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8화 (8/200)

각성(2)

첫 호출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엘 님!! 이쪽입니다!

열심히 땅바닥을 살피던 중, 나를 부르는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인가? 슬라임인가? 나는 제발 슬라임이길 바라며 즉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뭐지?”

“아, 여기에 슬라임이 하나 있습니다.”

케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토실토실한 슬라임 한 마리가 있었다. 반투명한 몸속에 작은 벌레가 들어있는 걸 보아하니 식사 중이었나 보다.

“좋아! 잘했어. 이거 받아라.”

케빈에게 동화 세 닢을 튕기듯 건넸다.

그리고 즉시 마법을 캐스팅해 슬라임을 처리했다.

─파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5회]

[기초마법으로 처치한 몬스터 (15/20)]

시작이 좋군. 오늘 퀘스트를 끝낼 수 있겠어.

“마, 마, 마....”

“......?”

“마, 마법사셨습니까?!”

케빈이 부인의 외도를 목격한 남편마냥 경악했다.

“흠. 아직 마법사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고....”

생각해보니 좀 애매한 감이 있어서 부정했다.

내가 원소마법사이긴 하지만, 마법도 하나밖에 쓰지 못하고 각성도 못한 상태다. 적어도 각성 정도는 마쳐야, 남들한테 마법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오오...! 마법사셨다니! 가까이서 마법을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직 아니라니까 그러네.”

“검을 들고 다니시길래 검사인 줄 알았는데 마법사였을 줄이야!”

“마법사 아니라고.”

“내가 마법사와 함께 의뢰를 수행하는 날이 오다니!”

“이 새끼가?”

전혀 듣고 있지 않군.

케빈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마법이 그렇게 신기한가? 아무리 D급이라도 모험가 일을 하다 보면 마법을 볼 기회가 더러 있다. 난이도 있는 의뢰에 짐꾼으로 참여하면 되니까.

그런데도 이번에 처음 봤다니. 아마 케빈은 지금의 꽃 채집 의뢰처럼 쉽고 안전한 일을 선호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아무래도 다른 분들께도 알려야겠습니다. 엘 님이 마법사였다고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다른 일행에게 달려가려는 케빈의 목덜미를 붙잡아 제지하고 사뭇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놀러온 게 아니다. 정 말하고 싶다면, 네가 맡은 일부터 끝낸 뒤에 해. 해가 지기 전에는 일을 끝내야 할 거 아니야?”

헛짓 말고 슬라임이나 더 찾으란 말이다!

“제가 잠시 본분을 잊었군요. 주의하겠습니다....”

의기소침해진 케빈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주고 돌아왔다.

그 후로는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엘 님!

─슬라임 입니다!

─여기 놀이 출현했습니다!

D급 모험가들은 꽃을 채집하는 와중에 착실하게 나를 불러댔다. 나는 그들이 찾은 슬라임과, 이따금씩 나타나는 놀들을 처리해줬다.

심지어 어떤 여성 모험가는 슬라임을 두 마리나 찾아줬는데, 고마워서 1쿠퍼를 더 얹어줬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1회]

[기초마법으로 처치한 몬스터 (19/20)]

어느덧 각성까지 한 마리만 남은 상황.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다.

혼자서 찾을 땐 하루 종일 수그리고 돌아다니느라 꼽추가 될 지경이었는데, D급을 부려 먹으니 얼마나 편한가!

물론 부려먹기만 하는 파렴치한이 될 순 없다. 내가 그들 대신 놀을 처리해주고 있다고는 하나, 본디 맡은 의뢰의 내용은 인다레타 꽃 채집. 나도 어느 정도는 채집을 해야겠지.

그렇게 돌아다니며 꽃을 채집하던 중,

─엘 님! 꺄아아악!!!

꺄아악?

기존과는 다른 종류의 외침이 들려왔다.

***

“어라? 이게 웬 떡이냐. 흐흐.”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나무 뒤에 숨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두목에게 가서 본 것을 알렸다.

“형님. 저쪽에 꽃을 캐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뭐야? 당장 안내해. 다들 따라와!”

산적답지 않게 그럴싸한 철제 흉갑을 입고 있는 두목이 안내를 종용했다. 두목을 포함한 네 명의 산적들이 이동했다.

“바로 저 여잡니다.”

그들은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작당을 모의했다.

“당장 습격할까요?”

“아니. 기다려봐라. 차림새를 보니 화전민이 아니라 모험가다. 근처에 다른 동료가 있을 수 있어.”

“그럼 어쩌죠? 포기합니까?”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흠.”

산적 두목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그는 결정을 내린 듯 부하에게 말했다.

“치명상은 입히지 말고, 적당히만 공격해서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라.”

“비명을 지르게요? 근처에 다른 모험가들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요?”

“그걸 노리는 거야. 일부러 저 여자의 동료가 모여들게끔 만들고 한 방에 털어먹는 거지. 크크크.”

한심하게 꽃이나 캐는 녀석들이다. 분명 D급 모험가 중에서도 약한 축에 속할 터. 일반인이 무장한 수준일 게 뻔하다. 그런 녀석들이 서너 명 모여 봤자다.

물론 자신의 부하들도 실력이 형편없었지만, 초짜 모험가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질 정도는 아니다.

“...근데 저 여자의 동료 중에 의외로 강한 녀석이 있으면 어떡하죠?”

“야! 우리에겐 형님이 있잖냐! 무려 탈영병... 아, 아니, 병사 출신이시라고. 입고 계신 갑옷을 봐봐. C급 모험가도 상대가 안 될걸? 그렇죠 형님?”

“그렇지. 크크크. 나를 상대하려면 B급 정도는 데려와야지.”

“역시 형님이십니다. 흐흐흐.”

그들은 그렇게 음흉하게 웃어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

─꺄아아악!!!

처음에는 나에게 슬라임을 두 마리나 찾아줬었던 여성 모험가의 비명만 들렸었다.

─엘님!! 엘님!!!

─도와주십쇼!

그런데 곧 케빈을 비롯한 다른 모험가의 다급한 목소리도 섞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D급 모험가들이 네 명의 산적과 대치 중이었다.

“흐흐흐.”

“가, 가까이 오지 마!”

케빈이 덜덜 떨며 소리쳤다.

케빈과 남자 모험가는 아직 멀쩡했으나, 여성 모험가는 이미 공격을 당했는지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다.

‘씨팔, 산적이라니. 곤란하게 됐군....’

산적.

게임 속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저 산에서 삥이나 뜯는 허접한 양아치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경험해본 산적들은 기존의 이미지와는 결을 달리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일을 주된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대체적으로 산에 들어오는 자들보다는 강해야만 성립되는 일.

실력 있는 프로 살인마라는 뜻이다.

“너, 너희들 따위는 엘님만 오시면.... 아! 엘님! 오셨군요!!!”

케빈이 나를 발견하고 환해진 안색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산적들도 일제히 나를 응시했다.

“뭐야? 네가 그 엘님인가 뭔가 하는 놈이냐?”

“이 애송이 모험가들보다는 나아 보인다만... 다들 애타게 부르던 거에 비해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백마 탄 기사라도 오실 줄 알았는데. 실망이군. 크크크.”

산적들이 저마다 나를 보고 품평해댔다.

그때, 케빈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까불지 마라! 엘님은 마법사다!”

“......!”

“뭐, 뭣?!”

“마, 마법사라고?”

다시 한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산적들.

그리고는─

“푸, 푸흡─!”

“푸하하하하하!!!”

“요즘 마법사는 지팡이 대신 검을 드나?”

“꼬맹아, 허풍을 쳐도 그럴싸하게 쳐야지. 우리를 웃겨 죽일 셈이냐? 크크크.”

자기들끼리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내 행색이 마법사 같지는 않다. 체인 메일에 가죽 장갑과 장화를 신고 롱소드까지 차고 있는, 영락없는 칼잡이의 모습이다.

“저, 정말이다! 엘님! 어서 저놈들에게 마법으로 본때를 보여주시죠...!”

아니, 왜 자꾸 네가 까부는 건데?

오늘 남은 마법 횟수는 단 1회.

한 방에 저놈들을 모조리 제압할 수도 없을뿐더러, 마법을 보여준다고 해서 저놈들이 겁먹고 도망가리라는 보장도 없다.

‘......마법은 최후의 수단이다.’

마법을 사용할 경우 각성 퀘스트도 하루 늦춰진다. 그래도 그게 죽는 것보단 나으니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써야겠지.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때에.

“흐흐흐. 뭐 하고 있는 거지? 저 꼬맹이가 마법을 보여 주라잖아. 어서 마법을 써보라고?”

“.......”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봐, 마법사 나리. 그냥 순순히 가진 것들을 내놓지그래?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살려서 돌려보내 주지. 크크.”

미친 소리.

나는 산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할 만큼 순진하지 않다. 범죄자나 탈영병 같은 쓰레기들이 모여 만든 집단을 무슨 수로 믿는단 말인가?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조용히 눈을 굴려 산적들을 자세히 살폈다.

고작 네 명. 산적치고는 작은 규모다.

그것도 한 놈을 제외하고는 갑옷조차 없다. 내가 걱정했던 것만큼 강한 산적들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 꽃이나 캐는 애송이 D급 모험가를 노렸겠지. 진짜배기 산적이라면, 훨씬 돈이 되는 상단 같은 걸 털었을 것이다.

문제는 갑옷을 입은 놈.

탈영병으로 보이는 저놈만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흉갑뿐이지만 무려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다. 만약 병사 시절에 저 갑옷을 지급받은 거라면, 잡졸 출신은 아닐 것이다.

‘저 녀석만 잡으면 승산이 있다.’

나는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있던 산적에게 다가갔다.

“저항하지 않으면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뭐? 푸하핫! 한동안 무게 잡고 우릴 노려보더니만, 결국은 항복이냐?”

“...저기 뒤에 계신 분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누구? 아, 우리 형님? 그거야 당연하지. 흐흐흐. 잘 생각했다. 그럼 얌전히 장비를 벗어서 바닥에.... 잠깐! 이리 와봐. 허리에 달려있는 그건 돈주머니인가? 그래 그거. 일단 그것부터 나한테 넘─”

─서걱!

산적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푸슈슉!

내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떼어내는 척하면서, 검집에 들어있던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목을 벤 것이다.

‘미친놈인가? 근접해 있으면서 허리에 손을 갖다 대는 걸 허용해주다니.’

어차피 기습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한 놈을 처리했다.

“어어...?”

“무, 무슨....”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산적들이 당황했다.

이 틈을 놓칠 순 없다.

나는 당황하고 있는 그들 중 하나의 팔을 베어버리고, 그대로 두목을 향해 돌진했다.

─카앙!

산적 두목이 손쉽게 내 검을 막아냈다.

‘역시 졸개들과는 다르군.’

맞부딪힌 두 자루의 검 사이에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오래지 않아 힘의 균형이 깨지고 한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크크크. 싸움이라니. 멍청한 선택을 했군.”

산적 두목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힘겨루기에서 밀리고 있는 쪽은 나였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잖아?”

이대로 버티면 자세가 무너진다.

나는 몸을 뒤로 빼내며 거리를 벌렸다.

뒤편에서 케빈 일행과 나머지 산적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쪽까지 살필 여력은 없었다.

“눈치챘었나? 그래도 저항하지 않았다면 고통 없이 죽여줬을 텐데. 네놈은 산채로 가죽을 벗겨주마! 흐아압!!”

녀석이 내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러왔다.

나 역시 바로 응수했다.

─챙!

검을 잡고 있는 손아귀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옆으로 한 발짝 밀려났다.

몇 번의 공방이 더 오고 갔다.

─카앙!

─채앵!

그제서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힘뿐 아니라, 검술도 나보다 윗줄이다.’

─촤르르륵!

녀석의 검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체인 메일을 뚫지 못해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내 몸에 검이 닿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물론 내 검이 놈에게 닿은 적도 있다. 그러나,

─텅!

번번이 플레이트 아머에 막혔다. 흉갑뿐이었지만, 몸통을 보호해주고 있으니 도저히 치명타를 먹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당한다.’

뭔가 반전이 필요했다.

마법을 쓸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인간은 피부를 통한 단발적인 감전은 의외로 잘 버틴다. 기회는 단 한 번뿐. 결정적인 순간에 써야 한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왼손으로는 검날을 잡아 하프소딩 자세를 취했다.

“자살이라도 할 셈이냐!”

놈이 그리 말하며, 양손으로 치켜든 검을 사선으로 내리 휘둘렀다.

─후우웅!

날카로운 검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나는 그것을 막는 대신, 체인 메일을 믿고 왼쪽 어깨를 내주기로 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서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빠득. 나는 이를 악물고 짧게 잡은 검으로 놈의 목을 찌를 기세로 한 발짝 파고들었다.

“미, 미친!”

내가 칼을 맞아가면서 동귀어진이라도 하듯 파고들자 녀석이 경악했다. 놈은 급한 대로 왼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목을 향해 찔러들어오는 검을 막으려 시도했다.

‘됐다!’

내가 실제로 노린 것은 목이 아니었다.

플레이트 아머가 보호해주지 못하는 부위.

놈이 팔을 들어 올리며 드러난 왼쪽 겨드랑이.

심장과 가까운 부위다.

─푸욱!

단창처럼 집어 든 내 검이 녀석의 겨드랑이에 박혔고,

─파지지직!

내 손에서 방출된 전류들이, 검신을 타고 녀석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끄어억....”

희미한 신음소리와 함께 놈이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0회]

[기초마법으로 처치한 몬스터 (20/20)]

‘뭐, 뭐야. 인간도 몬스터로 쳐주는 거였어?’

당황할 틈도 없이, 처음 보는 메시지들이 주룩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각성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능력치의 제한이 해제됩니다.]

[기존의 미반영 능력치가 반영됩니다.]

[이제부터 하급 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

...

...

여러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특히나 눈길을 사로잡는 메시지가 있었다.

성장 보조 특성인 ‘꿈’에 관한 것이었다.

[성장 보조 특성이 강화됩니다!]

[꿈속에서 꿈의 주인에게 마법을 맞아 사망에 이르는 경우, 해당 마법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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