라 함은 지하 감옥을 의미한다.
지하 깊숙이에 복잡하게 만들어 죄수나 가둬두는, 별 볼 일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다.
게임 속에 존재하는 던전에 흥미로운 것 하나 없이, 그저 백골화한 죄수의 뼛가루나 휘날리는 감옥일 뿐이라면, 장담컨대 그딴 게임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이 세계에서 던전이란 초특급 파밍장소다.
지난 4년간 케른헴에서 모험가 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던전의 이야기들을 몇 번 들어봤다.
누가 금화가 가득 담긴 상자를 발견했다느니, 명검을 획득했다느니, 마법서를 얻었다느니 하는,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게 만드는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소문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기회의 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기회의 땅이 케른헴에 열렸다니.
“그래서 케른헴이랑 모험가 길드에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많은 거였구나.”
“그렇다! 다른 지역에서도 몰려들었다!”
“서둘러야 한다!”
“늦으면 다 뺏긴단 말이다!”
원래 던전이나 유적, 광산 같은 곳들은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영주에게 귀속된다. 소유권을 가진 영주가 그곳을 개방해주면, 그곳에서 얻은 소득의 일정부분을 영주에게 바쳐야 한다.
하지만 케른헴은 영주가 없는 도시다.
즉, 먹는 놈이 임자라는 말이다. 던전 안에서 어떤 소득을 올리건, 온전히 자기 몫으로 가져갈 수 있다.
“무슨 던전인데? 이, 일단 나한테서 좀 떨어져 미친놈들아.”
도린 삼형제의 흥분한 콧바람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져 몹시 불쾌했다.
“고대의 던전!!”
“신비로운 미궁!!”
“보물이 가득한 창고!!”
“이 새끼들이? 너네 희망 사항 말고, 알려진 정보를 말해보라고.”
여전히 가까이서 소리를 질러대는 도린 형제를 밀어냈다.
“어제 발견됐다고 말했잖나! 아직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그 비밀을 파헤치는 것은, 억울한 마법사 너와 우리 형제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싶군.”
“그래도 아무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들어가기엔 좀 그런데....”
던전에서 뭐가 튀어나올 줄 알고 함부로 들어간단 말인가. 뭔가 정보가 더 필요했다.
“일단 좀 있어봐.”
나는 도린 형제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접수대로 향했다. 의뢰 완료 보고도 하고 정보도 물어볼 겸 해서.
워낙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여직원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엘 씨! 돌아오셨네요. 의뢰는 잘 마치셨나요?”
“네. 근데 던전이 발견됐다고 하던데....”
의뢰를 마무리했다는 소리에 그녀는 서류에 뭔가를 끄적이면서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난리도 아니에요. 별일이야 진짜. 케른헴에서 던전이라니. 엘 씨도 가보실 생각인가요?”
“그래야죠. B급이 한 명 이상 동행해야 입장이 가능하다던데, 만만치 않은 곳인가 보죠?”
“솔직히 저희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보통 그런 곳엔 언데드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냥 안전을 위해 B급 제한을 걸어둔 거예요.”
그녀는 서류 작성을 끝마치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눈가에 걸린 다크서클이,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흐으으앗-! 갑자기 사람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피곤해 죽겠네요. 아무튼, 어제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무슨 고대 마법사의 던전 같대요. 마나석을 몇 개 가지고 돌아왔거든요. 던전의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고 하고.”
고대 마법사의 던전?
‘고대’, ‘마법사’, ‘던전’.
뭐 하나 군침이 돌지 않는 단어가 없었다.
마법서 하나만 발견해도 이게 얼마냐.
게다가 벌써 마나석을 가져온 사람도 있다니.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어제 다녀온 사람들이 무슨 몬스터를 만났는지 얘기해주진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은 1층만 탐사하고 돌아왔거든요. 1층에는 몬스터가 없었대요. 더 깊게 내려가면 뭔가 있겠지만, 하루 만에 깊은 곳까지 가볼 수는 없으니까요.”
들어보니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될 사이즈는 아닌 것 같았다. 식료품 같은 걸 좀 넉넉히 준비해서 들어가야겠군.
“알겠습니다.”
여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도린 형제를 찾아 나섰다. 길드 내부에 사람이 워낙 바글바글해서,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웅성웅성
게시판에 가까워질수록 특히 더 소란스러웠다.
스스로 던전에 입장할 수 없는 하급 모험가들이, 함께 들어가 줄 B급 모험가를 찾느라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좋은 기회다 보니, 다들 필사적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꽤나 보이는 것이, 다른 지역에서 온 모험가들도 많은 듯했다.
“억울한 마법사!!! 여기다!”
게시판 앞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고개를 쭈욱 빼든 도린 형제가 목이 터져라 나를 불렀다.
순간, 게시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꺾였다.
─휙!
“뭐? 마법사?”
“그럼 B급??”
“저 사람이 마법사래!”
“저기 B급이 있다!!”
─우다다다
게시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마법사님!”
“나는 5년차 C급 모험가요! 나를─”
“저, 저는 6년차입니다! 저를 데려가─”
“오빠, 나야 얘야?”
“제 팔뚝을 보십쇼! 짐꾼으로 제격─”
“저는 팔이 두 개라 짐을 두 배로 들 수─”
나를 향해 미친 듯한 구애가 펼쳐졌다. 저마다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며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저는 이미 일행이 있습니─”
“그 더러운 손 떼라! 이 천한 것들!!!”
극대노한 도린 삼형제가 쩌렁쩌렁 외치며 달려왔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그는 우리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전우!”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니 너희들은 썩 꺼지거라!”
그렇게 도린 형제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길드를 빠져나왔다.
***
우리는 별도의 짐꾼이나 추가 인원 없이, 네 명이서 파티를 꾸려서 들어가기로 했다.
던전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짐꾼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도린 형제야 일반적인 C급보다는 강한 편에 속하고, 나랑 함께 의뢰를 해본 경험도 많다. 유사시에 함께 도망치는 것 정도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만약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면, 던전 내부에서 만나는 다른 파티와 합치는 방법도 고려해봄 직하다.
일단 나는 마법 공방에 들러서 마법서를 두 권 구입했다.
‘마법 방어 쉴드’와 ‘라이트’다.
쉴드는 원래부터 배울 생각이었지만, 라이트는 즉흥적으로 구매했다. 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라이트 뿐이기도 했고, 어두운 던전을 탐험하려면 필수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드윈이 약속한 전격 마법서가 아쉽군.”
마법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전격 마법을 배운다면 좋겠지만,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구매한 마법을 배우고, 잡화점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했다. 담요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망토와 육포, 건량 따위의 식료품들.
“이 정도면 되겠지?”
배낭이 제법 묵직했다.
나는 케른헴의 남문으로 나섰다. 던전은 남쪽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도린 형제와는 던전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길드에서 던전 위치가 표기된 약도를 받아왔는데, 지금 보니 딱히 필요가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갈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도 군복 입은 사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케른헴 남문에서부터 모험가나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니 곧 던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 주변 역시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던전에 입장하지 못해 B급을 찾는 사람도 있었고, 함박웃음을 지은 채 마나석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부럽군.
“어이! 억울한 마버.... 엘!”
먼저 기다리고 있던 도린 형제가 반갑게 나를 부르려다가 급하게 호칭을 변경했다.
“다들 준비는 잘 했어?”
“물론이다. 크흐흐. 이거이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심계항진 증세를 호소하는 도린 형제를 데리고, 던전 입구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향했다.
“입장료는 개인당 5실버입니다. 케른헴 출신이시라면 3실버입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모두가 동의한 일이다.
케른헴은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 그 외의 다른 굵직한 길드들이 연합해서 운영한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의미 없는 자경단원이나, 지금 던전 입구를 관리하는 사람도 이 연합체에서 파견한 것이다.
영주가 없으니 던전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은 획득자가 전부 가질 수 있지만, 대신 연합체를 위한 입장료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나와 도린 형제는 모험가 패를 보여주며 3실버씩 지불했다.
“케른헴 출신 B급 한 명에 C급 세 명... 확인했습니다. 재입장시 절반의 입장료를 또 지불해야 하니, 퇴장은 신중하게 결정해주십시오.”
관리인의 그런 주의사항을 들으며 입장했다.
“오, 이게 던전이란 곳인가.”
계단으로 얼마간 내려가니 ‘지하 1층’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나왔다.
계단을 등지고 좌우로 곧게 뻗어있는 통로.
통로는 듬성듬성 박혀있는 횃불의 일렁거림과 어우러져 사뭇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횃불은 던전 초입이니, 길드에서 박아둔 것 같았다.
우리가 내려온 계단 주위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근처가 안전지대라고 생각해서 쉬는 사람도 있었고, 퇴장을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이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장소에 있는 모양이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 몇 명에게 지하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물었지만, 구조가 복잡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역시 직접 찾아야겠네. 가보자.”
그렇게 말하며 통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밑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것에 주력할 생각이다. 1층은 이미 털릴 대로 털렸을 가능성이 높아서다.
그리고 중요한 것들은 깊숙한 곳에 있을 것이다. 살면서 던전 1층에서 대박을 쳤다는 개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고작 마나석 몇 개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 초입을 벗어나니 벽에 달려있던 횃불이 사라졌다. 그때 테도린이 배낭에서 랜턴을 꺼내서 켰다.
“오, 의외로 철저하게 준비해왔네?”
“크흐흐. 어두워서 보물을 못 보고 지나치면 낭패잖나.”
“그건 그렇지. 근데...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길래 이따위로 지어둔 거지?”
무슨 미로 같았다. 수많은 갈림길과 수많은 방들. 심지어 이 던전이 원형인지 사각형인지도 알 수 없었다. 들어오는 사람을 엿먹일 의도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지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던전에 처음 와봤나? 던전은 원래 이런 거다. 억울한 마법사!”
테도린이 무슨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렇구나... 그럼 보통 던전에서 내려가는 길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지? 층 중앙에 있나? 아니면 모서리 부분?”
“나도 던전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군.”
“이 새끼가?”
우리는 계속 이동했다. 모서리 부분으로 가서 테두리를 따라 살펴보고 싶었는데, 길이 워낙 꼬여있어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탐사 중인 다른 파티들을 종종 마주쳤기에, 그들에게 길을 물어봤다.
“혹시 2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저쪽 근처였던 것 같아요.”
“혹시 2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디....”
“아, 저쪽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친절하게 대답해줬고, 그 덕에 곧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체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
그리고, 2층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