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거, 늦게도 오셨습니다 (1)
“스승님. 사형께선 어떤 분이셨습니까?”
늙은 스승의 손에 이끌려 바텐베르크에 당도했을 적에, 로엘은 그리 물었다.
“……리하르트 말이더냐?”
“예!”
“강한 녀석이었단다. 뭐,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사형에 관한 것을 물을 때면 발락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그것이 지난 제자를 향한 그리움이 섞인 표정이란 것을 알기엔 로엘은 나이 일곱에 불과한 꼬마였다.
다만 리하르트라는 영웅의 서사시는 꼬마의 동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저도 그리될 수 있을까요?”
로엘이 스승의 손을 꼬옥 붙잡고 말했다.
“스승님과 사형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사내가 되고 싶어요.”
해맑은 눈은 별처럼 밝게 빛났다.
그것이 퍽 기꺼운 것인지 발락이 너털 웃음을 흘렸다.
“녀석아. 네가 꼭 그놈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단다.”
아직은 시험의 각인을 새긴 것에 불과한 핏덩이.
하지만 발락은 이번에도 자신의 감을 믿었다.
“너는 너대로, 꾸준히 정진하면 능히 별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투박한 손길로 느지막히 들인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차압!”
소년이 검을 흩뿌렸다.
기세 좋게 뻗어 나간 검 끝엔 선명한 마나가 서려 있었다.
“하아…….”
한참 검을 휘두르던 소년이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구슬땀에 젖은 소년, 로엘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구나.”
새까만 색의 육각형 문양.
몇 해 전 발락으로부터 부여받은 시험의 각인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은 채였다.
사형께선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성흔을 개방하셨다던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입술을 짓씹은 로엘이 부들거리는 몸으로 일어서려 할 때였다.
“조금 더 쉬는 게 좋을 거다.”
언제 온 것인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기사가 연무장 한편에 서 있었다.
“아, 아론 경!”
세상을 구한 영웅, 리하르트의 오른팔이자 수천 용사들의 주축 중 하나.
아론 마이어를 본 로엘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검놀림에 조바심이 가득하더구나.”
아론이 휘적휘적 걸어와 로엘의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열 살에 그만큼 선명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녀석은 그리 흔하지 않단다.”
“아…….”
로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론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이곳까지 발걸음해 주신 것이겠지.
죄송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엘, 너는 무엇이 그리도 조급하더냐?”
“…….”
몇 번인가 입술이 달싹이다 재차 다물어졌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에, 로엘은 제 손등만 빤히 노려보았다.
이 검은색 육각형 문양은 그동안 소년의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명성 높은 영웅이 걸었던 검성의 길.
자신이 그 길 초입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듯 뿌듯했다.
다만 그것도 지금에 이르러선 조금씩 달라졌다.
손등에 새겨진 각인은 그대로인데, 정작 각인을 향한 로엘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게 더욱 알맞으리라.
“저는…… 자질이 없는 걸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 각인이 제게 그리 말하는 것 같아요. 너는 이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그건 꿈 많던 소년이 처음으로 부려 본 어리광이었다.
검성의 문턱에 가로막힌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사무쳐서, 로엘은 더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네가 그리 믿는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런 로엘의 머리 위에서 퍽 냉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자는 신념이 없는 것이다. 신념이 없는 자의 영혼은 빛을 잃기 마련이지.”
“…….”
“너는 별이 아무런 신념 없이 피울 수 있는 하찮은 것인 줄 알았느냐.”
로엘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씩, 그 여린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죄, 죄송…….”
툭.
아론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울먹이는 로엘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분명 따스했다.
“너와 닮은 사람을 알고 있단다. 아니, 그는 너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였지.”
소검궁의 개인 연무장을 둘러보는 아론의 눈이 아련한 빛을 품었다.
이곳에서 그와 함께 수련을 하던 시절이 속속 떠올랐다.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터다.”
“그분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래.”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마나 불감증에 절망하여 일찍이 검을 놓아 버렸던 사내.
다만 세상 모두가 그를 망나니라 손가락질할 때, 언제부터인가 그는 스스로를 믿고 나아갔다.
그렇게, 세상을 구한 영웅의 여정은 그가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가졌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론이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가 죽어 움츠러든 모습이 마치 비 맞은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열 살 되었을 적의 리하르트도 딱 이런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서서히, 야금야금 깎여 나가는 꿈을 애써 움켜쥐고 있는.
다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시절 리하르트의 절망에 비하면 로엘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 사형이 너를 본다면 역정을 낼 게 뻔하구나. 아직 새파랗게 놈이 배부른 소리나 한다고 말이야.”
마나를 다루지 못해 검성은커녕 기사의 자격조차 요원했던 그의 절망을, 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너는 아직 조급해할 때가 아니다. 네 앞에 놓인 것은 벽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네가 존경하는 그분도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걷기 시작하셨음이니.”
물론 아론도 로엘의 고충을 모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형인 리하르트는 각인을 새긴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성흔을 개방했다.
스승인 발락 또한 로엘보다 어린 나이에 별을 엮어 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은 세상에 혼란이 가득했을 때였다.
곳곳에 크고 작은 전쟁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삶과 죽음이 밀접한 세상이었다.
시험의 각인은 역경 앞에 물러서지 않는 자에게만 힘을 허락했으니, 온갖 시련이 넘쳐나던 그 시절이야말로 별이 꽃피기 좋은 시기였으리라.
그때와 지금의 평화로운 시대를 비교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었다.
“로엘. 너는 재능이 있다. 근사한 꿈이 있고, 성정 또한 검처럼 올곧다.”
그러니 이 세상에 네가 이겨 내야 할 역경은 오직 너 자신밖에 없단다.
씩 웃은 아론이 힘주어 로엘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아앗…….”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나겠다.”
“조, 조심히 가십시오! 좋은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벌떡 일어선 로엘이 허리를 깊게 접으며 외쳤다.
그를 뒤로 한 아론이 막 소검궁의 개인 연무장을 벗어났을 참이었다.
“고맙다, 애송이.”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선 발락이 아론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 녀석이 다른 건 훌륭한데 유독 자신감이 부족하단 말이지. 하필 내가 채워 줄 수 없는 부분인 것을, 쯧.”
“뭐. 스승이며, 사형이며, 주변 환경이 유난히도 특출하지 않습니까. 어린 나이에 기가 죽을 만도 하지요. 하물며 그전까진 변방의 고아원에서 지냈으니…….”
발락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연신 연무장 너머를 훔쳐보았다.
아마 로엘이 수련하는 내내 이곳에서 이러고 있었을 터였다.
“발락 경답지 않으십니다.”
아론이 그런 발락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커흠, 워낙에 늦게 얻은 제자가 아니더냐. 내가 늙어 죽기 전에 가르침을 내려야 한다는 마음에 저 핏덩이를 부추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발락 경께서도 여유를 가지시고…….”
그가 발락에게 몇 마디 조언의 말을 건넬 때였다.
“아론! 발락 경!”
저 멀리서 모리츠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이를 먹어 품위를 중요시하던 모리츠치고는 꽤 다급한 모습이었다.
“모리츠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시, 신전에서 서신이 왔다!”
신전에는 템플나이츠의 제1기사단이 상주하고 있었다.
바텐베르크가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리츠가 불쑥 내민 서신의 내용을 읽었을 때, 아론과 발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성녀와 선지자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더라.
그들이 맹세의 석판에 이름을 새겼다더라.
그리고.
“그분께서, 다시 돌아오셨다고……?”
맹세의 날 이후 소식 없던 리하르트가 선지자들의 맹세를 지켜보고 사라졌다며, 서신은 그들에게 희소식을 전해 주었다.
◈ ◈ ◈
“흐어어…….”
로엘이 수련을 끝낸 것은 해가 저물고 한참이 지난 이후였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기다시피 침소로 향했다.
“끙.”
몸은 녹초가 되어서 당장이라도 곯아떨어질 것만 같은데, 어째서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휘영청 떠오른 달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은 별무리가 그토록 찬란할 수가 없었다.
저 중에 나의 별이 하나라도 있을까.
나는 한 자루의 별이라도 스승님께 보여 드릴 수 있을까.
멍하니 밤하늘을 내다보던 소년의 눈이 이내 스르륵 감겼다.
잠에 들기 직전까지 별을 소망한 것은, 스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소년의 열망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망과 열망이 꿈에서나마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아…….”
로엘이 문득 눈을 떴을땐, 그 주변에 수많은 별들이 새초롬하게도 반짝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하면서도 멀리 있는, 저 밤하늘의 별무리가 어느샌가 로엘을 둘러싸고 있었다.
꿈이구나.
그것을 직감한 로엘이 넋을 놓고 별무리를 구경할 때였다.
“언젠가는 이 별들이 전부 너의 것이 될 거란다.”
그의 곁에 웬 괴한이 서 있었다.
“헉! 누, 누구세요?”
낡고 해진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은 양팔이 사슬에 칭칭 묶인 채였다.
척 보기에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행색일진대, 그를 앞에 둔 로엘은 어째선지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음, 맑고 깨끗한 영혼이구나. 과연 검성의 차기 후계자다워.”
후드의 음영 아래 드러난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로 짐작해 보건대 괴한은 분명히 기꺼워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로엘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지켜보고만 있기엔 딱해서 말이야. 자그마한 자신감이라도 심어 주고 싶었어.”
괴한이 다가왔다.
촤르륵, 양팔의 사슬이 기다랗게 늘어져 소리를 내었다.
이내 로엘의 코앞으로 다가온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왔다.
“어차피 꿈이니까…… 너한테도, 나한테도 부담이 덜하겠지. 안 그래?”
“예, 예?”
알 수 없는 흰소리를 늘어놓은 그가 곧 로엘의 손을 잡았다.
그 직후부터 손등에서 기이한 감각이 요동쳤다.
시험의 각인이 성흔으로, 하나의 성흔이 둘로, 둘이 곧 셋으로…….
기이한 감각이 점차 거세짐에 따라, 주변에 흩어져 따로 반짝이던 별무리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로엘이 그리도 바라마지 않던 검성의 별자루였다.
“아…….”
소년을 둘러싼 열두 자루의 별이 고고히 빛났다.
한낱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고,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놀라운,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소년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리도 수많은 역경을…….”
별 자루 하나하나에 담긴 거대한 감정이 사무치듯 밀려 들어왔다.
그 모든 것들은 선대 검성들이 일찍이 마주했던 삶의 역경이요, 그 앞을 나아가도록 스스로 촉구하였던 불굴의 신념이었다.
“어때, 너도 이렇게 할 수 있겠어?”
“…….”
검성의 길이란 게 이러한 것이구나.
막연하기만 하던 가슴속 무언가가 마침내 초점이 잡힌 듯, 선명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로엘은 웅혼히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언젠간 반드시……!”
맑기만 하던 영혼에 신념이 섞이니, 비로소 눈부시게 빛난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