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214화 (214/216)

외전 12화. 마녀와 망령 (1)

슥-

손가락이 서신에 적힌 글자를 어루만졌다.

누가 썼는지 모를 정갈한 글씨체가 닳고 닳도록.

“그래. 그들도 알아야 했던 진실이지.”

알리사 마르크스가 서신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마침내 진실을 깨달아 버린 선지자들의 충격을 가늠해 보는 듯, 그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많이도 절망스러울 테지.

세상이 무너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겠지.

다만 신전을 지키는 템플나이츠라면 그들의 충격과 절망을 잘 다독여 줄 수 있을 터다.

그 우직한 기사들은 누구보다 한 발 먼저 절망을 맛보았던 이들이니.

“너도 그리 생각해서 가만히 지켜본 것 아니더냐.”

서신에는 선지자들의 이야기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3년 전 그날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리하르트, 그가 선지자들의 맹세를 지켜보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였다.

알리사는 닳아 흐려진 이름을 몇 번이고 눈으로 좇았다.

입술로는 슬며시 반달을 그렸다.

아아, 나의 제자야.

나의 신이시여.

“얼른 오거라. 보고 싶구나.”

알리사는 맹세의 날에 보았던 그 모습을 단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영령은 낡고 헤진 로브를 뒤집어썼다.

양팔은 억센 사슬에 속박되어 있었고, 찬란했던 영혼은 빛을 잃어 고독한 한기를 풍겼다.

스스로 모든 걸 버리고 망령이 되어 버린,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제자를 향한 마음으로서는 그가 안타까웠고.

신을 향한 신앙심으로서는 그에게 죄스러웠다.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안도감이 사무쳤다.

지옥에 갔다 하여 죽은 것이 아니구나.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구나.

그 날 알리사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진정 리하르트가 망령이 되어서라도 존재한다면, 또 언제고 이 세상에 돌아올 수 있다면, 그녀는 그것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영혼을 볼 수 있는 그녀에겐 살아 있는 인간과 망령의 차이가 비교적 희박했으니까.

“살면서 그만큼 이 눈에 감사했던 적이 없었단다.”

따지고 보면 그조차도 리하르트의 덕이었다.

한차례 망가졌던 눈을 치료해 준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러니까, 이곳에 도착하면 이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알리사가 턱을 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리하르트가 돌아온 것이라면, 그는 분명 바텐베르크부터 찾아갔을 터였다.

그게 못내 섭섭하기는 하다만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들 하던가.

사춘기 소녀의 그것처럼 설레이는 이 감정을, 알리사는 느긋하게 만끽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진즉에 끝낸 상태였으니.

◈          ◈          ◈

사슬을 휘감은 망령은 대륙을 가로질러 걸었다.

많은 마을과 도시, 여러 국경선을 넘나들며 평화를 구경했다.

곳곳에 펄럭이는 호르교의 휘장.

아이들의 웃음은 마냥 해맑고, 어른들은 평범한 일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 평화에 국적과 신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좋구나.”

낡은 로브 아래 드러난 입매가 둥글게 휘었다.

이런 세상을 보기 위해 그 고생을 했던 것이라고, 망령은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듯 천사에게 웃어 보였다.

[……그것으로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하리엔이 망설임 끝에 물었다.

[이 평화에, 아버지께선 홀로 벗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괜찮냐고.

혹시 후회되지는 않느냐고.

그건 군단과 천사들이 속으로 수백 번은 더 곱씹었을 의문이었다.

신, 호르가 피조물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듯, 피조물들 또한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존재가 바로 리하르트였다.

때문에 군단과 천사들은 그의 고달픔을 짐작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동정심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나들이라도 나올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데.”

다만 망령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는 당신만 평화에서 제외된 것이라던 천사의 말을 부정했다.

“이것 봐. 지금 난 평화를 실컷 만끽하고 있잖아.”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 밝게 반짝인다.

마찬가지로 고달픔이 있기에 행복이 더욱 크게 와닿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옥에서 이따금 나들이를 나오는 자신이 누구보다 생생하게 평화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냐며, 그는 몹시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바로 성령의 격이군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되, 그 그릇이 남다르다.

감히 자신들이 동정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음을 하리엔은 새삼 실감했다.

“오!”

그렇게 둘이 나들이를 나선 지 며칠이 지났을까.

저 멀리 라플라스의 국경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리엔이 함께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국경선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춘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꼭 꺼림칙한 이를 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망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국경선 너머를 바라보는 천사의 시선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사실은…… 라플라스의 국왕, 그 마녀와 좋지 못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 나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말하기가 무섭게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나 질색을 하던지, 고운 뺨에 식은땀이 조금씩 배어 나올 정도였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쩐지 라플라스에 다 와 갈수록 그녀의 걸음이 늦춰진다 싶더니만.

국경선을 앞둔 그녀는 심지어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          ◈

“만나 보면 안다니.”

망령은 그녀가 도망치듯 떠난 자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하리엔이 그리도 질색을 하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뭐, 그 말대로 가보면 알겠지.”

의문은 짧고 결단은 빨랐다.

국경선을 넘어 여러 도시와 마을을 건넜다.

그렇게 마침내 라플라스의 왕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허…….”

망령은 왕도의 정경에 넋을 놓고 말았다.

과연 마법과 마도의 중심지라 해야 할지.

그곳에선 여타의 다른 국가보다 발전된 시설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령 하늘을 날아다니는 소형 부유선이라든가, 왕도의 길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자그마한 골렘이라든가.

그 수많은 마도 공학의 결정체들을 본 그가 꼭 촌놈처럼 감탄사를 터트렸다.

라플라스가 유달리 발달했으리라곤 어느 정도 예상했었으나, 이건 확실히 상상 이상이었다.

천재 하나가 나라를 이끈다더니.

분명 이 비정상적인 발달 속도는 세기의 천재 마법사, 알리사가 주도한 것이리라.

“이건 조금 위험한데.”

다만 그의 감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로 바뀌었다.

그가 보기에 라플라스는 저 홀로 툭 튀어나온 돌 같았다.

혼자 튀어나온 돌은 정을 맞거나, 다른 이를 찌르거나 둘 중 하나이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평화의 시대에는 별문제가 없겠지.

그러나 이 시대 이후, 계속해서 독보적인 발전을 이룬 라플라스로 인해 균형이 망가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스승님께서도 대책 없이 개발만 하신 것은 아니겠지.”

일단 그녀와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손끝이 움찔거렸다.

“흐음.”

일과를 끝내고 티타임을 즐기던 알리사가 비음을 흘렸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건만, 어째선지 그녀는 한기를 느꼈다.

그건 빛을 잃은 자의 한기가 분명했다.

“드디어 이 스승을 찾아온 것이냐.”

알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기대를 잔뜩 품은 그 눈엔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곧,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방 한켠에서 인영을 포착했다.

“리하르트.”

아아, 보인다.

그가 지금 이곳에 있다.

알리사는 망령을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숙녀의 방에 몰래 들어오다니. 매너가 꽝이로다.”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에 망령이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양새가 꼭 음소거를 해 놓은 것 같았다.

“……역시 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

라플라스의 눈은 영혼을 보게 할 뿐,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귀가 아니었다.

다만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 뜻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노크라도 할라치면 지옥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걸 어찌합니까?”

“변명도 좋군. 후후, 그래서 잘 지냈느냐.”

“지옥에서 저만큼 잘 지내는 녀석은 없습니다.”

일련의 대화가 오갔다.

잠시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나 나눌 법한 평온한 인사였다.

“신전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지도 꽤 시일이 흘렀는데, 내 예상대로 바텐베르크부터 들렀던 모양이구나.”

“뭐…… 아무래도 가족들이다 보니.”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면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고독한 영혼은 자신을 볼 수 있는 이를 만나 기뻤다.

마녀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그리운 이를 만나 기뻤다.

이전과 같은 일방통행의 만남이 아니라서, 둘의 재회는 더욱 가치가 있었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직은 지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망령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개입’을 소모한다.

당연하게도 그의 목소리 또한 주시자의 규칙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가 부탁을 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후후…….”

알리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스승님?”

“이 스승은 말이다. 천재란다.”

“그건 왕국에 오자마자 실감했습니다.”

“아니, 너는 아직 나의 천재성을 모르고 있단다.”

그녀는 턱을 괴곤 푸른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마치 서프라이즈를 위해 뜸을 들이는 것처럼, 그녀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짙어졌다.

“맹세의 날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네가 모습을 드러내거나, 무언가를 건드릴 때, 그 행동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물론 대가는 지옥으로의 복귀일 테지.”

“맞습니다.”

“참으로 애석하지 않느냐. 그리운 이들을 앞에 두고도 알아 봐주는 이가 없다니…… 그건 너에게도, 군단에게도 슬픈 일이란다.”

리하르트 또한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스스로가 정한 규칙이었으니, 싫어도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스승님께서 이렇게 저를 봐주고 계시니 괜찮습니다.”

“그래. 나라도 너를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더구나.”

알리사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비로소 답을 찾아냈다.”

이내 그녀가 테이블을 짚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리하르트를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마침 천사들이 너와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천사 중 한 명에게 어렵사리 협조를 구해 연구를 해 보았지.”

리하르트의 코앞에 멈춰 선 그녀에게서 어느 샌가 묘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그건 리하르트에게 있어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것도, 생생히 살아 있는 육신을 벗어던진 자들의 기운.

리하르트가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알리사가 앉아 있던 곳엔, 또 다른 그녀가 다소곳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설마…….”

멍하니 입을 벌린 그에게 그녀가 손을 뻗었다.

본래라면 결코 닿을 수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너무도 쉽게 리하르트의 볼을 감쌌다.

“네가 영체 상태라면, 나 또한 영체로 널 마주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야 오롯이 널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육체 이탈’이라는 전대미문의 마법을 만들어 버린 마녀가, 천진하게 웃었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귓가엔 하리엔의 음성이 아른거렸다.

- 그녀의 능력은 작정하고 숨은 저를 찾아낼 정도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천사가 숨어야 할 일이 뭐 있을까, 라고 속으로 반문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리엔…….

마녀에게 시달렸던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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