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유랑하는 주시자 (2)
[……정말로 맹세를 하실 겁니까?]
가련한 사람들.
하리엔은 그들에게 섣부른 선택을 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시간이란 무감정한 신만큼이나 잔인한 법.
제아무리 강인한 영혼을 가진 그들이라 할지라도 영원을 입에 담아선 안 되었다.
언젠가는 실망하고 말리라.
끝없이 흐르는 시간의 물살에 깎여 나간 자기 자신에게.
“당연한 것을 묻는군.”
하지만 호르의 군단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신들은 훗날 천국에 거하기를 약속받은 존재들.]
[세상을 구한 보상을 취하는 데에 더 이상의 책임은 지지 않아도…….]
호르의 군단을 만류하려던 하리엔이 입을 다물었다.
진작에 뜻을 굳힌 저들을 말리는 건 꽤 지난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호르의 군단은 정말 진심으로 자신들이 영원을 맹세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듯했다.
가련하고, 우둔하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밝게 빛났다.
[그대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요청하신 대로 방주는 저희가 맡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천사들이 세 척의 방주를 에워싸고 하늘 위로 전송했다.
한때 수많은 용사와 영웅들을 태우고 세상을 구했던 저 배들은 다섯 호르의 가호 아래 보존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죽어서 천국에 온 저들의 거처가 되겠지.
하리엔이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땅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아버지의 동료들이 눈에 박히듯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다섯 호르의 힘을 빌어 축복이라도 내려 주고 싶었다.
아버지를 잃고 상실감에 빠졌던 건 저들만이 아니라 천사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리하르트’로부터 창조된 천사들이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섯 호르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진 그들에게 천사들이 해 줄 수 있는 건 간단한 물건의 전달뿐이었다.
[이건, 천국의 세 번째 호르께서 그대들에게 전하라 하신 물건입니다.]
그녀들이 흩뿌린 빛이 점차 석판의 형상을 갖춰 나갔다.
[세 번째 호르께서 말씀하시길.]
[그건 다섯 호르의 빛이 아닌, 악연 속 용사가 만든 빛의 석판이라 하셨습니다.]
기왕 맹세를 할 거면 제대로 하게 하라고, 세 번째 호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던 모습이 하리엔의 눈에 아른거렸다.
죄악감에 찌든 그 얼굴이란.
빛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유능하고 현명한 거인이었지만, 호르의 군단에겐 여전한 죄인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석판을 전해 준 것으로 그녀들의 임무는 완전히 끝이 났다.
그렇게, 임무를 마친 하리엔과 천사들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
저 멀리서부터 지옥의 기운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얄궂은 신의 장난일까.
그도 아니면 정말 운명이란 것일까.
10년간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 존재가, 맹세의 날 당일에 이 세상에 현현하였다.
그건 천국, 다섯 호르에게 있어서도 무척 중대한 사안이었다.
스물아홉의 천사들이 다섯 호르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 빠르게 천국으로 향했다.
[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더 생겼구나.]
하리엔은 자매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지옥의 기운을 좇아 날았다.
저 가련한 이들이 맹세를 치르기 전에, 지옥에서 올라온 망령에게 그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녀는 어깻죽지가 뻐근할 정도로 날갯짓을 했다.
곧 바렌 왕도 인근의 숲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망령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단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나, 심지어 그로부터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했었으나, 낡디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그는 분명 그녀의 아버지였다.
[…….]
하리엔이 조용히 그의 뒤를 좇았다.
망령, 리하르트는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음음, 수고가 많아.”
저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오, 너 진짜 오랜만이다! 어릴 때 그 얼굴이 아직도 남아 있네.”
장작을 패는 소년에게 알은체를 했다.
실없는 장난에 불과한 행위.
그것만으로도 그는 무척이나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의 밝음이었다.
“…….”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석상에 눈길을 사로잡힌 그가 처연히 웃었다.
그립고, 또 미안한 이들의 조각상을 보며 울듯이 웃었다.
역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오늘이 맹세의 날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곳에서 그들을 그리워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보다 못한 그녀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다만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아버지라고 여겨 왔으나, 정작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자니 목소리가 쉬이 나오질 않았다.
혹여나 싫어하시지는 않을까,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정하시지는 않을까.
입안에 가시라도 돋은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
먼저 말을 꺼낸 건 리하르트였다
“다섯 호르가 보낸 건가?”
그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하게 일렁였다.
[그저 우연히…… 당신의 기운을 느껴서 찾아왔습니다.]
우연일 리가 없다.
그가 다른 날도 아닌 오늘,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명에 가까웠다.
[아버지…… 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낸 그녀에게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거절당할까 우려한 것과는 반대로 도리어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내심 다행이었다.
“……나는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자식에게 그 이름을 묻는 아버지라도, 하리엔은 마냥 좋았다.
그녀의 자매들 또한 이 이야기를 들으면 뛸 듯이 기뻐하리라.
[하리엔, 이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그려졌다.
눈을 휘둥그레 뜬, 아버지의 인간적인 반응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세상을 구한 영웅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어야겠지.
[오늘은 중요한 날입니다.]
[아버지께도, 그들에게도.]
아버지와 재회를 하고 나서야 그녀는 확신을 굳혔다.
눈앞의 영웅이 그들과 함께해 준다면, 단언컨대 그 맹세가 빛바랠 날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대륙의 중심, 세계수가 거하는 숲에서 그들이 영원한 것을 맹세하고자 합니다.]
화사하게 웃은 천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 ◈ ◈
생생히 살아 있는 이들이 제 손으로 비석에 이름을 새겼다.
그러고는 맹세했다.
“우리는 살아서 이 시대의 평화를 지킬 것이다.”
“우리는 훗날 죽어서 천국에 간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이 세상을 수호할 것이다.”
그 우직한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제는 그냥 편히 쉬지.
왜 저들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뒷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정한 신이 홀로 잊히지 않도록.”
“우리는 천국에서 그의 뜻과 함께하리라.”
하여간에 바보 같은 놈들이었다.
너희들이 기억해 주지 않아도, 나는 늘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터인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어쩌면 난 조금 외로웠던 걸지도 모른다.
홀로 영원을 걷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적적할지도 모른다고 느끼던 참이었으니까.
아아, 나의 동료들아.
그래.
나와 함께 걷자.
촤르륵-
팔을 묶은 사슬이 바닥을 끌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쳐, 수많은 이름을 새긴 석판에 손을 얹었다.
카드득.
빛이 가득한 석판에 어둠 한 줄기가 글자를 이루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나의 이름을 본 가련한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아, 아아……!”
“리하르트!”
이 좋은 날에 왜 울고만 있는 걸까.
“리하르트,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애타게 나를 찾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쓰라렸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콰득-
팔을 묶은 사슬이 더욱 단단하게 옥죄여 온다.
천국에서 내려온 석판 또한 현세의 물건.
망령에 불과한 내가 그것에 이름을 새겼으니, 내게 허락된 ‘개입’이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사실 그건 내가 나 자신에게 세운 일종의 규칙이었다.
주시자라고 하여 모든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 수 없도록.
인간이 가진 자유와 무궁한 가능성이 나로 인해 망가지지 않도록.
그러한 대의를 품고 내 손으로 직접 채운 목줄이건만, 지금만큼은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었다.
촤르륵!
사슬이 팔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금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매정한 사슬이 유달리 얄미웠다.
『원한다면, 이번은 눈 감아 줄 수 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신까지 나를 배려하려고 하네.
킥, 웃음이 나왔다.
매우 솔깃한 말이었지만 내가 세운 규칙을 처음부터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무려 ‘영원’이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인사만 하자.
나는 후드를 뒤로 젖혔다.
연신 나를 찾아 허황되게 시선을 돌리는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 대가는 조금 더 이른 지옥으로의 복귀였으니 아주 값싼 거래라 할 수 있었다.
“아아…….”
울음이 짙어졌다.
사슬에 옥죄인 나를 보는 시선에 아픔이 짙어졌다.
“계속 울면 나 이름 지운다?”
그래서 나는 부러 장난스러운 말투를 썼다.
지옥에 처박혔다고 하여 내가 죽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너희들이 기억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울지 마.”
너희들이 영원을 맹세해 주었기에,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게 되었다.
“내가 동료 하나는 잘 뒀어. 그치?”
건들건들 웃으며 말하는 내게, 모리츠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의 시선이 내 발목을 향했다.
거무스름한 먹구름이 나를 아래에서부터 집어 삼키는 중이었다.
“가는, 거냐…….”
“응.”
“언제 왔다고. 뭘 했다고 벌써 가.”
많은 걸 했어.
우리가 일궈 낸 평화를 구경했고, 맹세의 석판에 이름을 새겼어.
그리고 지금은 너희에게 인사를 하고 있지.
수많은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하려다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언제 또 오시는 겁니까?”
아론이 물었다.
마치 이게 마지막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게 사실이라서, 나는 빙긋 웃었다.
“언제든. 너희가 보고 싶을 때.”
“그럼 내일도 오시겠군요. 내일 모래도요.”
“그래, 맞아. 난 매일 너희를 찾아갈 거야.”
사실 언제 또 이렇게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을는지, 정확한 날짜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건 성령이 아닌 신이 정하는 것이니, 정말 내일일수도, 혹은 내년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게 무에 중요할까.
고개를 돌려 석판을 보았다.
나의 이름 아래 수많은 글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보여 준 영원한 의지.
비록 거하는 곳은 달라도, 우린 함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울지 말래도.”
나는 끝내 울음을 멈추지 못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것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