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1)
마법을 배운 지 사흘이 지났다.
케른헴 인근의 숲.
놀랍게도 나는 슬라임을 찾아다니고 있다.
“아오. 여기에도 없네.”
어렵사리 마법을 배운 내가 왜 슬라임 따위나 찾고 있냐면, 그건 각성 퀘스트 때문이다.
[공통계열의 기초마법으로 몬스터를 20마리 이상 처치하여 직업 각성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마법만 쓸 수 있으면 몬스터 20마리 처치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일 줄 알았는데, 몇 가지 사소한 애로사항이 있었다.
일단 마법의 사용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점.
이건 마나의 문제가 아니다.
마나가 충분하다고 한들 하나의 마법을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다. 모든 마법은 속성이나 숙련도에 따라서 하루에 쓸 수 있는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 횟수를 모두 소진하면 자정이 넘어서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스태틱 쇼크를 하루에 6회까지 쓸 수 있다.
마법서에는 처음 배울 경우 보통 2회 정도 사용 가능하다고 했는데, 나는 그보다는 많았다. 아마 내 속성 덕분인 듯하다.
다른 문제는....
“슬라임만 한 방에 죽는단 말이지.”
마법공방의 직원이 말한 대로 살상 능력이 조금 떨어졌다. 경찰이 사용하는 테이저건이나 전기충격기 비슷한 느낌이랄까.
마법을 배운 바로 다음날 다이어울프에게 스태틱 쇼크를 써봤는데, 세 번을 써야 죽었다.
처음엔 마비, 두 번째엔 기절, 세 번째에 사망.
전격 속성의 보정을 받은 게 이 정도다.
마법의 위력 역시 숙련될수록 강해진다고 한다.
뭐, 보통의 경우라면 마비만 돼도 충분하다. 칼질로 마무리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는 각성 퀘스트를 해야 하는 몸. 칼질이 아닌, 마법으로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
칼질로 빈사 상태를 만들어놓고 마법으로 막타만 노려볼 수도 있겠으나, 불확실하다. 만약 안 죽으면 아까운 마법 횟수만 날려 먹는 셈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안전하게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슬라임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하, 도대체 어디 있... 오, 저기 있네.”
근처에 있는 나무 밑동에서 흐물거리고 있는 슬라임이 보였다. 언제 봐도 참 귀여운 녀석이다. 방석으로 쓰면 폭신폭신하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파지직!
몸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즉시 손에 푸른 스파크를 일으키며 전류가 모여들었다.
이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나는 복잡한 계산이나, 주문 영창 따위가 필요 없었다.
슬라임에게 손을 뻗어 전류를 쏘아 보냈다.
녀석이 경련하듯 움찔거리다가, 마치 얼음이 녹듯 녹아버렸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1회]
[기초마법으로 처치한 몬스터 (13/20)]
잘하면 내일 퀘스트를 끝낼 수도 있겠군.
오늘 한 마리 더 잡고, 내일 여섯 마리를 잡으면 20마리를 채운다.
근데 내일 여섯 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해가 뜨자마자 나와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 하루 종일 찾은 게 다섯 마리다.
“내일은 더 멀리까지 나가봐야 하려나....”
슬라임은 몬스터 중 최약체다. 게다가 슬라임의 핵은 연금술이나 마법 연구의 재료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서 늘 수요가 있다.
그렇다 보니 최하급인 D급 모험가뿐 아니라, 마땅한 전투 능력이 없는 일반인 중에서도 슬라임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결국, 케른헴에서 가까운 거리일수록 슬라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늘만 해도 숲에서 슬라임보다, 슬라임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더 많이 봤을 정도다.
“일단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남은 한 마리나 마저 찾자.”
슬라임은 반투명하기 때문에, 어두우면 더욱 발견하기 어려워진다. 일단 오늘 남은 마법 횟수를 소진해야 하니, 걱정은 도시에 돌아간 뒤에나 하도록 하자.
나는 그렇게 산삼을 찾아다니는 심마니마냥,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동안 더 돌아다녔다.
***
“흐으읍- 하, 이 익숙한 향기.”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땀 냄새, 피비린내, 몬스터 체액 따위의 악취가 코를 통해 흘러들어온다.
“익숙하지만 늘 역겨워!”
온갖 역한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당연히 모험가 길드다.
오늘은 케른헴에서 좀 거리가 있는 곳으로 나가볼 생각이다. 어젯밤 고민해본 결과 멀리 나가는 만큼, 뭔가 허접한 의뢰라도 받아 파티를 꾸려서 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주로 D급 모험가들이 하는 의뢰에 꼽사리 끼려고 한다. 부려먹기 편하니까.
의뢰 수행 중 슬라임을 발견하면 나한테 알려달라고 할 요량이다. 슬라임의 핵이 통상적으로 2쿠퍼에 거래되니, 그거보다 조금 더 준다고 하면 열성적으로 찾아주겠지.
나는 각성 퀘스트를 해서 좋고, 그들은 부수입을 올려서 좋고.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도린 형제는 오늘도 안 보이는군.”
도린 형제가 있다면 난이도가 좀 있는 의뢰를 받아, 돈도 벌면서 퀘스트도 진행할 수 있겠지만, 이 도박중독자 새끼들은 며칠째 길드에 오지 않고 있다.
원래 하급 모험가들이 대체로 좀 이렇다.
돈 좀 만지면 그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놀고먹는 경향이 있다. 한심한 녀석들. 열심히 일해서 실적 쌓을 생각은 안 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나도 실적이 제법 쌓였을 텐데.”
하나뿐이지만 이제 마법도 쓸 수 있으니, B급 승급을 노려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왕 시해자’라는 메인 퀘스트를 하려면 모험가 생활은 청산해야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마법들도 더 배워야 하고, 숙련도도 올려야 한다. 연습 상대로는 역시 몬스터만한 게 없지. 다른 마법서를 구매하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돈이 필요하니, 승급할 필요가 있다.
승급에 관해 문의하기 위해 접수대로 향했다.
“어머, 엘 씨.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부터 나오셨네요. 아마 엘 씨가 케른헴에서 가장 부지런한 모험가일 거예요.”
다가오는 나를 보고 여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괜찮은 의뢰라도 추천해드릴까요?”
“아, 그건 괜찮습니다.”
나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흠흠. 다름이 아니라... 제가 B급으로 승급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모험가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진짜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의뢰를 해왔다. 하루에 두 탕 뛴 적도 많았다. 이 정도면 승급할 자격이 있을지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으나, 그녀가 짐짓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음... 아무리 엘 씨가 성실하게 일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승급은 무리에요. 자잘한 실적은 충분한데... B급 수준의 의뢰 실적은 부족하거든요.”
리자드맨 토벌같이, 난이도 있는 의뢰 실적이 부족하다는 소리군.
“그럼 혹시 제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네에?? 엘 씨가 마법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나 같아도 4년간 칼질만 하던 놈이 갑자기 마법을 쓴다고 하면 배를 움켜잡고 비웃을 것이다.
마법 횟수가 아까워서 당장 보여줄 수도 없고....
어쨌든 그녀는 웃으면서도 대답을 해줬다.
“쿡쿡. 아무런 실적이 없다면 공격마법을 하루에 15회 이상 사용할 수 있어야 B급이 되니까, 엘 씨 정도의 실적이라면 10회 정도 사용할 수 있으면 되겠네요.”
“10회요? 그렇게나 많이요?”
내 실적 나름 괜찮다면서?
“마법으로 실적을 쌓으신 게 아니라서 온전히 반영해드리기는 힘들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공격마법 10회라.
내가 지금 6회를 사용할 수 있으니, 마법을 한두 개 정도는 더 배워야 가능한 수치다. 아니면 스태틱 쇼크의 숙련도를 올려서 횟수를 늘리거나.
뭐, 당장 승급은 못하더라도 필요한 조건은 알았으니 됐다.
나는 마법을 배우면 꼭 자기한테도 보여 달라며 웃는 여직원을 뒤로하고, 게시판으로 향했다.
게시판을 읽고 있으려니, 파티원을 구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이어울프의 가죽을 구하러 갈 사람을 찾고 있소!”
“인다레타 꽃 채집 의뢰를 함께하실 D급 모험가 한 분 계십니까?”
“사스콰치 토벌, 당신만 오면 출발!”
어우, 정신 사납네.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의뢰를 함께할 멤버가 모이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직접 나서서 구하는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에 이렇게 외쳐대는 거다.
“인다레타 꽃을 채집하러 가실 D급 한 분 안 계십니까? 채집지 근처에서 놀이 출현할 수 있으니, 놀과의 전투가 가능한 분으로 찾습니다!”
이건 좀 솔깃했다.
각종 시약의 재료로 쓰이는 인다레타 꽃은 주로 숲이나 산에서 많이 자란다.
슬라임 서식지와 겹친다는 뜻이다.
놀 따위야 고블린 보다 조금 강한 정도니, 내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열정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상당히 앳돼 보이는 남자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채집을 어디로 가시는지?”
“아, 동쪽으로 걸어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산으로 갈 생각입니다.”
“인원은?”
“현재 저 포함 세 명입니다.”
D급 모험가 세 명에, 멀리 있는 산으로 간다니. 이거 완전 나를 위한 파티잖아?
“저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의뢰의 내용에 관한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더 듣고 나는 참가를 결정했다.
***
인다레타 꽃을 채집하러 가는 길.
“슬라임을 찾으면 3쿠퍼를 주신다고요?”
“그렇다니까. 잡아 올 필요도 없고 그냥 나한테 위치만 알려주면 돼.”
“그거야 어렵지는 않지만....”
D급 모험가 케빈이 뒷말을 흐렸다.
“어렵지는 않은데 왜? 뭐?”
“슬라임을 찾아다니면서 이동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아직 산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나는 케빈의 요청에 의해 자연스럽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같이 의뢰를 수행하게 되면, 특별히 나이가 많지 않은 이상 낮은 등급의 모험가에겐 반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케빈은 거의 청소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렸다.
“에이. 무슨 소리야? 당연히 지금은 이동에 집중해야지. 내 말은, 산에 도착한 뒤에 찾아달란 뜻이야. 어차피 산에서도 인다레타 꽃을 찾아다녀야 하잖아? 그때 겸사겸사 슬라임도 있나 살펴봐 달란 거지. 어때?”
“아, 그런 거라면야.”
케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나는 뒤따라오고 있는 다른 두 명의 D급 모험가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다. 그들로서도 손해 볼 부분이 전혀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목표했던 산에 도착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즈음이었다.
산 중턱까지 올라간 뒤 각자 챙겨온 건량으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나는 채집을 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곳은 놀의 서식지라니까 너무 멀리까지 흩어지지는 마. 혹시 놀을 마주친 사람은 혼자서 섣불리 싸우다 다치지 말고, 그냥 나를 불러라. 내가 상대할 테니. 아, 슬라임을 발견한 경우에도 꼭 부르고.”
내가 약자를 보호하는 스윗한 남자라서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D급이라도 놀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여러 마리라면 상처 입을 각오를 해야겠지만.
아무튼, 이 D급들이 다치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는데, 죽는 경우에는 내가 몹시 난처해진다.
파티원의 사망은 모험가 길드에서 굉장히 심각하게 다루는 사안이다. 파티원 중 몇 명이서 작당하고, 다른 한 명을 죽인 뒤 돈이나 장비를 강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몬스터한테 죽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시체를 잘 보존해서 챙겨가야 하는데,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느니 차라리 놀을 상대하는 게 낫다.
그리고 이들은 슬라임 탐색이라는 대업을 이뤄야 하는 나의 소중한 일꾼들이 아니던가? 소중한 것은 소중히 다뤄야 하는 법이다.
“엘 님....”
“이렇게까지 저희를 신경 써주시다니...!”
어쨌거나 이 녀석들은 감동한 모양이다.
“슬라임 찾기도 절대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자, 어서 움직여!”
기합 소리를 내며 D급 모험가들이 흩어졌다.
“......느낌이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