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비애(悲哀) (2)
거인은 광기에 찌들어 있을지언정,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었다.
자신들이 버림받았음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고, 빛을 누리는 인간들을 보며 자신들이 실패작이라는 결론을 유추했다.
그리고.
거인의 아버지는 그가 내린 결론을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다.
『저희를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고 계십니까?』
거인은 아버지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다만 수천 년 동안 한 맺힌 영혼은 죽어서도 아버지를 좇았다.
『저희는 태어난 것조차 죄란 말입니까?』
백귀라는 요검 속 원혼을 내려다보는 아버지는 얼굴만을 일그러트릴 뿐, 그 순간에도 거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참으로 매정한 아버지였다.
한 번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해 주어도 괜찮을 텐데.
입에 발린 말일지라도 그리 말해 줬다면 기뻤을 텐데.
끝까지 무언으로 긍정을 표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원망스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그렇다면.』
『아버지 또한 저희를 창조한 죄가 있습니다.』
주체 못할 정도로 북받쳐 오른 감정 때문일까.
거인, 칼고스는 참람한 음성으로 저주 아닌 저주를 내렸다.
『머지않아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의 칼고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큰 후회를 불러올지.
◈ ◈ ◈
백귀에 갇힌 칼고스는 리하르트에게 있어 커다란 혹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백귀와 성검 템페스트를 하나로 합쳐 새로운 성검을 만들어 냈다.
성검 속 용사의 영혼으로 악독한 거인의 원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그러나 그 검엔 끝내 ‘악연’이라는 이름이 붙고 말았다.
『끄흐…….』
우습다.
거인은 스스로가 우스워서 눈물이 나도록 홀로 웃었다.
악연(惡緣),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연(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하나로 그리 기쁘다니.
스스로의 멍청함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젠장. 죽어서도 골칫덩이로군.”
리하르트는 악연 속 원혼을 볼 때면 그리 말하곤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린 관계였다.
이렇게나마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깟 욕 따윈 얼마든지 들어 처먹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칼고스는 검을 빌어 아버지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래.
그건 여행이었다.
비록 잡버러지 같은 인간들 몇이 끼어들었지만, 그건 분명 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
그 여행에서 칼고스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아둔한 인간들이 호르를 앞에 두고서도 애꿎은 하늘만 우러러보는 꼴을 볼 땐 조소를 지었다.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한 아버지를 볼 때면 희열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칼고스의 심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빠아!”
어느 날, 녹색 머리칼의 여자아이가 리하르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세계수였다.
마계의 다섯 피조물과 같은, 호르로부터 강대한 격을 부여받아 태어난 존재.
굳이 말하자면 리하르트의 여섯 번째 피조물…… 그러니까 칼고스의 형제와도 같았다.
『…….』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리하르트의 손길이 어찌나 다정하던지.
어째서 그녀는.
어째서 우리는.
지독한 질투가 칼고스의 배알을 끊어 버릴 듯 뒤틀었다.
“성자님, 짠 하시지요!”
“짠은 무슨 얼어 죽을. 대충 마시기나 해!”
벌레 같은 인간들이 리하르트에게 엉겨 붙었다.
아델을 품에 안은 리하르트가 그들에게 윽박 아닌 윽박을 지르며 웃었다.
칼고스와 마계의 존재들에겐 단 한 번도 향한 적 없던 미소가, 저들에겐 너무도 쉽게 지어졌다.
문득 칼고스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형제들도 저런 것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빛을 탐하고 독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아버지와 함께 웃고 떠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칼고스는 스스로 자문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어느 순간 답을 찾은 듯했다.
“내가 모든 걸 바로잡겠다.”
대체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리하르트는 그 밝은 몸으로 어둠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어둠을 품었다.
저러다 죽어 버릴 텐데.
아버지께선 인간이 되시더니 머리까지 아둔해지신 모양이었다.
그 무모한 짓거리를 지켜보고만 있긴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빛의 사용에 제동을 거는, 왕의 조각들.』
『제게 맡겨 주십시오.』
형제들 모두 아버지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몸에 맞지도 않는 어둠을 품은 채로 형제들을 마주하는 것은, 그들을 기만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칼고스에게 그런 건 전부 핑계에 불과했다.
“그래서 네가 얻을 이득은?”
아버지의 물음에 칼고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득이라 말하기엔 뭐 한 것.
그건 소망이라 표현하는 게 알맞을 터였다.
『허망하지 않은 저와 형제들의 결말.』
『허망하지 않은 당신의 결말.』
『저는 그것이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명석한 거인은 그제야 인정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과 마계의 형제들에겐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그것이 그들의 영혼이 어둡기 때문이든, 오늘날에 이르러 수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든 간에.
거인은 이 악연이 어찌 끝날지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
◈ ◈ ◈
마계와 호르교의 전쟁이 극에 치달았다.
세계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방주에 올라탄 호르의 군단이 마계로 향했다.
수천 년 만에 마계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머지 피조물들을 죽였다.
가여운 형제들.
칼고스는 그들의 영혼을 삼키며 곧 보게 될 결말을 고대했다.
그렇게, 끝내 마왕마저 악연의 검 속에 삼켜지고 말았다.
『……이것이 당신께서 계획하신 결말입니까?』
종전 직후.
죽어 원혼이 된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적엔, 마계가 온통 하얗게 물들어 버린 채였다.
그리고 세상 모든 어둠을 품은 듯했던 그들의 육신마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빛이, 그들의 몸속에 있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마침내 너희의 뒤틀림도 바로잡혔구나.”
빛을 잃은 아버지가 말했다.
인간으로는 감당 못할, 다섯 피조물의 어둠을 모조리 흡수한 아버지.
가장 찬란히 빛나던 그가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칼고스는 사무치도록 슬펐다.
『저희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죄가 이리 쉽게 용서받을 리가 없습니다.』
이건 용서가 아니다.
지나치게 잔혹한 형벌이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혹한 아버지의 눈빛이 그 증거였다.
『아버지…….』
『빛이 죄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비로소 어둠이 걷혀진 영혼은 제게 새겨진 업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형제들이 죄악감에 몸서리를 쳤다.
비틀렸던 천성은 바로잡혔으나, 미쳐 날뛰었을 적의 그 자국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진정한 형벌의 선고는 그 이후였다.
“나는 지옥으로, 너희는 천국으로.”
아버지는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으로 그들의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형제들이 찢어지는 절규를 토해 냈다.
“이것이 우리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노니, 너희는 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평생토록 속죄하라.”
아아…….
이것이 모든 걸 바로잡겠다던, 당신의 결심이었습니까.
너무도 잔인한 처사에 형제들이 자비를 구할 때, 칼고스는 홀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 아버지 또한 저희를 창조한 죄가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언젠가 주제도 모르고 악에 받쳐 지껄였던 그 말.
그 말이 현실이 되어 버려서, 칼고스는 누구보다 끔찍한 죄악감을 마주했다.
“리하르트! 지금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지의 동료들이 비탄에 젖어 외쳤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하는 아버지에게 원망을 토해 냈다.
그래서 다섯 피조물의 죄가 더더욱 짙어졌다.
소중한 이들에게 원망받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떨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해서 죽도록 죄스러웠다.
한데, 그러고도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했던 걸까.
“너희들은 만인에게 호르가 천국을 만들고 통치한다고 밝혀 다오. 세상을 어지럽혔던 악은 지옥에 처박혀 죄인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속죄를 거듭하게 되었다 전해 다오.”
심장에 칼날이 박힌 듯했다.
울부짖는 호르의 군단만큼, 칼고스와 형제들도 괴로웠다.
죄를 지은 건 저희일진대 어찌하여 당신께서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는 건지.
꼭 그렇게 잔인한 벌을 주셔야만 만족하실 수 있는 건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비틀어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사명이 있었다.
아버지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호르라는 이름에 걸린 책임은 그토록 무거웠다.
『…….』
이내 시간이 되었다.
절망에 빠진 호르의 군단을 천국에서 쫓아낸 후, 아버지는 자신의 동료들이 서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덤덤한 눈빛이 더욱 서글프게만 보였다.
“훗날, 내 동료들이 천국에 거할 수 있도록 해라.”
그들에게 천국에 거할 자격이 있다면, 그들을 이끌어 세상을 구한 아버지 또한 천국에 있어야 함이 당연했다.
『저는 결코 이 결말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서 벌받아 마땅한 것은 저희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천국에서 소중한 이들과 행복하게 지내 달라고.
칼고스는 참다 못해 발악 같은 애원을 했다.
다만 돌아오는 답은 냉정했다.
“너희들이 그리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죄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장 기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형벌이 아니더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들의 아버지는 잔인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라. 스스로를 혐오해라. 만인에게 찬양받는 자신을 보며 환멸감에 몸부림치거라. 그리고 빛으로써 봉사해라.”
촤르륵.
스스로를 사슬에 묶은 신은, 다섯 피조물이 보는 앞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 ◈ ◈
『……저희는 끝내 악연으로 남는 것이군요.』
신마저 사라진 천국.
지혜로운 거인은 눈물을 흘리며 깨달았다.
모든 것이 바로잡혔음에도 한때 애증으로 변질됐었던 애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어둠이었던 저희가 당신을 사랑한 것, 그것만큼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비틀렸던 다섯 피조물이었으나 신을 향한 애정은 죄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것이 광기를 만나 애증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이토록 죄 많은 영혼으로나마.』
『앞으로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광기가 아닌 비애(悲哀)에 젖은 애정.
그리고 그 애정을 증명하는 길은 아버지가 부여한 사명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선하게 살아온 자들을 위한 천국은 그렇게 모습을 갖춰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