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91화 (191/216)

191화. Episode. 59 울부짖는 (3)

마침내 아버지와의 사이를 단절해 왔던 증오스러운 벽이 무너졌다.

활짝 열린 균열 너머로 밝고 색이 풍부한 세계가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만찬을 앞둔 마수들이 광란의 춤을 추었다.

허기가 진 그들은 서로를 밀치며 균열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 우…….

마왕이 시선을 저 멀리 두었다.

균열의 근처에서 그립고 그리운 기운이 느껴졌다.

불같이 뜨겁고 하늘같이 드높은 그 기운은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다.

- 우으……!

버림받고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얼마나 많이 울고, 또 그리워하며 원망했던가.

그 영겁과도 같은 세월을 넘어 마침내 다시 아버지께서 마계에 강림하셨다.

마왕의 흉측한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분노인지 환희인지 모를 감정이 가슴을 뒤흔들었다.

가슴 속 불길이 격해질수록 마왕은 자신이 깔고 앉은 자리를 더욱 견고히 했다.

마계의 중심부이자 그가 태어난 곳, 그리고 그가 검은 것들의 왕이 되었던 자리.

마왕은 왕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고대하던 그였으나,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자그마한 욕심이 생기고 말았다.

저가 나고 자란 이곳에서 아버지를 맞이하고 싶다는 그런 욕심.

애착 깊은 곳에서 애증의 존재를 찢어발기는 상상을 하고 있노라니, 비뚤어진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하나 남은 형제가 성마르게 움직일 때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축제라도 벌이듯 아우성치는 마계를 보면서도 그는 자리를 지켰다.

어차피 자신들을 혐오하는 아버지라면,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란듯이 맞아떨어졌다.

문득, 왕은 베노모스를 떠올렸다.

들끓는 아버지의 기운 앞에 흉성을 터트리고 있을, 가엾은 형제.

그는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왕은 이번에도 자신의 예상이 맞으리라 생각했다.

베노모스의 분노는 그 어떤 것으로도 꺼트릴 수 없는 불꽃과 같아서,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나방처럼 달려들 것이 뻔했다.

죽은 형제들과 곧 죽을 형제를 떠올리니 가슴 한켠이 꽉, 조여졌다.

여전히 낯선 통증이었다.

◈          ◈          ◈

일검을 떨쳤다.

콰득.

용의 비늘이 깨어지고, 그 아래 시커먼 속살이 갈라졌다.

불결한 피가 왈칵 솟구치며 나를 덮쳐들었다.

나는 그 핏물을 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치이익-

빛으로 짜여진 오러는 결코 더럽혀지는 일이 없었으니.

“비늘은 제가 부수겠습니다. 상처를 노리십시오.”

연신 울부짖는 베노모스를 보다 루드비히와 발락에게 소리쳤다.

본능에 충실한 휴거에게는 독단적으로 움직일 것을 명했다.

그러던 와중, 마기 넘실거리는 꼬리가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흡사 새까만 해일이 덮쳐드는 듯한 위압감.

그 앞에 나는 검을 마주 휘둘렀다.

쾅!

꼬리와 검이 부딪쳤다.

비늘 수십 여개가 짓뭉개지며 온 사방에 핏물이 비산했다.

쾅! 쾅! 쾅!

여덟 개의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일격에 산도 무너트릴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쾅!

꼬리와 검이 수도없이 붙었다 떨어진다.

진즉에 걸레짝이 난 꼬리는 상처를 입을 수록 더욱 기세가 거세졌다.

공포는 스스로의 손발을 굳게 만든다.

반대로 분노는 고통을 차단시키고 맹목적인 살의를 부추긴다.

나를 눈 앞에 둔 베노모스는 그야말로 분노의 화신과도 같았다.

“흡!”

하얗게 타오르는 별들이 피투성이가 된 여덟 꼬리를 꿰뚫어 냈다.

덜컥, 잠시나마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왼쪽 몸통에 이르기까지.

비늘과 함께 살덩이가 거칠게 찢겨져 나갔다.

루드비히와 발락의 검이 그 상처를 더욱 파헤쳤다.

휴거가 굵은 땀을 흘리며 베노모스의 기다란 목을 등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시선은 여전히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광기 어린 눈알이 붉게 번들거린다.

그 눈빛 어디에도 제 몸에 달라붙은 이들을 떼어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성을 잃어 제대로 싸우지조차 못하는 거냐.”

일순 어이가 없어 홀로 중얼거렸다.

분노는 손발 대신 머리를 굳게 한다.

그래서 베노모스는 제 분노에 저 스스로가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격 높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하는 짓은 부나방에 불과한 어리석은 존재.

그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성가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있을 터.

여기서 놈과 노닥거릴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알버트, 칼고스. 거들어라."

악연을 치켜세웠다.

하얗게 명멸하는 칼날엔 고대의 용사가, 시커멓게 물든 칼날 속엔 붉은 거인이 있었다.

이내 그들의 경계가 뭉개지고 흐릿해졌다.

하얀 물감에 검은 색을 풀어놓듯, 검은 물감에 하얀 색을 풀어놓듯.

악연의 검신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다.

◈          ◈          ◈

쿵!

거체가 바닥에 몸을 뉘였다.

깨지고 갈라진 비늘 사이로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 ?? ?? ?…….』

처음의 그 지독한 기세는 온데간데 없는, 죽어가는 존재의 덧없는 울음소리.

변함없는 것은 오직 살의에 가득찬 눈뿐이었다.

“쯧, 끝까지 독한 놈이로다.”

발락이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이놈과 대체 무슨 관계냐며, 내게 시선을 보내 왔다.

이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려면 태초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 판이다.

나는 짐짓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앞으로 나섰다.

잔뜩 충혈되어 더욱 붉어진 놈의 눈이 나를 쫓았다.

“이젠 나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구나.”

그 눈에 피눈물이 재차 흘러내렸다.

『?? ?? ?? ?? ?……!!』

죄다 잘려 나간 꼬리는 나에게 닿지도 못했다.

찢겨진 날개는 몇차례 허우적거리다 축 늘어질 뿐이었다.

놈의 분노는 꺼질 줄을 모르는데, 육신을 움직일 힘은 이미 사그라들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내가 놈을 창조할 적에 염원했던 성정은 충직함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세계를 수호해줄 신수와도 같은 피조물을 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다시피 이 모양이었다.

나를 향해야 했을 충직함은, 방향을 비틀어 집착과 원망에 충성을 다했다.

“누구 하나 제대로 태어난 녀석들이 없었지.”

첫째는 나의 대리인이 되길 바랐다.

셋째는 지혜로운 지략가가 되기를 바랐고, 넷째와 다섯째는 형제들의 중재자가 되기를 바랐다.

내 힘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도 그들 스스로 자생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건 내 오판이었고 실수였다.

어둠 가득한 이 땅에서 내 바람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실수를 바로 잡으려다 나는 그만 질리고 말았다.

그렇게 포기했다.

그것이 내 죄였고, 다섯 피조물은 내 죄를 이어받았다.

“……이제 곧이다. 잘못된 것들이 바로잡히기까지.”

베노모스를 바라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잿빛 기운이 엉겨 붙은 악연의 끝이 놈을 가리켰다.

푹.

검 자루를 타고 파육의 감각이 질주했다.

끝의 끝까지 분노를 드러내던 베노모스의 눈이 빛을 잃었다.

놈의 영혼과 마기가 악연을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하르트. 너는 대체……."

발락의 음성이 귀를 파고 들었다.

무언가 미심쩍은 것을 바라보듯, 잘게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시선을 돌려 루드비히를 보았다.

그 또한 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의구심이 확신이 되기까지도 얼마 안 남은 듯했다.

"취익, 대단한 인간 전사는 역시 대단하구려! 정말 무지막지하게 강해졌소!"

그나마 휴거만이 평소와 같은 기색이었다.

자칫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는데, 천진한 휴거의 음성이 내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서둘러 합류합시다. 가장 성가신 놈은 쓰러트렸지만 아직 다 끝난게 아니니.”

나는 뒷말을 듣지도 않은 채 땅을 박찼다.

쾅, 콰앙!

하늘 위에서 마법과 마공포를 쏟아붓는 세 척의 방주.

그 아래 득시글거리는 괴물들은 여전히 차고도 넘쳤다.

나는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몇 베어 내다 별을 타고 방주를 향해 날아갔다.

“리하르트, 다친 데는 없느냐?”

배에 오르기가 무섭게 알리사가 다가와 물었다.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이쪽 상태는 어떻습니까?”

“괴물들이 많아도 너무 많구나. 방주를 조종하는데도 적잖은 마나가 소모되는 판국에 병기와 마법까지 운용하려니 빠듯한 상황이다.”

미간을 찌푸리는 알리사의 얼굴이 조금 지친 기색을 띠었다.

이대로는 마계 초입에서부터 마법사들이 뻗을 거라고, 그녀가 우려를 표했다.

콰앙!

나는 고개를 돌려 전황을 살폈다.

확실히 많기는 많다.

저것들을 처리하려면 마법사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방주가 최강의 병기이기는 하지만 연비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기사들은 두었다 뭐 하느냐.”

언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인지 루드비히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기사와 오크들을 내려보내든, 군단을 아예 둘로 나누어 따로 진격을 하든, 얼른 결정해야 할 것 같구나.”

알리사가 루드비히의 말을 거들었다.

옆쪽의 방주에서 오크들이 왁왁 내려보내 달라 소리를 쳐 댔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알리사와 루드비히의 의견도 좋지만, 내게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방주의 결계를 최대치로 강화해 주십시오.”

“흐음. 묘수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녀가 각각의 방주에 명령을 전파했다.

배를 둘러싼 반투명한 막이 점차 그 색을 더해 갔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했다.

조금씩, 검은 구름이 늘어나 붉은 하늘을 가렸다.

붉고 검던 마계의 하늘이 온통 흑색으로만 가득 채워졌다.

“저건…….”

명색이 남쪽 성자라고, 앨런이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렸다.

흠칫 놀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본 그가 호르를 입에 담았다.

“신께서 직접 괴물들을 심판하고자 하신다!”

난데없는 앨런의 외침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신의 심판.

그것을 목격한 적이 있는 자들은 만면에 화색을 띠었고, 본 적이 없는 자들은 의문을 띄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두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검은 먹으로 덧칠한 듯한 하늘, 그 사이로 하얀 색이 섞여 들었다.

『천벌(天罰) - 발동.』

이전의 나였다면 한 번 사용한 것만으로도 지쳐 쓰러질 힘.

그러나 이젠 그것도 옛말이다.

상급에 오른 신격, 바다처럼 불어난 신앙, 초월에 가까워진 일신의 경지라면 능히 버틸 수 있었다.

꽈르릉-!!

거대한 번갯줄기가 지면을 수도없이 강타했다.

백색의 뇌전이 삿된 것들을 모두 찢어발겼다.

눈앞이 새하얗게 덧칠되며, 귀가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