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3)
케른헴과는 비교도 안 될 규모의 웅장한 도시.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건물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뚝 솟아있는 붉은색 탑이었다.
탑 반대편 저 멀리에는, 도시의 주인이 기거할 것으로 보이는 성채가 있었다.
‘저 붉은색 탑을 기점으로 꿈이 생성된 건가?’
붉은색 탑 주위가 유독 선명했다.
또 다른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성채도 비교적 또렷했으나, 그곳까지 늘어서 있는 건물들은 흐릿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과연...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군. 나름대로 디테일해.’
확실히 마법사답게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하급 모험가의 꿈들과는 달랐다. 보통은 꿈의 주인이 있는 곳을 중점으로 지척거리만 구현되는데, 그렇지 않은 곳까지 흐릿하게나마 구현해냈으니.
나는 일단 붉은색 탑 쪽으로 향했다.
탑에 가까워질수록 볼거리가 많아졌다. 마법공방, 음식점, 잡화점, 연금술 용품점 등. 무슨 물품을 취급하는 가게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도 제법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나보다 앞서 걷고 있는 사람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
그가 내 말을 무시한 채 계속 걸어갔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돌리며 다시 물었다.
“저기요. 저 붉은 탑이 혹시 적색 마탑입니까?”
“어아으어에아우으?”
그가 나를 휙 돌아보며 기괴한 말을 했다.
“아이 씨팔! 깜짝이야.”
“.......”
그는 잠깐 나를 쳐다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니었군....’
저자가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 간 이유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론의 무의식 속에서 ‘지나가는 행인’ 정도로만 구현된 인물. 그렇기에 선명한 모습으로 걸어 다니기는 하지만, 마치 잠꼬대하듯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이다.
그 뒤로도 선명하게 구현된 몇 명에게 더 말을 걸어봤지만, 대화가 가능한 수준의 인물은 없었다.
‘아무래도 탑으로 가봐야겠어.’
저 탑은 적색 마탑으로 추정됐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다. 재능있는 자들이 모여 불 속성 마법을 주로 연구하는 곳이라고.
탑 주변에 로브를 입은 사람이 많다는 점이나, 마법 관련 물품을 취급하는 곳이 많은 것을 보면 내 짐작이 맞을 것이다.
‘아론이 적색 마탑 출신이었나? 의외네.’
일단 ‘지나가는 행인’ 하나를 붙잡아 로브를 빼앗아 입었다. 지금 내 복장은 꿈속에 들어오기 전과 똑같은, 하급 모험가의 차림새.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행인’은 자신의 로브를 벗기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탑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나를 제지했다.
“멈추시오.”
처음으로 사람답게 말을 하는 자였다.
“본 마탑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소.”
젠장. 직접 들어가서 아론을 찾기는 글렀군.
축객령에 뾰족한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어떻게 찾아야 하지? 창조된 꿈의 세계가 넓다 보니, 꿈의 주인을 찾는 것조차 만만하지 않았다.
마탑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고민하고 있던 중,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웬 음식점에서 점원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음식점 점원이 말을 한다고...?’
긍정적인 신호였다. 고작 점원이 말을 할 정도로 상세하게 구현됐다면, 저 음식점은 아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꿈속에서 이미 아론이 저곳을 다녀갔다거나, 아니면 특별히 의미 있는 장소라거나.
나는 곧장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꼬맹이 점원이 밝게 인사하며 자리를 안내해줬다. 테이블에 앉은 나는 뭐라도 주문하기 위해 메뉴판을 살폈다.
‘미친! 가격이 왜 이래?’
충격적인 물가였다.
여기서 가장 저렴한 스튜조차 50쿠퍼.
‘...그냥 물만 시키면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여기는 꿈속이 아니던가.
진짜 돈도 아닌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쿨하게 스튜와 닭고기를 주문했다.
“1실버 50쿠퍼, 선불입니다. 손님.”
“여기 2실버다. 잔돈은 팁으로 가져라.”
은화 두 닢을 받아 든 꼬맹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연신 숙여대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네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혹시 아론이라는 마법사를 알고 있나?”
꼬맹이가 ‘아론?’ 이라고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한동안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이름만 들어서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손님 중에 워낙 마법사가 많으셔서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곳을 자주 방문하나 보지?”
“그럼요! 매일같이 찾아오세요. 저희 가게가 이 주변에서 가장 맛이 좋거든요.”
“주로 언제쯤 방문하지?”
“으음...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아마 곧 오실 거예요. 주방장님이 미리 음식을 준비하고 계시거든요.”
“그렇군. 알았다.”
꼬맹이가 꾸벅 인사하고 떠났다.
꼬맹이는 아론을 잘 모르지만, 아론은 꼬맹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로 대화가 가능해지려면,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구현해야 하니까.
즉, 아론은 이 음식점에 자주 와봤을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군.’
나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아론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일단, 아론이 나를 보면 논리적 불일치가 발생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과거를 회상하는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그 시점에 내가 등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장소 또한 마찬가지다. 아론은 나를 케른헴에서 만났다. 그런데 이곳 적색 마탑에서 나를 보면, 뭔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걸 느낄 수도 있다.
물론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무시하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하늘을 나는 꿈’처럼.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은 종종 그런 꿈을 꾸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론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
그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만약 아론이 논리적 불일치를 느낀다면, 그 불일치를 해소시켜줘야 한다.
꿈의 전환.
나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으니, 내가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과 배경으로 꿈을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것.
간단히 말해 다른 꿈을 꾸게 만드는 거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꿈속에 있을 때 꿈이 바뀌는 것은 이미 경험해봤다. 다만 내가 의도적으로 유도해본 적은 없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다른 꿈을 꿨을 뿐.
고민하느라 골치가 아파질 무렵,
“어서 오세요!”
드디어 아론이 여러 명의 마법사와 함께 음식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로브를 푹 눌러쓰고 조용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
아론은 원치 않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적색 마탑에서 수습 마법사로 지내던 시절의 꿈.
시기와 열등감에 시달리던 시절이었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아까 리자드맨과의 전투에서 엘의 마법적 재능을 목격한 바람에, 결국 떠올려버리고만 탓이다.
“한심한 놈.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더냐?”
음식점에서 스튜를 먹던 아론은 스승의 눈총에 급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네가 이번 합동 실습에서 또 낙제를 했다지? 덕분에 원로들 사이에서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
아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보다 삼 년이나 늦게 입탑한 로한은 벌써 하급 마법을 다루기 시작했는데, 너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 그 녀석은 불 속성이 트리플이지 않습니까... 저도 트리플이었다면.......”
“한심한 소리!”
아론의 스승이 격노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그저 속성 탓을 하고 앉아있으면, 네 속성이 더블에서 트리플로 바뀌기라도 할 것 같으냐? 재능이 없다면 더욱 노력해야지. 내 제자들 중에 너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너는 재능도 없는 주제에 노력도 게을리하니 그 모양인 것이다!”
‘빌어먹을 노인네.... 자기가 뭘 안다고....’
아론의 스승은 불 속성 쿼드러플의 고위 마법사였다. 고작 더블인 아론과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 그는 그런 스승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속성을 타고났으면 노력했을 거라고!’
아론은 자신의 실력이 떨어지는 건 온전히 속성 탓이라고 여겼다.
끝이 뻔히 보이므로, 노력할 맛이 안 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더블인 주제에 노력하는 건 멍청한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런 마음가짐은 결국 아론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처음엔 괜찮았던 녀석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꼬. 쯧.”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승은 더 이상 아론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스튜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편한 식사가 이어졌다. 물론 아론에게만 불편한 자리였다.
“로한. 이번에도 동기들 사이에서 차석을 했더구나. 그나마 네가 있어서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구나.”
스승이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허허. 겸손하기도 하지.”
사제 간에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때 음식점의 문을 열고 또 다른 마법사가 들어와 아론의 스승에게 다가가 말했다.
“랜달님. 마탑주께서 찾으십니다.”
“마탑주께서? 알았다. 지금 바로 가지.”
스승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너희들은 식사를 마저 끝내고 돌아오너라. 아, 아론. 너는 오는 길에 연금술사 길드에 들러서 시약을 받아 와라. 어제 요청해둔 것이니, 내 이름을 대면 알아서 내줄 것이다.”
“그, 그걸 왜 저한테... 저보다 기수가 낮은 제자들도 있잖습니까....”
“내 제자들 중 낙제한 녀석은 너뿐이다! 잔말 말고 다녀와라.”
“...알겠습니다.”
아론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그리고 스승이 떠나길 기다렸다가, 자신보다 기수가 낮은 제자를 향해 말했다.
“네가 다녀와라.”
“예?”
“뭘 못 들은 척을 하고 있어? 네가 연금술사 길드에 다녀오라고.”
“하,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분명히....”
─쾅!
아론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너도 나를 무시하나? 고작 네까짓 게?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냥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이놈도, 저놈도, 온통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투성이다. 아론의 열등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아론 선배님.”
누군가가 아론을 불렀다.
스승에게 칭찬받던 로한이었다.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실습에서 낙제한 벌로써 스승님께서 선배님에게 시키신 일인데, 그것마저 남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시다니.”
“이, 이... 이...!”
후배가 자신을 향해 쓴소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로한은 자신과는 다르게 스승의 총애를 받는 제자였으니까.
“저로서는 이 일을 스승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가, 가겠다. 내가 가겠다. 이제 됐나!”
죽여 버리고 싶다. 로한의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다. 스승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다. 날 멸시하는 모든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고 싶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거 완전 열등감 덩어리인 새끼였잖아?’
가만히 들어보니 이건 뭐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었다.
의뢰를 몇 번 같이 하며 아론이 자존심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낙제니, 남 탓이니 하는 잘못은 자기가 다 해놓고 화만 잔뜩 내고 있지 않은가?
어찌나 화가 났는지, 연금술사 길드로 가고 있는 와중에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내가 보기에 아론은 지금 완전히 분노에 잠식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한다는 뜻이다.
이 기회를 잘 노려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나는 길거리에 있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제치고, 아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론님.”
내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아론은 여전히 푸들푸들 떨며 걸어갈 뿐이었다.
“아론님.”
나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론님!”
그가 멈칫했다.
그리고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엘?”
순간,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일제히 고개를 꺾어 나를 바라본다.
기괴한 광경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가 나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논리적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네? 여기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곳은 적색 마탑이 있는─”
“자자, 빨리 움직이죠! 라이칸스로프를 한 마리 더 찾아야 하잖습니까?”
일단 꿈을 전환하도록 유도해보는 수밖에.
“......라이칸스로프?”
“아~ 오늘 발견하는 라이칸스로프한테는 달빛을 머금은 보주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아론에게, 우리가 의뢰 수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아론의 인식이 변하면, 꿈도 따라서 변한다.
꿈속에서 ‘저 문을 열면 귀신이 나올 것이다’라고 믿으면, 그 문을 열면 정말 귀신이 나오는 것처럼.
“간밤에 불침번을 섰더니 피곤해 죽겠네요. 얼른 의뢰를 마치고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서 맥주나 마셔야겠습니다.”
“의뢰.......”
그가 잠시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의뢰... 그래... 맞아. 의뢰를 수행하고 있었지.”
그 말과 함께, 새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화아악!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우리가 라이칸스로프를 찾으러 갔던 숲으로.
테도린과 대머리 모험가도 구현됐다.
‘됐어! 이제 내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됐다.’
꿈의 전환이라는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다.
두 번째 관문은 나를 공격하게 만드는 것.
이건 쉽지.
“아론님. 마법에 관해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좋다고 하셨죠?”
“그랬지. 왜, 뭐 궁금한 거라도 있나?”
“아, 정확히 마법에 관한 질문은 아니고....”
마탑 앞 음식점에서 역린을 봤으니까.
“마탑에는 재능 있는 마법사들이 모여 합동 실습이라는 걸 한다던데. 혹시 거기서 낙제하는 병신 같은 사람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