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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98화 (198/216)

198화. Episode. 62 천국과 지옥, 떠난 자와 남겨진 자들 (1)

전장에 이상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라악……!”

구멍난 하늘에서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던 괴물들이 돌연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마치 귀신이 놈들을 채 가기라도 한 듯, 눈 깜짝할 새에 전장의 괴물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목이 터져라 기사들을 다독이던 오르드 성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대체 이번엔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그가 기사들에게 경고의 말을 뱉었다.

리오 성의 기사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방패를 턱 끝까지 끌어올리고, 창칼을 쥔 손에 마나를 순환시켰다.

그러기를 한참.

부릅뜬 눈으로 텅 빈 전장을 바라보던 그들이 헉,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빛…….”

연신 마수들을 게워 내던 하늘의 구멍에서, 무척이나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들끓던 마수들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고.

세상 모든 어둠이 도사릴 것 같던 구멍은 빛을 뿜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적진으로 향한 호르교의 승리.

“…….”

하지만 리오 성의 사내들만큼은 기뻐할 수 없었다.

가슴 한 켠이 콱 조여지는 감각.

무언가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성자님, 무사하신 겁니까?”

아발트가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          ◈          ◈

“취익.”

상처투성이 오크가 고개를 들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마수들의 사체가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어둡고 붉은 하늘은 점차 색을 잃어 갔다.

마계라는 어두운 세상이 조용한 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쿠익! 그들이 승리했나 보군!”

사투에서 살아남은 오크들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는 그 어떤 불길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하늘과 땅, 그 무(無)색의 공간에 서서히 빛이 차올랐다.

오크들은 빛을 보며 함성을 내질렀다.

승리의 도취감이 만연한 전사들 사이에서, 휴거는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감이 좋다.

리하르트에게 검성을 배워 볼 생각이 없느냐는 권유를 받았을 때부터, 휴거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이 싸움의 끝에 어떤 형태로든 쓰라린 이별이 있을 것이란 걸.

그건 차라리 직감에 가까웠다.

“용사가 되어 다시 보자고 했건만, 역시 그대는 그럴 생각이 없나 보오.”

바람을 타고 얇은 빛줄기 하나가 흘렀다.

휴거가 주먹을 내밀었다.

사르르, 투박한 인사와 맞닿은 빛이 언뜻 처연하게 반짝였다.

◈          ◈          ◈

전쟁이 끝났다.

호르의 군단과 싸우던 1군단의 괴물들조차 먼지가 되어, 더는 전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괴물이었던 먼지가 휘몰아친다.

그 중심에 한 사내가 고요히 서 있었다.

“성자님…….”

아론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성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못 박힌듯 앞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세계를 위협하던 참람한 존재들을 모두 무찔렀습니다.]

[신화가 될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상급의 신격이 주신(主神)으로 격상합니다.]

리하르트의 눈앞에 글자가 어지럽게 떠올랐다.

이내 그가 악연의 검 자루를 콱 말아쥐었다.

악연이 삼켰던 모든 것들이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마왕의 영혼이, 칼고스와 그 형제들의 영혼이 성자의 육신을 더럽혀 갔다.

[선의 성향인 신격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성향이 혼돈으로…….]

그 시스템 창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리하르트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밟고 선 땅에 풀이 자랐다.

하늘의 마기가 지워지고, 빛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어둠이 사라진 무(無)색의 세계에 새로운 색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리, 리하르트!”

모리츠가 다급히 외쳤다.

불안했다.

어째선지 몹시 불안했다.

늘 그랬듯이 리하르트는 그저 어둠을 밝히고 있을 뿐인데, 오늘의 기적만큼은 그 느낌이 달랐다.

평소와 같은 호르의 은혜가 아니었다.

지금 마계는, 빛을 상속받고 있는 것에 더욱 가까웠다.

그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

빛을 뿜어낼수록 리하르트의 육신이 까맣게 물들어 갔다.

혼돈의 성향이 악으로 치우치고 있다며, 리하르트의 시야에 글자가 정신 사납게 명멸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둠을 견디지 못해 죽어 가는 육신으로나마 빛을 토해 냈다.

찬란한 빛이 하늘을 푸르게 닦았다.

빛으로 짜인 하얀 뭉게구름이 그 하늘을 수놓았다.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땅에선, 어디서도 찾아볼 수없던 싱그러움이 맴돌기 시작했다.

풀과 꽃, 거대한 폭포와 일곱 빛깔 무지개.

눈에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졌다.

“태초의 나는 이런 세상을 바랐었다. 이제야 뜻대로 되었구나.”

리하르트는 자신이 만든 천국(天國)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파리한 음성을 들은 동료들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리하르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들을 등진 리하르트의 뒷모습이 마치 더는 다가오지 말라 말하는 듯했으니까.

쿨럭-

그가 검게 죽은피를 토했다.

죽음에 임박한 인간의 몸뚱이.

그러나 이 육신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생명창조(生命創造).』

상급 신격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매개체는 그의 육신에 담긴 다섯 피조물들의 영혼.

그리고 호르라는 존재를 이루던 빛, 그 자체였다.

그의 앞에 빛이 뭉치고 또 뭉쳤다.

죽어 성자에게 흡수되었던 다섯 영혼이 그 빛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그들이 품었던 온갖 어둠은, 리하르트가 모조리 끌어안은 채로.

“설마…….”

알리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라플라스의 눈엔 모든 것이 보였으니, 그녀는 기어코 리하르트의 뜻을 알아채고 말았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러나 끝내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이것이 당신께서 계획하신 결말입니까?』

빛으로 새로이 태어난 거인이 말했다.

하얀색의 육신과 지혜를 품은 눈빛.

그를 올려다본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떠하냐.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빛을 주었다. 마침내 너희의 뒤틀림도 바로잡혔구나.”

이제는 지독스런 어둠만이 남은 성자가 다섯 피조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신의 대리인이 될 첫 번째 피조물, 스켈레라투스.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멍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천국과 인간계를 수호할 둘째, 베노모스.

금빛 찬란한 비늘을 두른 용도 첫째와 다르지 않았다.

천국과 인간계를 조율할 아라헬과 마몬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죄가 이리 쉽게 용서받을 리가 없습니다.』

칼고스가 물었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제각기 다른 형상을 한 형제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온전한 몸을 갖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 영혼만큼은 온전하지 않았으니, 다섯 피조물들은 자신이 지었던 죄를 결코 잊지 못했다.

『아버지…….』

『빛이 죄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품었던 어둠은 모든 것을 가렸다.

그래서 죄가 죄인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빛은 달랐다.

빛은, 그 어떤 그늘 없이 그들이 지은 죄를 비춰 주었다.

눈을 감으면 자신들이 죽인 수많은 생명들의 원혼이 보인다.

귀에는 비명과 절규가 들끓었다.

이전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으나, 지금은 영혼에 새겨진 듯 외면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신을 지키고, 세상을 수호하며, 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그들에겐 너무도 끔찍한 감각이었다.

지독한 죄책감.

지독한 후회.

미쳐 날뛰었을 적에 쌓아 온 업보가 다섯 피조물들의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그건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다.

죄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죄악감일 뿐이었다.

『아버지께선 어찌 그리 어두워지셨습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자신들의 악연이 어찌 끝날지 궁금하다던 거인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처절한 발악이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들이 형벌 앞에 눈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지옥으로. 너희는 천국으로.”

그가 어두워진 몸으로, 어두워진 영혼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잡힌 빛과 어둠은 다시금 평행선을 그릴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엄명이었고, 자식들을 향한 형벌의 선고였으며,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이것이 우리들의 죄에 대한 형벌. 너희는 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평생토록 속죄하라.”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고 스스로의 어둠을 증오하던 그들은, 결국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단절을 선고받았다.

바라마지 않던 빛을 얻었으나 그 안에 아버지의 온기는 없었다.

아비는 자식들의 어둠을 끌어모은 채 지옥에 가겠노라 선언했다.

그것은 리하르트가 그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의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아…….』

첫 번째 피조물이 절규했다.

차마 잇지 못하는 음성에 죄악감이 넘쳐흘렀다.

『잘못했습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속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선 밝게 빛나 주십시오. 부디 어둠을 품지 말아 주십시오!』

아라헬과 마몬이 애원했다.

다섯 피조물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다만 이뤄지지 못할 소망이었다.

“너희들 다섯에게 ‘호르’라는 이름을 주겠다. 호르교를 위한, 모두를 위한 빛이 되어라. 선하게 살아온 자들을 위해 천국을 가꿔라. 더 이상 신명을 거스르고자 발악하지 마라.”

리하르트는 기계처럼 선고에 선고만을 더했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없노라 단언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호르시여!]

[당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에게도 어둠을 주십시오.]

[용사, 알버트. 앞으로도 당신 곁에서…….]

리하르트가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검, 악연 속 용사였다.

“너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로써 끝이 났구나. 수고 많았다. 천국에서 푹 쉬어라.”

콰득.

리하르트가 땅에 악연을 박아 넣었다.

충직한 용사의 음성이 점차 멀어져 갔다.

“…….”

잠시 숨을 고르던 리하르트는 손끝을 몇 번인가 말아 쥐었다.

뒤쪽에서부터 날아드는 동료들의 시선이 마치 날붙이처럼 아팠다.

몸을 돌려 그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까맣게 죽어 가는 얼굴을 동료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리하르트는 뒤를 돌아야만 했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넘치도록 많았다.

그가 몸을 돌렸다.

동료들이 보였다.

세상의 안녕을 위해 들고 일어선 호르의 군단이 보였다.

드디어 평화가 도래했건만, 그들은 하나같이 딱딱히 굳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내 몰골이 그리 엉망인가 보군.

제 얼굴을 더듬어 본 리하르트가 애써 웃었다.

“리하르트,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지옥이라니, 어둠이라니! 성자인 네가 그렇게 될 리 없잖아!”

연유를 알지 못해 쌓아 두기만 했던 불안감이 끝내 터져 버린 걸까.

버럭 외치는 모리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에겐 그들의 불안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느껴졌다.

더불어 불안이 그저 불안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 또한.

“미안하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의 첫마디는 사죄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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