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Episode. 60 진군 (1)
파지직-
채 사라지지 않은 새하얀 뇌기가 검게 죽은 땅을 간질였다.
그 위에 살아 있는 마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웅크린 모습 그대로, 고통에 허덕이는 모습 그대로 놈들은 회색 가루가 되어 바람결에 흩날렸다.
나는 방주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죄 검은 것만 가득하던 땅에 눈처럼 쌓인 잿더미의 향연은 마치 혼돈을 가리키는 듯했다.
“갑시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놀란 마음이야 이해는 하지만 멍하니 넋 놓고 있기엔 마계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 가야지.”
한차례 침을 삼킨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뿌우우-
진군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렸다.
깔끔히 정리 된 균열의 일대를 뒤로하고 세 척의 방주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 번개가 호르의 힘인가……!”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 많던 괴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졌어.”
귓가에 경악 어린 음성들이 파고들었다.
천벌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저 만치 멀어지는 잿더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과 감탄, 그리고 경외.
갖가지 표정이 그들의 얼굴에 어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일으킨 천재지변의 광경을 보며 뿌듯해할 새가 없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다섯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성급하고 폭급한 괴물, 마왕.
놈의 기운은 줄곧 한 점에 멈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상했다.
신격을 드러냈음에도, 천벌까지 사용했음에도 그 마기가 거칠게 일렁일지언정, 자리를 벗어나진 않았다.
내 기운을 느끼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어 댈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설마 내가 제 놈이 있는 곳까지 당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말도 안 되지.’
마왕은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나는 흑색 빼곡한 세상을 노려보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놈이 정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든 아니든, 사실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전쟁의 결말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
“전투 준비.”
나직이 중얼거리며 검을 쥐었다.
방주 아래, 어느새 빛에 이끌려 온 마수들이 흉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 ◈ ◈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 횟수가 더해질수록 군단은 지쳐 갔다.
쉴 틈 없이 몰려오는 적들, 폐를 썩힐 듯 악취 가득한 마계의 공기.
아론은 이를 두고 마치 이 세상 전체가 우리를 둘러싸고 적대감을 보이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마계는 어둡지 않은 자가 있을 곳이 못되었다.
“리하르트, 조금이라도 쉬지 그러냐.”
거듭된 전투에 지친 군단을 위해 온몸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데, 모리츠가 다가와 우려 짙은 눈빛을 보내 왔다.
“정작 필요할 때 힘을 쓰지 못하면 도루묵이잖아. 이 정도 어둠은 우리도 버틸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우직한 얼굴로 말하는 모리츠가 대견해 보였다.
처음 봤을땐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전형적인 양아치로만 보였던 그가 언제 이리 성장했나 싶을 지경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나도 몸상태 봐가면서 나서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하여간 똥고집은.”
쯧쯧, 혀를 찬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익숙한 면면들을 살폈다.
아론과 기드부터 시작하여 나와 연을 맺은 자들이 눈을 맞춰왔다.
누구는 씨익 웃고, 또 누구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고.
세상은 이다지도 어두운데 저들은 눈부시게 밝았다.
나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 밝음이 쭉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나 없이도.’
마계가 나 없이 스스로 자생하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실패하여 재앙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내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했다.
문득 쓴웃음이 지어졌다.
머릿속엔 아델의 원망 섞인 음성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보고 잔인하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끝을 고하기가 두려워 연신 미루고만 있는 내 작태가 너무나 비겁하다고 말했다.
어느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그래서 나에겐 지옥이 어울렸다.
◈ ◈ ◈
“성자님께서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아론이 툭 내뱉었다.
“짊어지고 계신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만큼 우리가 성자님의 부담을 덜어 드려야지.”
“저희를 조금쯤은 의지하셔도 좋을 텐데…….”
“원체 속을 드러내시지 않는 분이지 않느냐.”
기드가 끌끌 웃으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잠시 리하르트를 향했던 인자한 시선이 제 손자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걱정 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손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름진 입가를 뚫고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억나느냐. 이 할아비가 저분의 집사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넌 아주 역정을 냈지.”
왜 일평생의 업을 그만두고 망나니의 수발이나 들려고 하느냐고.
당시 코흘리개였던 아론은 소중한 사람을 빼앗긴 것처럼 며칠을 금식에 들기도 했었다.
그 철없던 시절이 속속 떠오른 아론이 잘생긴 얼굴을 와락 붉혔다.
“케케묵은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십니까. 그 당시엔 성자님의 진면목을 몰랐지 않았습니까.”
“흐, 고얀 놈. 그러고 보니 이 일은 성자님도 모르고 계실 테지. 전쟁이 끝나면 고해 바쳐야겠구나.”
“커흠! 정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유치한 잡담을 나누던 둘이 동시에 창을 쥐었다.
사방을 둘러싼 악취가 점차 짙어진다.
싸늘한 한기 섞인 어둠이 더욱 차게 식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던 전투가 다시 시작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한데, 이번 싸움은 조금 더 고달플 듯했다.
『네놈들의 머리를 으깨어 왕께 바치겠다.』
『실추된 5군단의 명예를 위해.』
웬만한 성체보다도 거대한 괴물이 수천의 괴물을 이끌고 방주 앞을 가로막았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마기하며, 흉신악살처럼 흉흉한 기세하며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게 없었다.
“5군단이라. 그럼 네놈이 마몬의 직속 부하로군.”
리하르트가 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방주와 놈의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답지 않게 사명감 투철한 마족의 눈이 리하르트를 오롯이 노려보았다.
『이미 모든 군단이 네놈들을 향해 진군하고 있음이니, 아직도 같잖은 희망 따위를 지니고 있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말이 많구나.
리하르트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네놈이 말한 군단들의 군단장을 모조리 숙청한 게 우리다. 군단장 없는 군단을 대체 누가 두려워하더냐.”
물론 그 중엔 너희 5군단도 포함되어 있다고, 비소 가득한 음성이 적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살의가 들끓고 괴성과 포효가 뒤섞여 터졌다.
짤막한 몇 마디 말에 수천의 마수와 마족이 광분하여 달려들었다.
“전원! 방주의 속력을 높인다! 싸우지 말고 돌파해!”
한데 정작 적들을 도발한 리하르트는 싸움이 아닌 도망을 명했다.
“리하르트! 무슨 생각이야?”
좌측의 방주에서 알리사가 외쳤다.
그런 와중에도 세 척의 방주는 마나를 듬뿍 머금고선 속력을 한껏 높였다.
『이 세계에 네놈들이 살아 숨 쉴 곳은 없다!』
군단장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듯 보이는 거대한 괴물이 팔을 뻗었다.
송곳처럼 곳곳에 튀어나온 뼈가 금방이라도 방주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다섯 피조물도 아닌 마족 따위가.”
리하르트가 별을 꺼냈다.
여덟 자루까지 갈 것도 없었다.
놈의 공격을 흘리는 데엔 네 자루면 충분했다.
카드드득.
별에 가로막힌 뼈가 비명을 지른다.
사방에 뼛조각이 비산했다.
그리고 그땐 이미 전속력에 도달한 방주가 놈을 스쳐 지나간 뒤였다.
“크에에엑!”
5군단의 마수들이 고개를 치켜들곤 괴성을 질러 댔다.
그러다 괴물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혔다.
『같잖은 발버둥을 치는구나!』
괴물이 마치 돌팔매질이라도 하듯, 멀어지는 방주를 향해 마수들을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퍽, 퍼걱.
방주의 후미를 강타한 마수 몇이 펑펑 터져 나갔다.
하지만 명장들이 혼을 다해 만든 방주는 그리 쉽게 망가지지 않았다.
괴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따라와 봐.”
신격 담긴 음성을 들은 귀에선 핏물이 흘렀다.
그리고 가슴엔 천불이 치솟았다.
『크아아악!』
괴물이 발광을 하며 땅을 박찼다.
쿵, 쿵, 쿵.
허공을 빠르게 나아가는 방주와 그 뒤를 쫓는 주인 잃은 군단.
놈들을 뒤돌아본 리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군.”
거대한 발이 달음박질을 할 때마다 마수들이 서로 뒤엉켜 엎어졌다.
군단장 대신을 자처한 괴물은 군단을 돌아보지 않고, 같잖은 도발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군단이 아니라 들짐승 무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다른 녀석들까지 가세하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일 텐데.”
모리츠의 물음에 리하르트가 턱짓으로 저 앞을 가리켰다.
까맣게 죽은 대지의 끝, 황량한 절벽 아래 붉은 바다가 펼쳐진 채였다.
“바다……?”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 정도로 붉디붉은 바다.
그것은 버림받은 거인이 흘려보낸 피눈물이었고.
원한과 비탄이 고여 응어리진 절망이었다.
『크하하!』
『대지가 없는 곳이라면 네놈들이 유리할 것 같더냐!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군!』
괴물의 광폭한 외침이 우렁우렁 터져 나왔다.
“인정하긴 싫지만 말이야. 아무리 봐도 저 바다도 안전해 보이진 않거든? 당장이라도 괴물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모리츠가 질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피바다의 수면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그래서 더욱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맞아. 저 안에도 괴물들이 있지.”
마침내 방주가 피바다의 상공에 당도했을 때, 리하르트는 악연을 쥐어 들었다.
부글부글.
어찌 된 일인지 여태 잠잠하기만 하던 바다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대기.”
리하르트가 별을 타고 방주에서 떨어져 내렸다.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동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는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역수로 쥔 악연을 바다의 수면에 찔러 넣었다.
“깨어나라. 너희들의 군단장이 돌아왔다.”
빛은 꽁꽁 숨겼다.
성자로서 뿜어내던 광휘도, 악연의 어둠을 억누르던 신앙도 모두 숨겼다.
피바다에 잠긴 악연의 검날엔 어둠만이 가득했다.
파도가 휘몰아쳤다.
거칠게 파도치는 수면을 뚫고 역병 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눈물로부터 탄생한, 칼고스만을 위한 권속.
그들은 그 자체로 군단이었다.
“적을 섬멸해라.”
군단장을 사칭한 리하르트가 말했다.
역병 괴물들에겐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자신을 깨운 군단장의 마기를 맹신했다.
“크라아악!”
피바다를 뒤덮은 역병 괴물들이 절벽을 기어 올랐다.
갑작스레 성사된 5군단과 3군단의 전투.
5군단의 괴물이 당혹성 짙은 괴성을 질러 댔다.
“이런 상황을 예상 못했다면 실망인데, 칼고스.”
리하르트는 연신 떨리는 악연의 검신을 내려다보았다.
까맣게 물든 날 속, 붉은 거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시려나 했더니.』
『제 권속들을 이용하려 하신 겁니까.』
3군단의 주인, 붉은 역병 거인의 노기 어린 음성이 검 자루를 타고 흘렀다.
“그럼 쭉 바다에 썩혀 둘까. 기다림이라는 고달픔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