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를 위하여(3)
“너는 여기 입구를 지키고 있어! 혹시 도망 나오는 고블린이 있을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올리버를 파수꾼으로 세워두고 도린 형제와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감추지 않고 진입하니, 도망치던 고블린이 금세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다. 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굴 깊숙이 달려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어두컴컴해졌지만, 다행히 횃불이 듬성듬성 박혀있었다. 이놈들도 어두우면 안보이긴 매한가지일 테니 이렇게 해둔 모양이다.
횃불을 하나 뽑아 들고 전진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진입 속도를 줄였다.
어두운 동굴에는 늘 위협이 도사린다.
만약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가 숨어 있다가 뒤에서 튀어나온다면, 그대로 갇혀서 끔살 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들어가야 했다.
물론 고블린 따위가 퇴로를 막는다면 그건 그냥 땡큐다. 끓는 냄비에 들어가 있던 닭이 스스로 뚜껑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꾸히히힛!
그렇게 진입하던 중, 안쪽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정체를 드러냈다.
“꾸히히힛!”
도망쳤던 고블린이었다.
놈은 건방지게 웃고 있었다.
열 마리가량의 고블린들을 대동하고 나왔는데, 그걸 믿고 의기양양한 것 같았다.
가소롭군. 네가 그래서 미물인 것이다.
“크히히히힛!!!”
순간, 고블린들이 움찔했다.
도린 형제 역시 움찔했다.
방금 건 내 웃음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그만 미친놈처럼 웃어버렸지만, 저 많은 고블린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보니 도저히 웃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
개중에는 무려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것이 제법 값이 나가 보인다.
다른 몬스터는 없다. 상대는 고블린뿐.
나는 더 기다릴 것 없이 검을 들고 쇄도했다.
첫 목표는...
“레이피어 너닷!!!”
저 실팍한 무기가 탐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레이피어처럼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는 내가 입고 있는 체인 메일과 상성이 좋지 않다. 당연히 최우선 제거 대상이다.
돈도 벌고 몸도 지키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채앵!
롱소드와 부딪힌 레이피어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일합도 버티지 못하다니. 나는 내려친 검을 그대로 사선으로 들어 올리며 녀석을 베었다.
─푸쉬쉭!
기분 나쁜 초록색 액체가 얼굴에 튀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분개한 또 다른 고블린이 도끼를 휘둘러온다. 분노해봤자 분노한 고블린일 뿐이다. 담긴 힘도 부족하고, 리치도 짧다.
나는 살짝 몸을 뒤로 빼 그 형편없는 공격을 흘려보내고 놈을 발로 차버렸다. 그리고 넘어진 녀석의 가슴에 검을 쑤셔 넣었다.
─푸욱
“케에엑....”
그렇게 순식간에 두 마리를 처치하니 곧 도린 형제가 합세했고,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 벌어졌다.
고블린을 상대로 특별한 기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실력도, 무장 상태도, 체급도 이쪽이 압도적이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고블린에게는 치명타로 들어갔고, 고블린의 공격은 갑옷을 뚫지 못해 위협적이지 않았다.
─촤악!
내가 네 마리째의 고블린을 베었을 때, 비로소 전투는 마무리됐다.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에 반영됩니다.]
[더이상 능력치를 올릴 수 없습니다!]
약 올리는 듯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보는군.
초창기엔 자주 보였던 메시지다. 열심히 칼질을 하다 보면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와 함께 힘이나 민첩성이 증가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느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게임은 몹시 불친절하게도 세부 능력치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계량화된 수치로 강함을 판단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말이다.
심지어 원하는 능력치를 골라서 포인트를 투자할 수도 없다. ‘힘’을 올리고 싶으면 힘쓰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게다가 ‘더이상 능력치를 올릴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뜬 이후부터는 내 성장도 멈췄다. 아마 각성 전에는 능력치에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후... 어쨌든 상쾌하군.”
신명 나게 썰어댔더니 리자드맨에게 상처 입었던 자존감이 회복되는 느낌이다. 세상 모든 몬스터가 고블린처럼만 약하다면 무척 살기 좋을 것이다.
물론 C급인 나나 도린 형제 정도는 돼야 이렇게 찜쪄먹을 수 있다. 서로 함께 전투해본 경험도 많아서 합도 잘 맞는 편이다. D급 모험가는 다수의 고블린을 상대하기에 벅차다.
수북한 전리품을 보고 눈이 뒤집힌 도린 형제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뭐, 뭐 하고 있나! D급!!!”
“당장 이곳으로 튀어 와라! 신입!!!”
“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단 말이다! 짐꾼!!!”
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동굴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예! 지금 갑니다!
올리버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와, 고블린이 이 정도나 있었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봤자 고블린이라는 건가? 뭐, 올리버의 감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니까.
승자의 달콤한 권한인 루팅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고블린의 사체를 넘나들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추려내 올리버에게 넘겼다.
고블린의 왼쪽 귀도 잊지 않고 챙겼다. 이건 우리가 고블린을 처치했다는 증거로 모험가 길드에 제출해야 한다.
“흠....”
이 고블린들이라고 전부 좋은 장비를 착용한 건 아니었다. 절반 이상은 평범하게 단검 따위를 지니고 있었다. 조금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했다.
얼추 루팅을 끝내고 좀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고블린이 안쪽에서 튀어나왔으니, 혹시 뭐라도 더 있을까 싶어서다.
─저벅저벅.
얼마 안 가 둥그런 공터가 나왔다.
고블린들은 여기서 생활한 것 같았다. 먹다 남은 고기나, 잡다한 도구 등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이딴 것을 먹으면서 살았다니 불쌍한 녀석들이군.
나는 썩은 고기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건질만한 도구들이 있는지 살폈다. 그렇게 대충 눈으로 훑던 중,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 이, 이건.......”
손이 덜덜 떨려온다.
“어? 그거 회중시계 아닙니까?”
무려 30실버에 육박하는 고가의 물건이다.
시곗줄이 끊어져 있고 군데군데 상처도 있었지만, 태엽을 돌려보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아니. 이건 마법이다.”
“예? 그게 무슨?”
이걸 팔면 드디어 마법서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이건 마법이야! 이건... 마법... 이건... 이것은....”
올리버가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회중시계를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품에 넣을 뿐이었다.
이것도 전리품이니 판매하고 받는 돈은 도린 형제와 나눠야겠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좋은 의뢰에 나를 끼워준 도린 형제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실제로 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읏차...!”
올리버가 전리품이 담긴 자루를 둘러멨다. 빵빵한 자루를 짊어진 모습이 마치 피난민의 그것과 같았다.
나는 도린 형제와 나란히 서서 동굴 입구를 향해 걸었다. 이 녀석들 역시 한껏 고조된 상태다.
“크흐흐. 완전 대박이로군.”
“그렇지? 각자 10실버 이상은 나올 것 같은데. 그 돈으로 뭐할 거야?”
옆에 있던 테도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물었다.
“당연히 도박장이다. 그곳에서 열 배로 불릴 것이다!”
“미, 미친. 너 맨날 잃기만 하잖아.”
“무슨! 그건 단지 판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도박에서 돈을 잃는 사람이 하는 전형적인 멘트다.
뭐, 아무렴 어떤가. 내 돈도 아닌데.
괜히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그래그래. 어디 이번엔 한번 잘 해보─”
나는 순간 멈칫했다.
동굴 입구로 향하는 길.
그 중턱에 누군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
“자네들인가?”
범상치 않은 자였다.
전신에 걸쳐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그는, 왼쪽 팔로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오른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검집 가까이에 준비하고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백발이라는 점.
그는 노인에 가까웠다.
“자네들이냐고 물었네.”
뭐가 우린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다.
질문의 의도도 알 수 없고, 저자의 의중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긴장감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건대, 만약 저자가 우리를 적대한다면 도저히 살아서 동굴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모험가나 용병은 아닐 것이다. 정예 정규군 수준의 무장을 하고 있지만, 현역 병사라기엔 너무 늙었다.
“자네들이 그 고블린들을 처치했냐고 묻는 걸세.”
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고블린의 사체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뭐지? 치하하려는 건가? 원망하려는 건가?
일반적이라면 전자의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다. 저 노인이 고블린의 대부를 자처하며, ‘너희가 내 소중한 아이들을 죽였다!’고 광분해 칼을 뽑아 들지도.
이 세상엔 그런 미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나는 저 의중을 알 수 없는 노인이 그런 부류의 정신병자가 아니길 빌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좋은 일을 했군. 모험가인가? 아니면 용병?”
아니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괜히 긴장했네.
‘좋은 일’이라는 말에 나는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아, 저희는 케른헴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입니다.”
“케른헴? 그곳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여기요?”
“이곳은 체스터 백작님의 영지일세.”
그렇게 멀리 왔었나?
하긴. 고블린을 추격하며 북쪽으로 몇 시간은 올라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뭐 도시에 몰래 잠입한 것도 아니고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모험가가 의뢰를 수행하다가 영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건 제법 흔한 일이니.
몬스터를 처리해준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습니까. 영지 경계에 있는 마을에서부터 고블린을 추격하다 보니....”
“호오, 책임감인가? 기어코 근거지까지 쫓아가 말살하다니, 모험가의 귀감이로군. 이쪽 모험가들은 영 시원찮은데 말이야.”
노인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소임을 행할 뿐이지요.”
“자네, 이름이 뭔가?”
통성명의 시간인가.
“엘 입니다.”
“이제 케른헴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었군.
“예. 토벌을 완료했으니 그럴 셈입니다.”
“그렇군. 일이 끝났다면 혹시 일행들과 내 개인적인 의뢰를 받아볼 생각은 없나?”
“의뢰? 어떤 의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장원에 얼마간 머물면서, 이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을 퇴치하는 일이라네.”
은퇴한 기사 펠릭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40년간 체스터 백작가를 섬기다가 몇 년 전 은퇴했다고 한다. 하지만 충성심은 여전해서, 백작령에 몬스터로 인해 고통받는 마을이 있으면 돕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자발적인 선행인 셈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걸 왜 저희한테...? 백작령에도 모험가 길드가 있지 않습니까.”
“난 자네들의 책임감이 마음에 들었다네. 말했다시피 이쪽 녀석들은 영 못 미더워서 말일세. 오크 토벌 때 상당수가 사망하기도 했고. 어떤가? 보수는 케른헴보다 높게 쳐주지.”
오크 토벌 때문에 모험가 수가 부족해졌나?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다. 돈을 더 준다니. 게다가 자신의 장원에 머물게 해준다고 했으니 숙식까지 일거에 해결이다.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길드에 돌아가서 이번 토벌을 끝마쳤다고 보고해야 합니다. 기존 의뢰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은 채 다른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길드에서 저를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같지도 않은 핑계를 댔다.
사실 이 의뢰를 받아도 아무 상관없다. 의뢰 완료 보고야 대충 올리버만 모험가 길드로 돌려보내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내가 거절한 이유는...
마법서를 사러 가야 하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케른헴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싶었다.
“......그런가? 아쉽군.”
완벽히 납득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내가 시덥잖은 이유를 들어가며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거절이 죄는 아니었지만, 나는 약간의 찜찜함을 느껴서 말을 덧붙였다.
“정 일손이 필요하시다면 케른헴 모험가 길드에 정식으로 의뢰를 넣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금액만 맞는다면 언제든지 달려올 모험가들이 꽤 있습니다.”
“참고하겠네. 조언 고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