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4화 (4/200)

마법서를 위하여(2)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백색의 공간.

하늘을 바라보아도, 땅을 바라보아도 무엇 하나 또렷한 것 없이 그저 공허할 뿐이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이 공간의 중앙엔, 기이하게도 작은 목조 건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차츰, 그 주변에 무언가 하나둘씩 생겨난다.

흙, 나무, 인간, 건물, 푸른 하늘, 태양.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세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꿈이군.’

나는 내가 누군가의 꿈에 들어와 있음을 직감했다.

‘도린 형제 중 하나의 꿈인가? 아니면 올리버?’

고블린을 잡기 위해 밤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같은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일행 중 한 명의 꿈일 것이다.

남의 꿈에 들어갈 수 있는 내 특성 때문에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게 어떻게 내 성장을 돕는다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보통은 내가 원하는 대상을 골라서 들어가는 게 가능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같이 자는 사람이 있는 경우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하기도 한다.

‘들어온 김에 구경이나 좀 해야겠네.’

어차피 이미 들어와 버렸으니, 앞으로 일주일간은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일종의 쿨타임인 셈이다.

창조된 건물 쪽으로 다가가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흐흐. 이곳 맥주 맛이 썩 괜찮군.”

“주인장! 맥주 한 잔씩 더!”

“한 잔이라니? 아예 오크통으로 가져오시오!”

도린 형제가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꿈의 주인은... 형제 중 맏이인 테도린인가.’

삼형제 중 테도린만 형상이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꿈의 세계는, 꿈의 주인이 인식한 부분만큼 확장된다. 이 술집 주변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테도린이 술집에만 있기 때문이다. 만약 테도린이 밖으로 돌아다니며 인지한다면, 그만큼 세계는 확장된다.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나머지 형제는 테도린의 눈에 명확히 보이므로 선명하게 구현됐지만, 정작 테도린 자신의 몸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기에 형상이 흐릿한 것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꿈에서 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생성된 세계가 넓다면 이것저것 살펴보기라도 하겠건만.... 꿈의 주인이 술집에만 처박혀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으니 마땅히 구경할만한 장소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나갈까?’

이 꿈에서 나가는 방법은 간단한데, 사실 좀 꺼림칙하다.

죽어야 한다.

사람은 꿈에서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

죽음의 상황에 놓이면, 그 직전에 꿈에서 깬다.

즉, 꿈에서 죽는다는 것은, 꿈에서 깬다는 의미와 같다.

내가 죽는 방법 외에도, 이 꿈에서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하다.

지금 당장 술집으로 들어가서 테도린을 죽이면 된다. 테도린이 꿈의 주인이므로, 그를 죽이면 아예 이 꿈 자체가 깨져버린다.

근데 그러면 앞으로의 사이가 굉장히 이상해질 게 분명하다.

전에 같이 야영하던 어떤 모험가의 꿈속에서 그를 죽이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 꿈을 기억하는 모양인지 나를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경계하고 있다.

‘흐음....’

자살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세요.

─...나세요.

마치 세상 전체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듯한, 아득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나세요.

ㅡ밤입니다. 일어나세요!

새하얗던 세상이 돌연 캄캄해졌다.

그리고 내 눈꺼풀이 열리는 만큼, 현실 세계도 열렸다.

“엘 씨. 이제 곧 밤입니다. 일어─”

“...일어났다. 가서 도린 형제도 깨워.”

올리버가 깨워준 덕에 다행히 자살하지 않고도 빠져나왔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자살하는 건 몹시 소름끼친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바닥에서 자고 있는 도린 형제를 가리켰다. 올리버가 쪼르르 달려가 그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밤입니다. 일어나세요.”

“.......”

“밤입니다. 일어나세요.”

“.......”

“밤입니다. 일어나세요!”

“.......”

올리버는 도린 형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뭐하냐? 흔들어서 깨우면 되잖아.”

답답해진 내가 그리 말하니, 올리버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린 형제분들께서 D급이 C급을 깨울 때는 정중하게 목소리로만 깨우는 게 모험가의 규율이라고 하셨는데. 아닙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비켜봐.”

그딴 규율은 없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발로 툭툭 쳤다. 가장 먼저 테도린이 벌떡 일어났다.

“주인장!!! 도대체 맥주는 언... 음?”

“주인장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준비하고 나오기나 해. 매복하러 가야 하니까.”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멍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테도린을 재촉하며 밖으로 나갔다.

***

풀벌레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적막한 새벽.

“아이구, 다리야.... 이거 오긴 오는 겁니까?”

축사 옆 도랑에 숨어있던 올리버가 물었다. 그는 숨어있는 자세가 불편한 모양인지 계속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촌장이 매일 습격해온다고 했으니 오늘도 나타나길 바라는 수밖에.”

“벌써 새벽인데... 만약 오늘은 습격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이 마을에 하루 더 머물러야 하는 겁니까?”

“뭐, 그렇지.”

올리버는 신입이라 그런지 호기심이 많았다. 매복하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고 있다.

이런 질문을 도린 형제한테 하면 갈굼만 당하겠지만, 나는 친절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야밤의 매복은 심심한 법이니까.

“그럼 손해 아닙니까? 일당이 반으로 줄어드는 건데....”

“걱정 마라. 너는 의뢰의 보수를 나눠 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따로 고용한 거니까. 만약 하루 더 걸린다면 그만큼 일당을 더 줄게.”

올리버는 이번 의뢰의 정식 구성원이 아니다. 20쿠퍼를 일당으로 주기로 하고, 우리가 따로 고용한 짐꾼이다.

왜 이런 번거로운 방식으로 했냐면, 정식 구성원끼리는 의뢰 수행 중에 얻은 전리품도 나눠야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군요....”

“왜?”

“엘 씨는 혹시 부자십니까? 이미 지불한 마차 삯만으로도 본전이실 텐데. 묘하게 여유로워 보이십니다.”

“.......”

올리버는 고블린들이 오크 토벌지에서 장비를 노획해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 보니 이미 적자인 상황에서도 느긋한 나를 보고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이걸 설명해줘야 하나?’

올리버로서도 지금 상황이 딱히 손해는 아니다. 전리품은 나눠 갖지 못하지만, 일당은 꼬박꼬박 챙길 수 있으니까.

“아, 그건─ 쉿!”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어둠속에 무언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구부정한 체형에 조잡한 무장을 한 괴물.

고블린이다.

수는 다섯. 고블린이 들고 있는 무기 하나가 달빛에 반짝인다. 분명, 단검은 아니다.

대박이군.

“넌 여기에 있어!”

짐꾼인 올리버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나는 이미 돈 냄새를 맡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도린 형제와 함께 뛰쳐나갔다.

─타타탓!

─푸욱!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검을 찔러 넣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놈은 방패를 들고 있었음에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복부에 찔러 넣은 검을 옆으로 휘둘러 반쯤 갈라버렸다. 녀석이 내장을 쏟아내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고작 고블린을 상대로 기습을 했다는 사실이 썩 개운하진 않았지만,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법. 나는 가슴을 당당히 펴고 주위를 살폈다.

도린 형제는 이미 각자 승기를 잡고 고블린을 농락하는 중이었다. 그들에게도 고블린 한 마리쯤은 일도 아니다. 반쯤 죽여 놓고 신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한 마리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남은 고블린이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도망가고 있었다.

“아니? 동료들이 당하고 있는데 자기만 도망을 쳐...?”

몹시 현명한 녀석이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현명한 고블린은 죽어야만 했다. 내가 놔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놈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추격해오는 나를 느꼈는지 녀석이 계속 뒤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거리는 금세 좁혀졌고, 나는 녀석의 목을 노리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앙!

녀석이 가까스로 방패를 들어서 막았으나, 옆으로 날아가며 데굴데굴 굴렀다. 이것이 체급 차이의 힘이다.

검을 막을 때의 충격이 어느 정도 있었던 모양인지, 녀석은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을 기어서 도망가려고 했다.

생존본능이 강한 녀석이군.

마무리를 지으려 검을 높게 치켜든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폼멜 부분으로 녀석의 대가리를 쳐서 기절시켰다.

─빠악!

추욱 늘어진 녀석을 어깨에 둘러메고 매복했던 장소로 돌아갔다.

“...그게 무슨 짓이지, 억울한 마법사?”

“그 고블린은 왜 데려온 것인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군!”

비교적 멀쩡한 고블린을 보고 도린 형제가 당황했다. 나는 기절한 고블린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고블린이 다섯 마리뿐이잖아.”

“?”

“?”

“?”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이군.

내가 추가로 설명하려 할 때, 어느새 다가온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아, 열 마리! 촌장님이 분명 열 마리가 습격해온 적도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이 다섯 놈이 전부는 아닐 거야. 아마 이 주변이나, 아니면 어딘가에 있는 은신처에 몇 놈 더 있겠지. 이놈이 깨어나면 조용히 따라가 보자고.”

도린 형제가 괜찮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일단 기절한 고블린이 깨어나기 전에 전리품들을 수거해왔다. 아밍소드, 단검, 손도끼, 나무 방패, 투구 등등. 도시로 가면 팔 수 있는 것들이 제법 나왔다.

고블린이 입고 있던 너덜너덜한 옷가지나 장화 같은 건 제외했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생전에 입고 있었던 옷까지 벗기는 것은 너무한 일이라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그딴 건 돈이 안 돼서다.

“크흐흐. 이것만 해도 족히 5실버는 되겠군.”

“와, 그렇습니까? 이래서 다들 여유로우신 거였군요. 역시 노련한 모험가는 다르네요.”

한데 모은 전리품을 보며 도린 형제들이 흡족해했고, 올리버가 뭔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뭘 끄덕거리고만 있지 D급?”

“빨리 이것들을 챙겨라!”

“짐꾼의 본분을 잊은 것인가?”

도린 형제의 호통에 올리버가 허겁지겁 장비를 주워 담았다.

그 후 우리는 다시 도랑에 들어가서 숨었다.

기절해있는 고블린이 깨어났을 때, 우리가 미행하는 걸 들킨다면 은신처로 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안내하라고 협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이 안 통하니까.

조용히 숨어서 따라 가야 한다.

“.......”

숨어서 십 분쯤 기다렸을까.

고블린이 정신을 차렸다.

놈은 자신이 왜 살아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잠시 벙쪄있다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ㅡ사박사박.

우리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따라갔다.

낮에 가축의 혈흔을 추적했던 경로와 동일했다. 이미 한번 와봤던 길이기 때문에 따라가기 수월했다.

─사박사박.

고요함 속에 들리는 소리라곤 풀 밟는 소리뿐.

─사박사박.

어느덧 아침의 여명이 밝아온다.

날이 밝아지는 만큼 고블린의 시야 범위도 넓어졌기 때문에 조금 더 거리를 벌려야 했다. 벌써 한참을 쫓아가고 있음에도 녀석은 멈출 줄을 몰랐다.

‘...설마 이 새끼. 은신처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멀리 도망가는 건가?’

불현듯 그런 불안감이 밀려왔다.

동료를 쉽사리 버리고 혼자 도망가던 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쯤에서 죽여버릴까? 하는 충동이 느껴졌다. 평범하게 걷는 것이 아니라, 기척을 죽이며 따라가다 보니 체력 소모도 심했다.

‘아니지. 아니야.’

나는 고개를 털 듯 흔들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마법서의 가격인 3골드까지 대략 10실버가 부족한 상황. 거의 보름 가까이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지만, 이번에 은신처를 발견하면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여기까지 따라온 거, 조금 더 가보자.’

그렇게 인내심을 갖고 계속 추적한 끝에,

마침내 결실이 드러났다.

“은신처다!”

고블린이 이름 모를 야산의 중턱에 있는 동굴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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