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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211화 (211/216)

외전 9화. 미녀와 야수 (3)

성녀와 선지자들이 템플나이츠의 인도를 따라 이동했다.

신전을 벗어나고, 왕국을 벗어나고.

리오 성을 경유해 대륙의 중심으로 향했다.

촤르륵-

그리고 난 조심스레 그 뒤를 좇았다.

“…….”

많은 생각이 어지럽게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주시자의 삶이란 유령과도 같았음이니, 괴로워하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긴 시간 속을 졸였던 성녀에게도, 진실을 알고 크게 흔들리던 선지자들에게도.

나는 그저 한 걸음 물러나 지켜볼 뿐이었다.

“췩, 말했다시피 그는 죽은 것이 아니오. 분명히 살아 있소.”

이동 중에 휴거는 몇 번이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게 곧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배려하고자 진실을 숨긴 자들과, 진실을 기다린 자들.

그 간극에 두터운 시간이 쌓여서, 말뿐인 위로는 그리 와닿지 못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휴거와 템플나이츠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맹세의 석판을 보여 달란 말이더냐.”

대륙의 중심에 솟아난 세계수, 아델이 선지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이었다.

“좋다.”

아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 세계수의 뿌리가 감싸고 있던 맹세의 석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빼곡하게 적힌 이름을 본 선지자 하나가 탄성을 흘렸다.

빛으로 음각된 그 이름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서 이 시대의 평화를 지킬 것이다.”

“우리는 훗날 죽어서 천국에 간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이 세상을 수호할 것이다.”

멍하니 석판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템플나이츠가 맹세의 구절을 읊었다.

천천히, 선지자들이 시선을 올려 석판의 맨 윗줄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았다.

빛 빼곡한 석판에 어둠 한 줄기가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메리가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읽었다.

그녀가 들어 올린 손가락이 차마 석판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했다.

이내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 휴거를 향했다.

“그가 직접 새긴 것이라오.”

휴거가 울고 있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답했다.

“그대들도 이 석판에 이름을 새기지 않겠소?”

분명 위대한 인간 전사도 기뻐할 것이라고, 그 붉은 오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체 누가 그대들을 막을 수 있겠소?”

“하지만, 그분께선 당신들에게 함구를 명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망설이며 말했다.

혹시 자신들로 인해 템플나이츠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만 것은 아닐까.

신이 진노하시지는 않을까.

마땅히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 자들이 그리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못내 씁쓸했다.

“괜찮다.”

그들에게 허가를 내렸다.

다만 닿질 못해서 그들은 여전히 망설였다.

“내가 너무 잔인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군단에게 함구를 명했었다.

세상의 흑과 백을 완전히 뒤집기 위해서.

하나, 그 과정에서 신을 잃어버리고만 선지자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이를 어찌 사죄할 수 있으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의 망설임을 덜어 주는 것뿐이었다.

◈          ◈          ◈

촤르륵.

조용한 와중에 쇳소리가 울렸다.

“……!”

환청 같은 그 소음에, 모두의 몸이 굳었다.

이곳은 엘프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

이러한 쇠사슬 소리가 울릴 턱이 없는 숲이었다.

“위대한 인간 전사, 당신 지금 여기에 있소?”

휴거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내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얼굴에 환희가 번져올랐다.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이는 너른 공터, 분명 그곳엔 아무것도 서 있지 않을 터인데, 선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가 선지자들에게 다가갔다.

촤르륵-

그럴 때면 길게 늘어진 무언가가 흔들리며 쇳소리를 냈다.

“아…….”

아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모르는 이들은 그저 탄성을 흘렸다.

설마.

정말로 그가 이곳에 있는 걸까.

“성자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성녀와 선지자들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저희가 석판에 이름을 새겨도 될까요.”

그림자는 그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당신이 감추고자 한 것을 알아버린 저희일진대.”

그래도 괜찮다고,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이내 그림자가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건, 메리가 스노우폴의 주민들을 전도할 적에 만들었던 성호였다.

“…….”

아련히 스치는 옛 기억들.

그 모든 기억이 선지자들이 스스로 자격이 있음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림자는 선지자들이 석판에 이름을 새길 동안 곁을 지켰다.

그들의 맹세를 옆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후련한 듯 모습을 감췄다.

◈          ◈          ◈

“휴거 씨, 고마워요.”

그들이 다시 바렌의 신전으로 돌아왔을 적에, 메리는 휴거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취이익!”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습 공격을 받아서일까.

뻣뻣히 몸을 굳힌 휴거가 울부짖었다.

“메, 메리 소저!”

“정말 고마워요. 휴거 씨 덕분에…….”

“내가 한 게 뭐 있겠소. 오히려 너무 늦게 알려서 미안할 따름이오.”

쿡쿡, 메리가 웃었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휴거를 향한 그 웃음은 꼭 옛적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이제야 좀 홀가분해졌나 보구나.

그것을 느낀 휴거도 히죽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함께 하실래요?”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런데 휴거에게 오늘은 마치 봄처럼 화창하기만 할 뿐이었다.

“시, 식사 뒤엔 나와 결혼식을 치르시구려!”

붉은 피부가 더욱 붉게 달아오른 채로, 휴거는 참 개성 넘치는 청혼을 했다.

난데없이 결혼식이라니.

눈을 휘둥그레 뜬 메리가 이내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고 보면 휴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십여 년 전부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호감을 표출했지.

메리도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휴거 씨는 참 좋으신 분이에요.”

그러나 메리는 누군가와 교제할 수가 없는 몸이었다.

성녀란 직책에 따르는 책임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타인과 통정했다간 적지 않은 혼란이 일 것이 뻔했다.

그건 저 지옥에 있는 신의 의사와는 무관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녀는 척박한 땅에 홀로 핀 꽃이에요. 그래서 진심으로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거죠.”

“……취익.”

휴거도 나름대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린 오크에게 타이탄의 왕은 언제나 승리하고 용맹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믿음과 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으니, 믿음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성녀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 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이건 어떻소.”

은근슬쩍 메리를 마주 껴안은 휴거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천국에 가서, 그때 혼식을 치르는 거요. 큐피트들과 다른 이들을 하객으로 두고.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소?”

“어머, 왜 자꾸 중간은 생략하고 결혼부터 하려 하시는 거예요?”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거늘…….”

“싫어요.”

씩 웃은 메리가 휴거에게서 떨어졌다.

설마 또 차인 건가.

휴거의 어깨가 축 늘어지려 할 때였다.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죽었는데, 바로 결혼을 하자니요.”

장난기 섞인 그녀의 음성에 휴거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 그럼 연애부터 하자는…….”

“몰라요. 그건 천국에 가고 나서 생각해 볼래요.”

메리는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멍하니 서 있는 휴거를 향해 말했다.

“식사, 같이 안 할 거예요?”

“헉! 할 거요! 소저랑 밥 먹을 거요!”

고백에 대한 확답은 없었다.

하지만 휴거는 그녀와 사귈 것을 약속받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메리를 향해 뛰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뭐, 본래 믿음에 정답은 없으니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무어 나쁠까.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야…….”

한 오크의 뜨거운 외쪽사랑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다.

결과는 제법 만족스럽다 해야 하나.

“짜식, 기어코 해냈네.”

그의 사랑이 천국에서나마 이루어질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이루어질 것이라 믿을 뿐이었다.

어차피 정답도 없지 않은가.

“내가 하객으로 못 가는 게 한이로군.”

나는 턱을 쓸며 신전을 벗어났다.

맹세의 날 이후 처음으로 나오게 된 나들이.

휴거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 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왕도의 정문으로 걸어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걸어가면 알리사와 앨런을 볼 수 있었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텐베르크를 볼 수 있었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내게 남은 건 오직 시간뿐이다.

따로 개입만 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만큼 세상 구경을 하다 갈 수 있으리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바텐베르크부터 구경할 것을 결정했다.

모리츠와 아론을 비롯한 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검성의 새로운 후계자가 누구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 까탈스러운 발락의 눈에 들 정도면 꽤 괜찮은 녀석이겠지.

“흠. 기대되는걸.”

나는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위로 들었다.

화창한 하늘 속에서 거대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천국의 죄인들인가.

나를 향한 시선에 어린 죄책감은 여전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난 다시 세상을 걸었다.

“…….”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위협하고, 수많은 생명을 죽인 존재들이다.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지난 희생자들을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혹시 모르리라.

다시 한번 세상이 무너질 위험이 들이닥쳤을 때.

나의 개입으로도, 호르의 군단마저도 어찌 하지 못할 만큼 큰 재앙이 나타났을 때.

다섯 호르가 세상을 구한다면 그때는 회개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리라.

이 또한 내가 그들에게 남겨 둔 일말의 희망이자, 이 세상의 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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