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비애(悲哀) (1)
처음 눈을 떴을 적에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하이얀 빛이었다.
그가 밟고 선 세상은 온통 까맣고 질퍽했으나, 그렇기에 홀로 고고한 빛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그건 마치,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새가 어미를 마주한 것과도 같았다.
『아…….』
그가 빛을 향해 손을 뻗어 올렸다.
제 손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그 붉은 살갗이 지글거리는 감각이 고통이란 것인지도 모르고.
거인은 그저 웃으며 손을 뻗어 올렸다.
본래 지혜로워야 했을 거인은 제 어두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빛을 탐냈다.
태초의 시절, 그 새까만 세계에선 그것이 정상이었으니까.
거인에겐 형제들이 있었다.
비록 생김새는 제각각 달랐으나 어둠 품은 몸으로 빛을 갈구하는 것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 새까만 세계가 빛을 버티지 못해 삐걱이는 것도, 고고한 빛의 열기에 그들의 몸이 녹아 흘러내리는 것도.
모든 게 당연하다 여겼을 뿐이었다.
형제 중 누구도 문제를 문제 삼지 않았으니, 그들의 세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다섯 피조물들은 오직 빛만을 원했다.
그 사무치는 욕구는 어둡게 태어나 버린 자들의 집착이었다.
또 한편으론 아비를 향한 애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시커먼 하늘을 수놓던 빛이 사라졌다.
어두운 세계에 기나긴 밤이 불현듯 도래했다.
그 이후부터 마계가 안정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다섯 피조물들의 정신이 망가져 갔다.
빛이 없는 세상은 무척이나 춥고 고독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모두가 혼란스러워할 때, 거인은 얌전히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렇게 백 년이 흐르고, 수백 년이 흐르고, 또 그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아…….』
『저희를 버리신 겁니까.』
결국 거인과 형제들은 버림받았음을 시인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늘만 가득한 세상에서, 그들은 밝게 빛나는 또 다른 세상을 엿보았으니까.
그곳은 무척이나 신비한 세상이었다.
빛이 거하고 있음에도 푸른 하늘과 땅은 평온하기만 했다.
빛이 환하게 내리쬐이는데도 그 아래 생명들은 온전히 싱그러웠다.
다섯 피조물들이 당연하다 여겼던 모든 것들을 부정해 버리는, 너무도 잔인한 세상이 바로 그곳이었다.
- 우으…….
우매한 첫째는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저에게만 안 보인다 하여 저 세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진대.
『크아아아-!!』
두 번째 피조물은 다채로운 색감의 들판을 향해 포효했다.
제 목이 망가져 버릴 때까지, 아주 긴 시간을.
셋째, 거인은 홀로 울었다.
볼을 타고 흐른 피눈물이 웅덩이를 이루었고, 어느샌가 바다가 되었다.
넷째와 다섯째가 빛을 부르짖으며 원망을 게워 냈다.
까만 세상에 다섯 피조물들의 절규가 만연했다.
『…….』
곧, 집착 어린 애정에 원망과 질투가 더해져 애증이 되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거인이 복수를 외쳤다.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는 사실 그도 알 수 없었다.
저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복수일까.
아버지를 빼앗은 저쪽 세상을 향한 복수일까.
사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어두워 다른 세상을 만든 것이라면, 그 세상을 부숴 버리고 이쪽으로 끌고 오면 될 일이다.
우리가 어두워 아버지의 빛을 품을 수 없다면, 아버지를 어둡게 만들면 될 일이다.
다섯 피조물의 가슴속에 남은 건 더 이상 애정이 아닌 애증이었기에, 제 손으로 아버지를 끌어내리려는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우매한 왕이시여.』
거인은 첫째를 왕으로 추대했다.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큰 힘을 가진 그를 왕으로 삼아 마계를 다스리도록 종용했다.
왕은 제법 아버지의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시커먼 영혼이나마 마계에 온갖 생명이 탄생했다.
그리하여 강대한 군단이 만들어졌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은 균열을 여는 법을 깨우쳤다.
그렇게 첫 번째 성마대전이 발발했다.
◈ ◈ ◈
인간은 약했다.
인간에게 밀려 대륙의 패권을 놓친 여타 이종족 또한 약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그들에겐 신의 가호가 있었고, 다섯 피조물은 그 가호를 받지 못했다.
『……정말 지독히도 편애하시는군요.』
빛, 호르는 인간을 평등히 사랑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저들이 얼마나 큰 영광을 누리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이토록 찬란한 빛 아래에 있으면서.
고작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하나 차별없는 평등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벌레 같은 인간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살아 숨쉴 뿐이었다.
『저희에겐 그리도 평등히 무관심하셨을진대.』
『어째서 이들에겐 평등한 사랑을 주시는 겁니까.』
어느 순간 유달리 강한 빛을 품은 인간들, 용사라는 족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또한 인간이 성마대전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신의 안배였다.
거인은 그들과 싸우며 눈물을 흘렸다.
신의 가호를 받는 존재들을 마주할수록 이 지독스런 편애가 사무치게 느껴졌다.
◈ ◈ ◈
첫 번째 성마대전은 결국 마계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궐기했던 다섯 피조물은, 몸과 마음에 상처만 더한 채 후퇴해야 했다.
그 후로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 우…….
지난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은 왕은 쉬이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재차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거인은 자신이 흘린 피눈물 속에 몸을 숨기곤 차분히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은 그들이 다시금 기회를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 아버지…….』
어느 날, 신이 사라졌다.
그가 거하던 오색찬란한 색의 세상에서도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아버지께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든 걸까.
거인을 비롯한 형제들은 눈을 부릅뜨고 세상 간의 차원 너머를 훑었다.
다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 아아……!』
버림받았음을 시인했을 때만큼 커다란 절망이 다섯 피조물을 엄습했다.
그들은 빛을 되찾기 위해 발악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절규는 인간들의 세상을 향한 분노로 변모했다.
감히 빛을 누리고.
감히 빛을 잊어버린 존재들.
모든게 전부 그들의 탓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다섯 피조물은 가슴속 분노를 외면하지 않았다.
더 이상 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된 인간의 세상은 허술하기만 했다.
다섯 피조물이 부상만 회복한다면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비록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빛은 진즉 사라져 버린 이후였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그 세상이 더욱 증오스러웠다.
- 우으…….
원망스러운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 오랜 준비를 거치고 있을 때였다.
아직 균열이 완성되지도 않았건만, 성마른 분노를 주체 못한 마왕이 억지로 구멍을 뚫어 저쪽 세상을 엿보았다.
거인은 구태여 왕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벌레들만 가득한 세상, 조금의 차질 정도는 문제 삼지 않아도 괜찮을 터였다.
- 호…… 르…….
그 순간, 불완전한 균열 너머로 눈을 들이밀던 왕이 그리운 이름을 중얼거렸다.
피바다에 몸을 숨겼던 거인이 고개를 쳐들고 왕을 바라보았다.
- 우,으……!!
거칠게 요동치는 왕의 마기.
꾸며낸 살갗을 타고 흐르는 붉디붉은 피눈물.
그 안에 그리움과 애증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콰득.
억지로 뚫어 낸 균열이 닫혔다.
하지만 왕은 세상을 염탐하던 모습 그대로, 그리운 이름만 거듭 중얼거렸다.
『왕이시여.』
『대체 무엇을 보신 겁니까.』
거인이 물었다.
설마 하는 기대심이 미친 듯 솟구쳤다.
정신을 차렸을땐 거인은 이미 마계의 왕좌 앞에 다가선 채였다.
- 아버지…….
- 아버지가 저곳에, 아버지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저곳에 있다더라.
태양 같던 빛이 성냥의 그것만도 못하게 되었을지언정, 그 인간에게선 분명 아버지의 기운이 느껴졌다더라.
『끄흐, 끄흐흐…….』
우매한 왕의 말에 거인은 울듯이 웃었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 ◈ ◈
왕이 본 것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그 앞에 있었다.
처음엔 그 인간이 정말 아버지인지 바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만큼 거인의 기억 속 찬란한 빛과 눈앞의 인간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이……! 아버지이! 빌어처먹을 아버지!』
아아.
어쩌다 이리도 한심한 모습이 되셨습니까.
나약한 벌레가 된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니, 거인은 묘한 슬픔과 함께 광기 어린 희열을 느꼈다.
“뭐라는 거야, 빨갱이 자식이.”
신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가 짜증스레 내뱉은 한마디 대꾸가, 거인으로서는 처음 나눈 대화라는 것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인은 만족할 수 있었다.
“저 거인은 스승님께서 상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쯧, 말을 번복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비록 기념비적인 아버지와의 재회를 웬 늙은 인간에게 방해받았어도.
버러지 같은 리치들이 비좁은 균열을 연 탓에 거대한 몸이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음에도.
그저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에 거인은 크게 만족했다.
『네놈을 기억하겠다! 내 기필코! 너의 강퍅한 팔로 이를 쑤실 것이며, 그 흉측한 머리통은 지옥의 강 밑바닥에 처넣을 것이다-!』
그는 마계로 돌아가기 직전의 순간, 폐허가 된 폴린 성에 ‘명분’을 뿌리내리고자 하였다.
다 늙어 죽어 가는 인간에게 치욕을 당했으니 내가 직접 복수 해야 한다고.
내가 이곳에 지렛대를 끼워 넣었으니 다음 차례도 응당 나의 것이라고.
우매한 왕과 형제들에게 내세울 ‘명분’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나는 마계의 군단장, 칼고스! 이 땅에 역병의 저주를 내리겠노라!』
촤아악-
거인의 몸에서 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바렌이라는 인간들의 왕국은 두 번째 악몽, ‘역병’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