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Epilogue 영원한 것 (完)
달그락.
희고 긴 손가락이 찻잔을 기울였다.
오전의 티타임을 즐기던 알리사는 문득 제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흠.”
그녀가 방주를 개발할 적에 리하르트에게 선물받은 반지였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인데, 반지는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알리사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너에게 새로운 반지를 받고 싶었는데.”
기껏 인간으로 살았으면, 혼인 정도는 한 번쯤 해 보고 가도 되지 않았느냐고.
덕분에 자신의 손가락에 끼여질 반지는 이게 마지막이 되었다고.
알리사는 홀로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한다기엔 퍽 덤덤한 어조였고, 그저 호감을 표현한다기엔 그 눈빛이 꽤 깊었다.
리하르트를 향한, 알쏭달쏭한 그녀의 마음은 10년 전부터 줄곧 그대로였다.
“누님. 슬슬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푸른 머리칼의 잘생긴 청년이 그녀를 찾았다.
이제는 완숙한 청년이 된 앨런이었다.
그의 시선이 힐끔, 누이가 낀 반지를 향했다.
“……어서 채비를 갖추시지요. 바텐베르크의 멍청이들보다 늦을 순 없습니다.”
그리 말하는 앨런의 음성은 복잡했다.
사실 종전 당시, 리하르트를 잃었을 적에 알리사보다 큰 충격을 받았던 건 앨런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을 온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였다.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더냐. 차라도 마저 마시고 가자꾸나.”
라플라스의 눈을 발동하지도 않았거늘, 알리사에겐 그의 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억지로 맞은편에 동생을 앉혔다.
아직도 어수룩하기만 한 동생.
앨런에겐 대화가 필요한 참이었다.
“이제 그만 네 안의 고민을 풀어놓아도 되지 않겠느냐.”
곧 그리운 얼굴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복잡한 정신 상태로 갔다간 맹세의 의미가 퇴색하고 말 것이라고, 알리사는 부드럽게 앨런을 타일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저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결국 앨런의 입이 고민을 토했다.
“그분께서는 어찌하여 리하르트로서 역사하셨던 것인지. 고귀하신 분께서 어찌 스스로 고난 앞에 서신 것인지…… 저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 아닙니까.”
라이벌이라 여겼던 리하르트가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처음엔 배신감을 느꼈다.
마치 스스로가 하찮은 장난감이 된 것만 같았다.
리하르트에겐 적대감을 드러냈으면서, 신에겐 간절히 기도를 올리던 자신의 모습이 치가 떨리도록 우스웠다.
그렇게 앨런은 종전 후 끝없는 번뇌에 시달려야 했다.
“세상을 백지로 만들겠다던 제 신념은 결국 틀렸던 겁니까.”
다른 이들은 리하르트와의 여정을 추억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앨런에게 있어서 그와의 기억은 온통 후회스러운 것뿐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 전부가 그의 신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증거였으니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리하르트는, 그분께선 왜 스스로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신 겁니까. 오직 그분만이 평화의 시대를 통치할 수 있다 믿었던 저는 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일 년의 배신감 뒤엔 지독히도 끈질긴 자괴감과 의문이 뒤따랐다.
리하르트와 함께 한 다른 이들은 스스로 답을 구했는데, 오직 앨런만이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답을 구하고 싶었던 앨런은, 약속된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도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누님. 알려 주시겠습니까.”
결국 그가 의지할 곳은 누이뿐이었다.
“드디어 다른 이에게 물어보는 법을 배웠구나.”
답을 갈구하는 그 눈빛을 앞에 두고, 알리사는 기껍게 웃었다.
사실, 정답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이 아니었으니까.
신이 아닐진대, 어찌 신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설령 리하르트의 측근이었던 사내들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정답은 알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 내린 해답을 믿을 뿐이었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전지전능하다 생각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믿음을 동생에게 이어 주기로 했다.
“우리가 신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듯이, 신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이 땅에 내려온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단다.”
알리사의 앞에 놓인 차는 느리게만 비워졌다.
“그리고…….”
오후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울음을 터트릴때,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네 기억 속의 리하르트는 신이었느냐, 인간이었느냐?”
“……인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호르교라는 믿음을 모두에게 전파하고 어둠과 맞서 싸운 리하르트는 무엇이었느냐?”
앨런이 눈을 감았다 떴다.
깊은 상념에 잠겼던 그가 이내 답을 내었다.
“이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알리사가 웃었다.
“그가 평화를 위해 싸울 때, 너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그 옆에 함께했다.”
“…….”
“그렇다면 오늘의 따사로움은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더냐. 보아라. 모든 건 우리가 일구어 냈다. 신은 인간의 몸으로서 모두에게 평화를 얻어 내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인간이 된 신의 여정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려진 또 다른 계시요, 가르침이었다.
“…….”
앨런은 몇 번이고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세상이 변하는 동안 홀로 번뇌에 고통받던 그의 눈이, 어느새 옛 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 ◈ ◈
툭, 툭-
팔짱을 낀 모리츠의 손가락이 한시도 쉬질 못하고 까딱였다.
잔뜩 찌푸려진 인상이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표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왜 아직도 안 와?”
오래전부터 약속해 왔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바텐베르크의 기사들과 다른 이들은 벌써 ‘가르텐’에 도착했건만, 남측의 녀석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채였다.
참지 못한 그가 부하를 부려 근방을 수색할 것을 명하려던 찰나였다.
허공에 웬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그 너머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이거이거, 늦어서 미안하구나.”
알리사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중요한 일이 있었다 말하는 그녀에게 뭐라 핀잔을 줄 간 큰 사람은 없었다.
“그럼 다 모인 건가?”
앨런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너희들이 제일 늦게 왔거든.”
“흥. 여전히 시끄러운 녀석이군.”
빠직, 하고 모리츠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뭐라 대거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모리츠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분을 삭였다.
무엇이 되었든, 이단심판관이자 남쪽의 성자라는 인간이 요 10년간 썩은 동태 눈을 해 왔던 것보단 나았으니.
“자, 다들 모였으면 이제 시작하자꾸나.”
세계수로부터 탄생한 아델의 정신체가 웃으며 말했다.
새로이 지어진 엘프의 숲, ‘가르텐’.
바텐베르크의 기사들부터 각국의 마법사들과 이종족들까지, 재앙을 종식시켰던 호르의 군단 전원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
아델과 마르에겐 인상 깊은 광경이었다.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싶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을 본다면 무척 흡족해하실 것이다.”
몇 마디 감사 인사를 마친 아델이 발을 굴렀다.
쿠구궁.
싱그러운 숲의 도시 한복판에서 칭칭 감겨진 나무줄기가 솟구쳤다.
이내 그 나무줄기가 절로 풀어지고,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세 척의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
호르의 군단이 언뜻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저 방주를 타고 세상을 구했던, 마치 꿈과도 같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
그때, 휴거가 하늘을 향해 탄성을 터트렸다.
“큐피트들 아니오! 취익, 오랜만에 보는구려.”
리하르트로부터 창조되었던 이 세상의 중재자들.
서른의 천사가 하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호르의 군단 앞에 내려섰다.
[……정말로 맹세를 하실 겁니까?]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꼭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는 이들을 보듯이,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연한 것을 묻는군. 우린 저 천국의 괴물들을 믿을 수 없다.”
아론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여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호르의 군단이 오늘날 호르교의 주축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만큼 천국의 다섯 존재들을 증오하는 이는 또 없었으니, 쓰라린 진실을 알고 있는 그들은 더 이상 하늘을 향해 기도조차 올리지 않았다.
[당신들은 훗날 천국에 거하기를 약속받은 존재들.]
[세상을 구한 보상을 취하는 데에 더 이상의 책임은 지지 않아도…….]
거듭 그들을 만류하려던 천사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몇 마디 우려를 한숨과 함께 삼켜 낸 그녀가 다른 천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대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요청하신 대로, 방주는 저희가 맡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서른의 천사가 세 척의 방주를 에워쌌다.
그 날개들로부터 흘러나온 빛이 방주와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승천.
한때 호르의 군단을 태우고 새까만 전장을 유린했던 방주가 천국으로 승천했다.
[그리고 이건, 천국의 세 번째 호르께서 그대들에게 전하라 하신 물건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당장 돌아갈 것 같던 천사들은 다시 한번 빛을 흩뿌렸다.
빛이 모이고 모여 무언가 커다란 형체를 이루었다.
“……석판?”
그건 매끈한 표면의 석판이었다.
리하르트가 율법을 알릴 적에 내렸던 석판과 같은 재질의.
[세 번째 호르께서 말하시길.]
[그건 다섯 호르의 빛이 아닌, 악연 속 용사가 만든 빛의 석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괜히 찝찝해하지 말라고.
호르의 군단 중 몇몇은 마치 익숙한 거인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 ◈
군단을 내려다보던 천사들이 떠났다.
이제 남은 건 맹세의 의식이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뀔 것 같은 녀석, 있나?”
모리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리를 채운 이들이 그리도 많건만, 들려오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피식 웃은 그가 제일 먼저 석판에 손을 얹었다.
카드득.
그 손가락에 빛이 일더니, 매끈한 표면의 석판에 글자가 새겨졌다.
『모리츠 바텐베르크』
그다음은 아론이었다.
또 그다음은 기드였다.
몇 차례나 순번이 이어졌다.
“취익! 영원히 싸울 수 있다면 빠질 수가 없지.”
용맹한 오크들이 이름을 새겼다.
“저희들도 빠지지 않겠습니다.”
번영을 맞이한 엘프들이 이름을 새겼다.
“혹시 방주가 망가지면 누가 고쳐! 우리가 고쳐야지, 뭐!”
하얀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이 이름을 새겼다.
그렇게, 호르의 군단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 이름을 석판에 새겨 넣었다.
각자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석판은 마치, 죽은 자들을 기록한 비석(碑石)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 그 이후를 맹세한 자들을 새긴 비석이었다.
“우리는 살아서 이 시대의 평화를 지킬 것이다.”
우직한 얼굴을 한 그들이 석판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훗날 죽어서 천국에 간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이 세상을 수호할 것이다.”
평화는 영원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할 수 있는 것에 맹세했다.
영원할 수 있는 것이라.
한낱 피조물들이 갖고 있는 것 중 무엇이 영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신이 홀로 잊히지 않도록.”
“우리는 천국에서 그의 뜻과 함께하리라.”
나는. 웃었다.
웃으며, 그들 사이를 걸었다.
촤르륵-
팔을 묶은 사슬이 바닥을 끌었다.
“어…….”
“이 소리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들이 허황되게 시선을 돌렸다.
나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가련한 영혼들.
그들 사이를 지나쳐, 석판에 손을 얹었다.
카드득.
빛이 가득한 석판에 어둠 한 줄기가 글자를 이루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잠시간의 정적.
그 직후, 굳건했던 이들의 무릎이 땅을 찧었다.
영원을 맹세하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 아아……!”
“리하르트!”
비록 거하는 곳은 달라도, 의지는 같으니 함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보여 준 영원한 의지에 나 또한 함께하리라.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