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비켜주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즉시 케른헴을 향해 출발했다.
‘마법서야 기다려라...!’
부푼 마음을 안고서.
덜 억울한 마법사
엉성한 돌담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케른헴의 성벽.
우리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케른헴에 도착했다.
도시로 들어가는 북쪽 출입구에는 두 명의 자경단원이 지키고 서 있었다. 솔직히 왜 저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곳은 버려진 도시답게, 검문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무의미한 자경단원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끼이익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간 길드는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모험가들로 시끌벅적했다. 벌써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나는 행정적인 일 따위는 도린 형제에게 떠넘기고, 빈 테이블에 앉아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회중시계를 어떻게 팔지?’
라는 고민이다.
케른헴같은 허접한 도시에 시계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없다. 마땅히 처분할 장소가 없다는 뜻이다.
상회나 떠돌이 상인이라면 매입해주겠지만...
뱀 같은 혓바닥을 놀려대며 ‘음? 이 회중시계에는 고블린 냄새가 배어 있군? 가격을 깎아야겠소.’ 따위의 트집을 잡아 흥정을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시계에는 냄새가 배지 않는단 말이다...!
상인에게 처분하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자.
그보다는 어느 정도 재력이 있고, 시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직접 파는 게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세상에 시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그냥 재력 있는 사람만 찾으면 되겠다.
내가 희망하는 가격은 20~25실버.
이 정도를 지불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여기 있네?’
지금 이 모험가 길드에 제법 있지 않은가.
일단 나부터가 3골드 가까이 보유한 사람이다. 물론 나는 특이한 경우고, 보통의 C급 모험가는 골드는커녕 10실버 이상 모은 놈도 드물다.
하지만 B급이라면 다르지.
의뢰 한 번에 몇 실버씩 받는 그들이라면 충분히 회중시계를 살만한 여력이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칼잡이보다는 마법사가 좋겠다.
칼잡이 B급 모험가는 밑바닥부터 구르며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자가 많기 때문에, 가격을 올려치기가 쉽지 않다.
반면, 마법사는 마법 몇 개만 쓸 줄 알아도 바로 B급으로 대우해주니, 젊고 어리숙한 녀석들이 더러 있다. 이런 녀석들을 노릴 생각이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모험가 길드 내부를 둘러봤다.
“.......”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C급 모험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접대받듯 술을 마시고 있는 젊은 남자.
나는 그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마법사님.”
“음? 아, 너는 이틀 전의 그... 이름이 뭐였더라?”
리자드맨 토벌 때 함께했던 마법사였다.
적중률이 형편없어서 내 배에 구멍이 뚫리게 만든 그 허접 마법사.
“엘 입니다. 마법사님.”
“그래,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이미 제법 취한 상태였는지, 그가 몽롱하게 눈을 끔뻑이며 아는 체했다.
“이번에도 C급 모험가들을 데리고 의뢰를 다녀오신 모양이군요. 분명 강력한 동료가 많으실 텐데도 늘 이렇게 C급과 함께해주시다니, 역시 마음이 넓으십니다.”
전혀 아니다.
B급 모험가들과 함께 의뢰를 나가면 보수를 동등하게 나눠야 하니 C급을 데려가는 거다. 그래야 자기가 먹는 비율이 높아지니까.
“음? 하하핫! 뭐 그렇지. 기회를 베푸는 거랄까.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너희들도 강한 몬스터와 싸우는 경험을 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순간, 동석해있던 C급 모험가들의 얼굴이 굳었다.
...이 새끼 이번에도 뭔가 삽질한 모양이군.
어쨌거나 나는 계속 입에 발린 말을 해댔다. 원래 술에 취한 사람은 대충 아무 칭찬이나 해줘도 좋아 죽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일전의 리자드맨과 싸운 경험은 제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 마법사님 덕분이죠.”
“하하! 전에 봤을 땐 쌀쌀맞아 보였는데 지금 보니 꽤 싹싹하군.”
나는 그렇게 잠시 서서 마법사의 술주정을 받아줬다. 그리고 대화 중간중간 고개를 휙휙 돌리며 길드 내부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마법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지?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 동료와 길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근데 약속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안 보이는군요. 혹시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글쎄. 저녁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군.”
“시계를 보시면 되잖습니까?”
“음... 나는 시계가 없다.”
“예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놀라는 척했다.
“마법사님 같은 분께서 시계가 없으십니까?”
“그, 그래.”
“그럼 매번 시계탑에서 시간을 확인하십니까?”
“그, 그렇지.”
“저런.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그,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이 회중시계로 말할 것 같으면 체스터 백작 휘하의 긍지 높은 기사 제임스 경이 소중히 사용하던 시계로써, 제가 의뢰수행 중 우연찮게.......”
33실버에 팔았다.
***
“또 오시게!”
우리는 우람한 팔을 흔들어대며 배웅하는 대장장이를 뒤로하고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고블린한테서 얻은 전리품을 대장간에 처리하고 받은 금액은 22실버 87쿠퍼. 레이피어 덕분에 짭짤하게 나왔다.
의뢰의 보수와 시계를 판매한 액수까지 더하면,
총 56실버 87쿠퍼다.
“자, 이제 정산을 해보실까.”
일단 올리버에게 사흘 치 일당을 건넸다.
이틀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대박을 친 관계로 도린 형제와 협의 하에 사흘 치를 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대체 뭘 배웠다는 거지?
60쿠퍼를 받아든 올리버가 꾸벅 인사하고 떠났다.
나와 도린 삼형제는 각각 14실버씩 나눠 가졌다.
쿠퍼 단위의 잔돈은, 술 취한 마법사를 꼬드겨 시계를 판 공로를 인정받아 내가 갖기로 했다.
“수고 많았다, 억울한 마법사!”
“그럼 우리도 이만 가보도록 하지.”
“도박장에 가야 해서 말이야. 크흐흐.”
그렇게 도린 형제도 떠났다.
나는 즉시 케른헴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서를 구매하기 위해서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가는 동안 몇 번이고 가죽 주머니를 확인했다. 3골드 이상의 거금을 지니고 다니려니 괜히 불안해진다.
혹시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돈을 흘리진 않을까. 갑자기 누군가 습격해 오진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감. 대체로 나에겐 억울한 일이 많이 발생하니까.
다행히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라텔라 마법공방]
간판의 재질부터가 고급스러운 이곳은, 광장에서도 가장 가까운 노른자 땅에 당당히 위치해 있다.
마법 관련 물품들을 판매하고, 아이템의 감정이나 마법부여 등 마법공학을 이용해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는 곳이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으로 들어가니 여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로브를 입고 있는 걸 보니 마법사 같았다.
“아, 공통계열의 기초마법서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어떤 마법 말씀이시죠?”
“매직 미사일입니다.”
“매직 미사일이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가 책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진열되어있는 물품들을 구경했다. 대장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삐까뻔쩍한 장비들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가격표를 보니 거의 골드 단위다.
‘아직은 꿈도 못 꾸겠군.’
자고로 게임이란 한푼 두푼 모아서 장비를 맞추는 재미가 쏠쏠한 법이지만, 나는 오직 마법서를 위해 돈을 모아야 했기에 그런 재미를 누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니 다른 재미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마법을 못 써서 팔자에도 없는 칼질을 4년이나 해댔는데 재미있었을 리가.
시팔, 나도 게임을 게임답게 좀 해보자!!
기왕 게임에 떨어진 거 긍정적으로 살아가려 했지만, 그동안은 억울한 일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드디어 마법서를 얻을 테니까.
‘...근데 이 여자는 왜 아직도 안 오지?’
마법공방 직원은 아직도 책장을 뒤져대고 있다.
찡그린 얼굴로 ‘흐음’, ‘어디갔지?’ 따위의 불길하기 그지없는 말들을 내뱉는 걸 보니, 내게 또 억울한 일이 발생할 것만 같아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왜, 왜 맨손으로 오는 건데...!?
“죄송한데, 매직 미사일은 없네요.”
그녀는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장부를 꺼내 살폈다.
“어디보자... 아, 지난주에 다른 도시에서 수요가 있다며 마르자 상회에서 매입해갔네요.”
“그, 그런... 더 없습니까? 한 권만 있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케른헴에는 마법서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러 권 비치해 두지는 않아요. 원하신다면 본점에 요청해드릴까요?”
“오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언제쯤 도착합니까?”
“빠르면 보름? 늦으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
미친! 그건 너무 오래 걸리잖아!
물론 4년을 기다려온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나는 3골드를 모은 시점부터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다.
“더 빨리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그건 너무 늦는데....”
“정 급하시다면 다른 도시로 가서 구매하시는 건 어떠세요?”
“하아. 그건 곤란한데.......”
다른 도시는 물가가 더 비싸다. 영주가 있기 때문에 세금이 붙어서다.
그냥 한 달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꼭 매직 미사일을 원하시나요? 다른 기초마법도 많이 있잖아요. 대표적으로 쉴드나 라이트 같은 거.”
“아... 저는 공격마법이 필요합니다.”
각성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마법으로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 몬스터한테 백날 천날 라이트 따위를 써봐야 눈이나 부셔하겠지. 소용없는 짓이다.
“다른 공격마법도 있는걸요?”
“......예?”
“공통계열의 기초마법 중에서도 공격마법을 원하신다는 거잖아요? 있어요. 매직 미사일 말고도. 지금 저희 지점에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네, 네!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다시 책장으로 가서 책 두 권을 꺼내왔다.
“이건 어떠세요?”
먼저 내민 마법서는 [파이어 애로우].
모험가 일을 하며 제법 본 적 있는 마법이다.
“...이건 불 속성 마법이잖습니까? 제겐 불 속성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공통계열의 기초마법은 속성과 관계없이 배울 수 있거든요. 물론 불 속성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요.”
오? 그런 거였어?
어디 도서관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마법에 관한 정보를 얻기란 좀처럼 힘들었다. 같이 의뢰를 나간 마법사에게 물어봤자, 주제넘은 질문이라며 잘 안 알려준다.
“이건 얼마죠?”
“4골드 50실버에요.”
“......!”
...진짜 더럽게 비싸네. 차라리 다른 도시에 가서 매직 미사일을 사는 게 싸게 먹힐 것이다.
나는 그녀가 가져온 다른 마법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뒤에 있는 마법서는요?”
“아, 스태틱 쇼크요? 이건 2골드 50실버입니다.”
“......!!?”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려다가,
문득 이상함이 느껴졌다.
“...근데 그건 왜 싼 겁니까? 매직 미사일보다도 싼데.”
“비인기 마법이라 그래요. 사거리도 짧고 위력도 비교적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공통계열이지만, 전격 속성이 없으면 잘 안 배워요. 전격 속성이 더블 이상이어야 권장 할만─”
“그걸로 하겠습니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
전격 속성이 ‘더블’ 이상이어야 권장한다고?
나는 게임 시작 시 ‘국왕 시해자’라는 최고난이도의 퀘스트를 선택하고 받은 특전 중 하나로 속성을 전격에 몰빵한 몸.
[전격] [전격] [전격] [전격] [전격]
다섯 개의 속성 모두 전격인 ‘펜투플’이다.
“네?”
“그거 구매하겠다고요. 지금 당장.”
“아, 네네. 그럼 일단 여기에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려 주시고.......”
갑자기 마법서에 피를 떨어트리래서 뭔 요사스러운 짓인가 싶었는데, 필사를 방지하기 위해 걸려있는 마법 때문이란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구매를 완료한 뒤, 여관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
“마침내...!”
싸구려 여관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감격에 몸을 떨었다. 드디어,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마법서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가...!
하지만 감동하고 있기에는 아직 이르다. 마법서를 얻은 거지, 마법을 배운 건 아니니까.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경건한 자세로 앉아 마법서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과연. 기초마법서답게 원론적인 얘기부터 시작하는군. 이해가 쏙쏙 되는구만.”
처음엔 그렇게 순조롭게 읽어나갔으나,
“...씨팔!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술식이니, 마나의 위상배열이니, 회절, 중첩 이따위 말들이 등장하고부터는 좀처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만 간다.
아무래도 전부 이해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무리 같다. 일단 전체적으로 빠르게 한번 훑고, 회독을 반복하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
그렇게 억지로 1회독을 마친 순간,
머리가 잠시 지끈거리더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법 ‘스태틱 쇼크’를 배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지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래... 이래야지. 이제야 좀 덜 억울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