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Episode. 60 진군 (3)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검황의 후손인 바텐베르크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어쩌면 검황의 재림일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던 자였다.
하인리히 바텐베르크.
열 살에 오러를 엮고, 열다섯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세기의 천재.
성정 또한 의롭고 대범하여 다른 자들의 위에 군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모두가 입을 모아 차기 가주는 하인리히의 것이라 칭송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임무 도중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유망주를 잃어버린 바텐베르크는 눈에 불을 켜고 장남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임무를 떠났던 지역은 물론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여 북대륙을 이 잡듯 뒤졌으나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곳은 남대륙뿐이었고, 남대륙의 지배자는 바텐베르크가 제 땅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만큼 너그러운 자가 아니었다.
그 무렵 북대륙에서는 사라진 하인리히를 두고 그가 마르크스에게 암살 혹은 납치를 당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피의 5년이었다.
그 5년 동안 바텐베르크와 마르크스, 북대륙과 남대륙의 전쟁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해가 갈수록 대륙을 반으로 가른 골이 더더욱 깊어졌다.
그만큼 반복되는 헛된 전쟁의 피해자들이 늘어났다.
그건 결코 하인리히가 바란 것이 아니었을 텐데.
“…….”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바텐베르크의 사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하인리히라는 영웅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 ◈ ◈
그것은 연속된 우연과 같았다.
대륙의 최북단, 드높은 설산 속에서 숨죽여 살아가던 마물들이 민가로 내려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도.
놈들을 토벌해 달라는 부탁을 바텐베르크가 받아들인 것도.
그 임무를 하인리히가 하달받은 것도 모두 우연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연이 계속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 부르는 것이 더 알맞았다.
하인리히는 자신이 운명에 이끌렸다고 믿었다.
“왜 마물들이 제 터전을 버리고 내려오나 했더니.”
그의 시선이 설산의 정상을 향했다.
본래 눈 덮여 새하얘야 할 터인 산의 정상이 이상하리만치 새까맸다.
- 우으…….
눈보라 치는 소리만 울려야 할 그곳에 끔찍한 괴물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무도 모르게 설산을 조금씩 먹어치우던 어둠을, 그가 목도하고 만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위기감이 엄습했다.
경각심이 미친 듯 종을 울리고, 추위에 얼어붙은 손끝은 잘게 떨려 왔다.
세간에 검황의 재림이라 불리우던 그 소년은, 차디찬 설산 속에서 겁에 질려 버렸다.
“……젠장, 이건 내 임무가 아닌데.”
저들에게 허락된 영역을 벗어난 마물들은 모조리 처리한 뒤였다.
돌아가서 이 일을 보고해야 할까, 아니면 당장 저 어둠에 대해 알아볼까.
하인리히의 눈가에 갈등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으니, 그에게 두려움이란 언제든지 벗어 낼 수 있는 허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쿠드득.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넘치는 어둠이 그 결단을 부추겼다.
검을 쥔 하인리히가 어둠 앞에 다가갔다.
까맣게 물든 정상의 한가운데, 허공에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어둠은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구멍이 다름 아닌 ‘균열’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였지만, 단 한가지만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걷잡을 수가 없었겠구나.”
구멍 너머의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건 능히 세상 하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재앙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이라면 구멍을 메꿀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콰아아-
‘균열’에 다가가면 갈수록 발작하듯 거세게 뿜어지는 어둠이 그 증거였다.
“큭……!”
이가 딱딱 부딪쳤다.
심장이 터질듯 두방망이질을 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떨리는 다리를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네놈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것 같군.”
부릅뜬 눈으론 괴물을 노려보았다.
괴물 또한 그 끔찍한 눈을 부라리며 하인리히에게 어둠을 쏟아 냈다.
“미안하지만 나는 밀어낼수록 끌리는 타입이라.”
짐짓 너스레를 떤 그가 마침내 ‘균열’앞에 섰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격은 통하지 않았다.
마나로도, 오러로도 ‘균열’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하인리히는 문득 뒤를 돌아 눈 쌓인 산맥의 절경을 바라보았다.
저 하얀 눈들이 까맣게 물들기 전에, 산맥 아래 땅마저 까맣게 물들기 전에.
이 세상을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 끔찍한 괴물은 지금처럼 분단된 대륙이 어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이 상황이 운명에 이끌린 것이라면, 언젠가는 이 괴물을 쓰러트릴 운명의 용사들도 나타나리라.
“뭐, 훗날 용사들의 영웅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떨리는 입매를 끌어올린 하인리히가 이내 구멍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 우으으……!!
발작하며 포효를 지르는 괴물의 반응과, 흩어질 듯 일렁이는 구멍이 하인리히에게 확신을 주었다.
척 보기에도 아직은 불완전한 구멍,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했다.
구멍 속을 파고 들어간 손으로부터 거대한 인력이 느껴졌다.
하인리히의 몸이 순식간에 전부 빨려 들어갔다.
파스스…….
그를 집어삼킨 구멍이 점차 크기를 줄였다.
마왕이 심혈을 기울여 넓히던 균열은 그렇게 허무히 사라지고 말았다.
- 너어, 너어어……!!
분노한 마왕의 절규가 설산에 아스라이 울렸다.
그 절규를 끝으로, 은밀하게 세상을 잠식하던 암운이 잠시나마 뒤로 미뤄졌다.
◈ ◈ ◈
긴 이야기를 끝내고 침으로 목을 축였다.
적막이 맴돌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들이 속으로 지르는 비명 같은 절규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것이…… 정말 진실이더냐.”
한참 만에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처음엔 확신이 없었다.
이곳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달리 신을 잊어버린 세계였다.
리하르트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오며 수많은 변수를 보았다.
그래서 어쩌면 하인리히 또한 내가 본 것과는 다른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았을까 희망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이 세상은, 호르에 관련된 부분이나 내가 직접 관여한 일이 아니라면 그 어떤 변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과거라면 더욱더.
“아, 아직 모르는 거잖아! 어쩌면 아직도 이곳에서……!”
불현듯 터져 나온 모리츠의 음성이 뒤로 갈수록 물기에 젖어 들었다.
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저 멀리 어둠 들끓는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인리히가 없앤 구멍은 마왕이 억지로 뚫어 낸 균열이었다.
어떠한 사전 준비도 없이, 오직 힘만으로 균열을 뚫어 내기 위해선 아무리 마왕이라도 굉장한 부담을 떠안아야 했을 터.
그만큼의 대업을 방해한 하인리히를 마왕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는 영웅이야. 우리가 놈들에게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전부 그의 희생 덕이다.”
입맛이 썼다.
리하르트가 되기 전의 나는 그 광경을, 세상의 모든 것을 쭉 지켜보았다.
그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형님께선 홀로 세상을 구하셨구나.”
지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안에 처절한 감정이 사무쳤다.
하지만 내 예상처럼 길길이 날뛰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외의 모습에, 오랜 시간 하인리히를 찾아다녔던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
지크와 루드비히의 눈엔 차가운 귀화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심장은 뜨겁게 분노를 터트리되, 이성은 더욱 날카롭게 번뜩이는.
“걱정 마, 리하르트. 멋대로 뛰쳐나가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너도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제라도 알려 줘서 고맙다.”
“그저 마왕을 쓰러트려야 할 이유가 늘었을 뿐이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군단 내에 혼돈을 야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진정한 기사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자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슬슬 다시 출발하죠.”
가슴속에 화를 담아 두면 제 몸을 불태우기 마련이다.
이 미련한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불타 쓰러지기 전에 화재를 진압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건 마왕의 피와 목이면 충분했다.
◈ ◈ ◈
- 우으.
온다.
오고 있다.
지평선에 눈을 고정한 마왕은 달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몰아쉬는 숨결에 지독스런 집착이 묻어났다.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아.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던가.
그는 제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애타는 가슴을 애써 다독였다.
어둠만 가득하던 저 지평선이 조금씩 밝아져 오기 시작했다.
마치 새벽녘의 어스름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수천 년 동안이나 찾아볼 수 없던 신의 광휘가 저편에서 찬란히 반짝였다.
왕좌를 깔고 앉은 엉덩이가 절로 들썩인다.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한 줌 남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렇게나 기념비적인 순간,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맞이하고 싶었다.
- 빨리 와. 빨리, 빨리, 빨리!
쾅! 쾅! 쾅!
땅을 내리치며 달아오른 몸을 삭였다.
두터운 땅이 수십 번 울음을 터트릴 때쯤, 거대한 세 척의 배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콰과광!
동시에 배가 벼락같이 공격을 쏘아 보냈다.
철구가 마왕의 몸을 두드려 댔다.
따끔한 통증.
빛을 머금은 구슬에 닿은 피부가 그을렸다.
끄흐흐…….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의 빛을 담은 고철덩어리들을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왕은 제 몸에 부딪치고 떨어진 구슬들을 집어, 입에 넣고 굴렸다.
불덩어리를 머금은 듯 입안이 전부 데였다.
마왕에겐 그 통증마저도 기뻤다.
- 기다렸잖아요. 나 여기서 기다렸어. 여기가 어딘지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빛을 태운 배는 시끄러운 함성과 웬 노래만을 부르짖고 있었다.
날아갈 것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이 중요한 순간을 하찮은 벌레들이 훼방을 놓다니.
천 번을 씹어 삼켜도 모자랐다.
꾸득꾸득.
마왕의 비대한 육신을 뚫고 괴물 수천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배설이라도 하듯, 어두운 세계의 왕은 그렇게 제 권속들을 잉태했다.
“저놈들이 1군단이다! 적들을 우선하여 처치한다!”
찬란히 빛나는 음성이 전장을 울렸다.
그 음성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함께 배에 오른 인간들을 다독여 주었다.
그가 흩뿌린 빛에 인간들이 다시금 함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던 마왕은 심사가 한 움큼 뒤틀리고 말았다.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왜 이런 순간에도 저 인간들만 돌아보는지.
어째서 저들만 빛을 누릴 수 있는지.
마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질투가 났고,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레 속이 울렁거렸다.
마왕은 토기를 참지 않고 속을 게워 냈다.
『끄어어…….』
바닥을 적신 불결한 액체 사이, 한 인형이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건 마왕이 제법 잘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었다.
그 ‘장난감’이 모습을 드러낸 직후, 전장의 공기가 얼어붙고 말았다.
시끄럽게도 몇몇 벌레가 절규를 터트렸다.
다만 마왕의 관심사는 단 하나뿐이었다.
- 드디어 저를 바라보시는군요. 나를 봐. 나를 보고 있어!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리하르트.
그에게서 빛이 휘몰아쳤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폭풍처럼 거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