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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213화 (213/216)

외전 11화. 거, 늦게도 오셨습니다 (2)

“흐음.”

모리츠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가로운 산책로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활짝 핀 꽃들도, 이따금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왜 이리도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인지.

그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연신 눈을 굴렸다.

“…….”

신전의 템플나이츠로부터 서신을 받은 게 바로 어제였다.

그 서신에 담긴 희소식을 듣고 밤잠을 설친 것 또한 어제의 일이었다.

홀연히 나타나 선지자들의 맹세를 지켜보고 사라진 리하르트.

맹세의 날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 그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을까.

대체 언제 이 세상에 돌아왔고, 이번엔 또 언제 떠날 생각일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모리츠로서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야, 옆에 있으면 무슨 신호라도 보내 .”

왜 그, 쇠사슬 소리라든지.

그리 덧붙인 모리츠가 귀를 기울였다.

혹여나 자신이 소리를 놓치진 않을까 마나까지 동원했다.

다만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새의 지저귐만이 전부였다.

“이 매정한 놈이…… 설마 나를 두고 딴 길로 샌 건 아니겠지.”

에이, 말도 안 돼.

그날 이후 3년이다. 근 3년간 리하르트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아예 행방이 묘연했다면 모를까, 직접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리하르트가 바텐베르크로 와야 하지 않겠는가.

“날 그리도 따르던 너라면 지금쯤 내 옆에 철거머리마냥 붙어 있겠지?”

믿음엔 정답이 없다.

그래서 모리츠는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기로 했다.

“좋아. 걷자.”

산책로를 걸었다.

두 살 어린 형제와의 산책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네가 지내던 여기, 소검궁은 로엘이 쓰고 있다. 괜찮지? 네 후배니까.”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로엘, 그 녀석 꽤 싹수가 있어. 코흘리개 시절의 우리보다 나을걸.”

특히 넌 예전엔 완전 망나니였잖아.

그리 말한 모리츠가 혼자 낄낄 웃었다.

◈          ◈          ◈

“거, 늦게도 돌아오셨습니다. 하루면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아론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꼭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다른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자그마치 3년입니다. 그 3년간 줄곧 지옥에 계셨던 겁니까? 어디 상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리하르트가 보이지도 않으면서, 허공을 응시하는 아론의 시선에 우려가 담겼다.

누가 뭐라 해도 제 옆에 리하르트가 있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는 듯한 태도였다.

이내 그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소검궁이나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글로리아가 많이도 폈더군요.”

3년이나 지옥에 있었다면 적잖게 힘들었을 거라고.

이왕 세상 구경을 나온 김에 예쁘고 좋은 것만 보고 가라고.

아론은 지체 없이 방을 나서 소검궁의 산책로를 향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한 두 사내가 외길에서 만나고 말았다.

“지옥은…… 좀 어떻습니까? 이런 시대에도 죄인이 많습니…….”

“흐흐, 리하르트. 그거 아냐? 나도 이젠 그랜드의 경지를 코앞에…….”

한여름치고는 유별나게 시원한 오후.

각각 혼잣말을 주절거리던 모리츠와 아론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둘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말려 올라갔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믿음을 양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하르트, 아론도 오랜만에 보지? 어서 인사해.”

뭐 하나 보이지도 않는 허공을 향해 모리츠가 말을 건넸다.

꼭 여태 리하르트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고 과시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뻔뻔한 작태에 아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 성자님. 놀랍게도 저분이 모리츠 공자님이십니다. 근 몇 년 새 세월의 풍파를 맞으셨지요.”

아론이 제 옆의 허공을 바라보며 모리츠를 가리켰다.

빠직-

모리츠의 이마에 혈관이 솟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젊을 때 고생해서 그렇다, 왜!”

“이런…… 성자님께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는군요.”

“아니 글쎄, 리하르트는 줄곧 내 옆에 있었대도?”

만개한 글로리아가 잔뜩 수놓인 길에서 유치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나이는 벌써 삼십 줄이 훌쩍 넘은 사내들인데, 하는 짓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

◈          ◈          ◈

“이것들은 갑자기 왜 싸우고 있어?”

나는 볼을 긁적였다.

소검궁의 정원에서 왁왁 말다툼을 하는 두 사내를 보고 있노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얘네는 지금도 사이가 좋네.

격 없이 지내는 모습은 보기 좋은데, 한편으론 어딘가 환상이 깨져 버린 기분이었다.

“쯧. 너희들은 어째 더 철이 없어진 것 같냐.”

간밤엔 로엘이라는 후배가 귀여워 곁을 지켰다.

그 젖살 통통한 얼굴을 꼬집어 보고 싶은 걸 참느라 진땀을 빼야 했을 정도다.

그렇게 밤이 지나 해가 뜨고 난 후엔 기드를 먼저 찾았다.

가뜩이나 늙었던 그가 오늘날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되던 참이었으니.

다행히 기드가 정정하단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번듯하게 가주가 된 지크를 찾았다.

또 그다음은 발락과 루드비히를 멀찌감치 지켜보았다.

그렇게 바텐베르크를 한 바퀴 돌며 구경하다가, 마침 둘을 발견하고선 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미안하지만 너희 둘 다 땡이거든.”

누가 누구 옆에 있네 마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싸움을 하는 두 사내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한마디 해 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또다시 지옥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아론과 모리츠의 신경전을 구경했다.

“흥! 그러고 보면 가장 먼저 성기사가 된 것도 나였잖아? 자기가 제일 먼저 되겠다고 설레발치던 누구랑은 다르게!”

“아니, 그건 또 언제 적 이야깁니까!”

“형제로서도, 신으로서도 내 옆에 있을 확률이 더 높다는 얘기지.”

으윽, 신음을 내뱉은 아론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내색은 안 했어도 첫 번째 성기사 자리를 빼앗긴 게 아직까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에 분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 이대로 아론의 패배인가요.”

아, 팝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그리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하하! 이거 흥미로운 주제로군요!”

하필이면 이 설전에 나잇값 못하는 양반이 하나 더 추가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제1기사단의 단장, 레오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자님! 제가 이럴 줄 알고 성자님을 이리로 모셨지요!”

그가 아무도 있지도 않은 제 옆자리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하…… 단장이라는 양반이.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저 인간은 그냥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게 재밌어서 연기하는 것일 테지.

하여간에 성미 한번 고약했다.

“이익! 레오 경이 여기에 왜 끼십니까?”

“어이쿠, 그 말씀은 좀 섭섭합니다. 성자님께서 저를 호르교에 영입하려고 얼마나 애쓰셨는데요? 저 레오, 이래봬도 적잖게 신임을 받았던 몸입니다.”

“허……!”

모리츠와 아론이 동시에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결국 몸을 돌렸다.

장담하건대, 레오까지 끼어든 마당에 쉽사리 사그라들 논쟁이 아니었다.

“흠. 나는 평등하게 너희를 신임했는데 말이야.”

하기야 뭔들 어떠하리.

저것 또한 저들 나름대로 평화를 즐기는 방식일 터였다.

궁상을 떠는 것보단 저렇게나마 활기차게 사는 편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너희들 잘 지내는 거 봤으니 됐다.”

그럼 안녕.

다음에 또 올게.

◈          ◈          ◈

바텐베르크를 벗어나 세상을 산책할 때였다.

하늘에서 천사가 뚝 떨어졌다.

[아버지.]

옥구슬 흘러가듯 감미로운 음성에 반가움이 한가득이었다.

“하리엔. 오랜만이군.”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땐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지.”

하리엔이 아니었다면 맹세의 날에 군단과 함께하지 못했을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시간만 허비하다 나중에 후회했겠지.

워낙에 경황이 없어 그녀에게 감사 인사도 전하지 못했던 사실을 뒤늦게 상기했다.

“고마웠다.”

진심을 담아 그리 말하니, 그녀의 날개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이 그녀가 수줍어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음성으로 묻는 하리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옥이 잘 지냈다는 말과 어울리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곳은 늘 그렇듯 뜨겁고, 춥고, 죄인들의 비명으로 번잡스러운 동네였다.

“그래도 지옥에선 내가 제일 잘 지내.”

나는 그녀와 함께 길을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구경했다.

오래간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말동무가 생겨서인지, 라플라스로 향하는 길목이 유난히 짧게만 느껴졌다.

“흠, 역시 대화란 좋은 거야.”

물론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말로 하지 않으면 그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운 이들을 앞에 두고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심정이 어찌나 답답하던지.

내가 한숨을 푸욱, 내쉴 때였다.

[원하신다면, 앞으로 제가 아버지 곁에서 동료분들께 뜻을 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규칙 위반이야. 너나, 나나.”

지옥에서 올라온 망령의 말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천사라니.

그것은 천사라기보단 악마에 가깝지 않은가.

“아쉽지만 어쩌겠어. 내가 정한 규칙인걸.”

순전한 내 욕심만으로 규칙을 어길 순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번에 만나실 분은 말이 통해서 다행이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걸음을 멈추곤 하리엔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녀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라플라스의 국왕을 뵈러 가시는 길이 아니었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있었다.

악마는 아니지만, ‘마녀’라고도 불리는 여인이.

알리사 마르크스.

그녀의 능력은 작정하고 모습을 숨긴 자신까지 찾아낸다고, 하리엔이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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