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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96화 (196/216)

196화. Episode. 61 마왕, 스켈레라투스 (2)

“큭!”

나는 검자루를 꽉 말아 쥐었다.

잿빛이었던 혼돈의 색이 점점 더 까맣게 물들어 갔다.

칼고스가 마왕으로부터 빼앗은 마기의 총량이, 혼돈의 균형을 어둠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우웅.

검신이 연신 떨렸다.

칼고스가 미처 삼켜 내지 못한 어둠이 나에게 흘러 들어왔다.

그 어둠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고작 살과 근육을 이루던 마기를 빼앗았을 뿐인데, 며칠간 내리 폭식이라도 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 그워어어……!

그런데 마왕에게서 느껴지는 흉악한 기운은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끔찍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쾅! 쾅!

뼈 드러난 놈의 주먹이 연신 땅을 내리쳤다.

제 왕좌랍시고 소중히 여기던 주변 일대가 쩍쩍 갈라졌다.

쯧, 이성을 잃은 건가.

나는 놈의 흉골에 틀어박힌 검을 빼내곤 뼈를 박차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 전부 아버지가……! 아버지가 저희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마왕이 절규 어린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히면 그대로 끝이다.

당장에 불러낸 별에 올라타 놈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래서, 고작 열등감에 인간들을 그리 죽여 댄 것이냐?”

날 때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 마왕은, 제 마음을 감추던 속내마저 밖으로 드러낸 듯했다.

별의 고도를 높이며 놈을 노려보았다.

살도, 근육도, 그리고 빛을 품을 수 있는 영혼조차 타고나지 못한 마왕.

놈에게 마계는, 형제들은 자신의 뒤틀림을 위로해 줄 위안거리였을 터다.

이곳의 모두는 빛을 품을 수 없었고.

이곳의 모두는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비정상이 만연한 세계에선 그들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내가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였을 때, 그 세상이 밝게 빛났을 때, 저들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에선 모두가 빛을 품을 수 있었다.

그들은 살과 근육이 있었고, 기쁨을 비롯한 다채로운 감정을 온전하게 갖고 있었다.

그때부터 마계의 피조물들은 자신의 비정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인정하지. 너와 네 형제들을 만든 건 나다. 그리고 너희들은 태초부터 뒤틀려 태어났다.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을 터다.”

꽤 충격적이었겠지.

자신들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들과는 달리 온전한 생명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사실이.

그 끔찍한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진심으로 슬퍼했을 저들의 감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묻겠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저들이 벌인 수많은 살생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상인 자들을 모조리 죽이면, 너희의 뒤틀림이 온전한 것으로 여겨질 것 같더냐. 인간들로부터 나를 되찾아오면, 너희들이 더 우월한 존재들처럼 느껴질 것 같더냐.”

질투, 증오, 자신들이 품지 못하는 빛을 향한 집착.

그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저쪽의 세계를 침공했다.

이건 저들이 나로부터 이어받은 죄였다.

쿠웅.

놈이 손으로 땅을 짚었다.

서서히 숙여지는 척추, 놈의 텅 빈 눈이 내게 가까워졌다.

- 재미 없는 대화입니다. 재미 없어. 나는 이런 대화를 바란 게 아니야.

마치 잘못이 까발려진 어린아이처럼, 놈은 화제를 돌리고자 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전장엔 화제를 돌릴 거리가 넘쳐 났다.

마왕의 시선이 저 멀리 부유하고 있는 세 척의 방주를 향했다.

송곳니 빼곡한 턱 뼈 주변에 마기가 넘실거렸다.

마치 브레스라도 쏘아 보낼 듯한 모양새에, 나는 서둘러 그 앞을 막아섰다.

“빌어먹을 놈.”

저 끔찍한 화풀이가 내 동료들을 향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일념 하나로 나는 눈앞을 가득 채운 새까만 마기 앞에 검을 휘둘렀다.

◈          ◈          ◈

『크흐으…….』

까맣게 물든 존재가 비틀거렸다.

날카롭게 베인 가슴팍은 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저 사특한 기운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형님.”

지크의 눈이 슬픈 빛을 품었다.

거칠게 짓씹은 입술에 선혈이 흘렀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하인리히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그에게 루드비히가 충고했다.

퍽 냉담하게 들릴 어조.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루드비히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참담한 기색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리하르트로부터 전해들은 장남의 최후.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서 끝을 맞이했다는 소리에 그는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진실은 잔혹했다.

영웅으로 죽었어야 할 하인리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모습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카악!』

그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일찍이 검황의 재림이라 불리었던 천재의 검격이 연달아 펼쳐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인리히의 시간은 수 년간 멈춰 있었고, 그 웅혼한 영혼마저 빛바래고 말았다.

상대를 베고 말겠다는 참격의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에게 남은 건 마기에 이끌린 광기와 분노뿐이었다.

카강!

그의 검격은 닿지 못했다.

“……아버지.”

교차한 검 너머, 형님을 바라보던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루드비히가 있었다.

손에 쥐어진 명검에선 리하르트가 전해 준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은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검(劍).”

오직 바텐베르크의 가주에게만 허락된 검황의 검술.

지크와 루드비히는 그 검술로 끝내는 것이 하인리히에 대한 예우라 여겼다.

이내 루드비히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선을 그었다.

서걱-

일순 세상이 둘로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직후, 연신 괴성을 흘리던 하인리히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타닥타닥-

루드비히의 검에 붙어 있던 빛이 어느 샌가 하인리히의 육신에 옮겨 갔다.

꼭 장작을 태우는 불처럼, 빛은 하인리히를 검게 물들였던 부정한 기운을 불태웠다.

“잠들거라.”

“……편히 쉬십시오, 형님.”

두 사내가 조용히 묵념을 올렸다.

찢어질 듯한 가슴은 애써 추슬렀다.

비탄에 잠기기엔 아직 일렀으니까.

그때 일단의 무리가 1군단의 마물들 사이를 뚫고 다가왔다.

“그리 멀뚱히 서 있을 때가 아니다. 장남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루드비히.”

발락과 모리츠, 그리고 아론과 기드였다.

그들의 시선이 저쪽, 가장 치열한 전장을 향했다.

쾅! 콰광!

마왕과 리하르트의 격전이 쉴 틈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추악한 모습으로 공격을 퍼붓는 마왕 앞의 리하르트는 무척 위태롭게만 보였다.

“성자님만 위험을 감수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마수들을 막고 있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아버지, 지크 형님! 어서 저희가 리하르트를 도와야만 합니다.”

아론과 모리츠가 각오 어린 얼굴로 외쳤다.

그 모습에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복수를 시작할 때였다.

◈          ◈          ◈

속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뒤집어졌다.

놈의 공격에 검을 가져다 댈 때마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퉤.”

피 섞인 침에 새까만 저것은, 악연을 타고 내 몸에 흘러 들어온 마기일 테지.

성자의 육신에 흘러 들어온 마기는 착실하게도 움직임을 방해했다.

『버틸 수 있으시겠습니까.』

『왕의 마기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습니다만.』

겨우 균형을 맞춘 잿빛 검날 너머, 칼고스가 말을 걸어왔다.

“못 버티면, 안 돼도 버텨야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가는 몸이 여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 결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내게 당면한 과제는 눈앞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깟 마기 따윈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쾅! 콰앙!

어둠이 넘실거리는 주먹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나는 피하지 않고 마주 검을 휘둘렀다.

“쿨럭!”

온몸을 질주하는 강렬한 충격에 피를 왈칵 토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악연의 검날이 마왕의 주먹에 어린 마기를 포식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채 소화하지 못한 마기가 검 자루를 타고 흘렀다.

세상이 빙빙 돈다. 끔찍한 감각이 끊이질 않고 나를 괴롭혔다.

마왕의 손톱만한 영혼 조각을 몸으로 받아들였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호르시여…… 부디 저를 이용해 주십시오.]

[대체 무슨 연유로 마기를 흡수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알버트는 대업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용사가 말했다.

조금씩 더럽혀져 가는 신을 보는 게 퍽 괴로웠나 보다.

골을 울리는 알버트의 음성은 처절했다.

“희생이라. 그래, 용사인 너라면 기꺼이 하겠지.”

카드득-

온 힘을 다해 검을 들어 올렸다.

폭삭 무너진 하늘처럼 나를 짓누르던 마왕의 주먹이 조금씩 들렸다.

“그렇다면, 신인 나도 못할 게 뭐가 있겠냐.”

후읍.

숨을 들이켰다.

잔뜩 팽창한 근육이 검을 크게 떨쳐 냈다.

다시 주먹이 짓쳐 들기 전에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 끄흐, 끄흐흐…….

- 닿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닿고 있습니다.

마왕은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웃음을 터트렸다.

제 주먹에 들러붙은 잿빛의 기운을 황홀한 듯 내려다보았다.

- 빛도 어두워질 수가 있군요.

- 이 회색의 빛이라면 저도 닿을 수가 있는 것이군요.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검을 다잡았다.

“본래는 존재할 수 없는 빛이다. 헛되이 탐내다간 그나마 있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회색이라는, 모두가 타협할 수 있는 색이 자연히 존재했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잿빛은 너무도 불안정했다.

각각의 ‘역할’이 있는 빛과 어둠을 억지로 뒤섞어 버린 색.

그건 내 육신으로도 도저히 다룰 수가 없어 검 속의 영혼들을 빌어 사용하는 힘이었다.

-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 제가 아버지의 영혼을 삼켜 버리면…….

끄흐.

역겨운 웃음이 들렸다.

- 회색이 될지.

- 진정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될지.

헛소리를.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익숙한 기운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리하르트!”

벌써 하인리히에게 안식을 가져다 준 것인지, 루드비히와 지크를 비롯한 사내들이 내 옆에 다가와 섰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혼자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론이 걱정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이쯤이야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지.”

나는 손을 흥건히 적신 땀을 문질러 닦으며 허세를 부렸다.

아무튼 간에 2차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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