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Episode. 58 호르의 군단 (5)
쩍, 쩌적-
생기 하나 없이 말라붙은 무언가를 밟아 으스러트리는 듯한, 건조하기 짝이 없는 파열음이 연신 울렸다.
그 소음은 하늘이 일으키고 있었다.
하늘 한가운데의 균열을 중심으로 나뭇가지처럼 쭉쭉 뻗어 나간 미세한 실금들.
수많은 사람들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 댔다.
저 위를 향해 쳐든 고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깊게도 떨구어졌다.
아연한 기색을 품은 눈빛은 공포에 짓눌린 자들의 그것이었다.
“아아…….”
북대륙과 남대륙의 일반인들은 이제야 진정 실감이 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오래토록 푸르렀던 하늘은 이제 그 빛깔마저 잃어, 더 이상 저들의 천장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 무너져 가는 천장 너머엔 지독한 괴물들이 득시글거린다는 것을.
『?? ?? ?? ?? ??-!!』
이따금 울려 퍼지는 괴물의 포효는 심약한 자들의 영혼을 뒤흔들었고.
그럴 때면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쾅쾅.
폭탄 터지는 듯한 굉음이 하늘을 수도 없이 때렸다.
아직은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건만, 균열 너머 괴물들이 어찌나 미쳐 날뛰는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질 지경이었다.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나의 중재자들아. 공포에 질린 이들에게 내 빛을 전해 다오.”
균열 너머까진 내 팔이 닿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땅만큼은 오롯이 감싸 안을 수 있었다.
천사들을 통해 흩뿌린 빛이 줄기줄기 퍼져 나갔다.
그 빛은 하늘의 치부를 가렸다.
나는 그렇게 만인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걷어 냈다.
닥쳐온 재앙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는 기적.
다만 그 작은 불씨만으로도 온 세상에 가득한 신앙심이 들불처럼 요동쳤다.
[명하신 대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새내기 왕, 휴거를 옆에서 거들어 주었던 천사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난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으로 이어 붙인 창공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래도 저 정도면 방주가 항해하기에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이제 곧이다.
호르의 군단을 태우고 적진으로 향할 범선이 바텐베르크의 영역 지척까지 다가온 채였다.
그들을 기다리며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을 찰나, 천사가 입을 열었다.
[호르시여.]
부르긴 불렀는데, 이어지는 뒷말이 없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의외였다.
늘 무표정하던 천사들이었을진대, 내 눈에 비친 그녀는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쉽사리 마주치지 못하는 눈과 연신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입술.
이제야 좀 살아 있는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머리를 털었다.
제 손으로 만든 주제에 이름 하나 지어 주지 않고 부려먹기만 하는 작자가 바로 나였다.
의도적으로 정을 주지 않고 있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잡념을 털어내곤 턱 짓으로 그녀를 채근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그 대답이라는 게 영 마뜩찮았지만.
◈ ◈ ◈
하루가 지나자 저 멀리 점만 한 무언가가 눈에 보였다.
꼭 나룻배를 커다랗게 확대한 듯한, 무척이나 수수한 세 척의 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오! 정말 배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레오가 눈을 반짝이며 콧김을 내뿜었다.
숙성된 호기심이라 해야 할지.
방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줄곧 상상의 나래를 펼쳐 왔던 그는 마침내 그것을 직접 본다는 사실에 꽤나 신이 난 듯했다.
제1기사단장의 위엄이니, 가주의 오른팔이니, 직책에 걸맞은 품격 따윈 개나 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레오 경, 제발 그 입 좀.”
지크가 레오의 옆구리를 푹 찔러 눈치를 주었다.
곧 세 척의 방주가 지척에 다다랐을 즈음.
이 땅의 주인, 루드비히가 본궁에서 걸어 나왔다.
척-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검 자루에 손을 올리곤 배를 향해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런 사내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는 루드비히의 걸음걸이가 마치 초식 동물들을 맞이하는 맹수처럼 여유로웠다.
그깟 마법사들 기천 명이 몰려와도 바텐베르크를 어찌할 수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
그의 자신감 덕에 배들은 아무런 제재 없이 이 땅에 정박할 수 있었다.
쿠궁-
무게가 무게인지라 조심스럽게 고도를 낮췄음에도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나는 루드비히 옆에 선 채로 흙먼지 너머를 훑어보았다.
배의 선두에 있으리라 생각한 알리사가 어째선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채 걷히지 않은 먼지를 뚫고 익숙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대 바텐베르크의 가주, 루드비히 바텐베르크 경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인사.
알리사의 목소리는 나와 루드비히로부터 딱 다섯 걸음 앞에서 들려왔다.
“나는 라플라스를 통치하고 있는 알리사 마르크스라고 하오.”
천연덕스레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그랜드의 경지인 내 감각을 순간적으로 벗어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였다.
인비저블(Invisible)과 블링크.
거기에 더불어 모종의 수법을 통해 마법의 기척을 지운 듯했으니, 루드비히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작정을 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시야를 제한하던 흙먼지가 바람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드러난 1개 군단의 마법사들, 그들이 어느새 알리사의 뒷편에 대열을 이루고 서 있었다.
“반갑군.”
루드비히가 한쪽 입매를 말아 올렸다.
예상외의 퍼포먼스가 썩 재미있다는 듯한, 사나운 웃음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척척 걸어 나와 마법사들과 대치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칼처럼 날이 섰다.
마법처럼 금방이라도 터질듯 일렁였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양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바텐베르크와 마르크스 간의 골은 제삼자가 메꿔 줄 수 있을 만큼 얄팍하지 않다.
다 같이 으쌰 으쌰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르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따윈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특히나 루드비히의 독불장군 같은 성격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뭔가를 기대하는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면 누가 이 연합의 총책임자인지 모두에게 각인시켜줄 생각이었다.
“이토록 믿음직스러운 기사들이라니. 꽤나 진보했다 자부하던 마갑병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구려. 그대들이라면 우리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소.”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온건주의적 성향이 짙은 알리사는 서로의 의가 상하지 않는 적당한 선을 잘 잡아챘다.
언행에 과격한 구석이 있는 앨런을 대열 뒷구석에 처박아 둔 것도 그녀의 혜안일 테지.
“어떻소, 루드비히 경. 같은 존재를 섬기는 자들로서 케케묵은 옛 불화는 잠시라도 접어 두는 게.”
알리사가 말갛게 웃으며 제안했다.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는 모양새가 꽤나 능청스러웠다.
먼저 화합의 손길을 내밀지만 결코 굽히고 들어가지는 않는, 그녀는 역시 훌륭한 통치자였다.
“허망히 사라진 줄 알았거늘.”
루드비히의 입가에 걸린 사나운 웃음이 순수한 즐거움에서 기인한 미소로 변모했다.
나로서도 몇 번 본 적 없는 그런 미소였다.
“제법 큰 불씨가 남아 있었군.”
내색은 안 했어도 그의 악연, 마르크스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것이 퍽 허무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알리사를 보며 저리도 기꺼워하지는 않았을 터다.
호오-
속으로 감탄을 주워 삼키고 있는데 알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찡긋.
그녀가 한쪽 눈을 깜빡였다.
흙먼지 한복판에 서 있더니만 먼지라도 들어간 모양이지.
멋쩍은 듯 웃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주고는 방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신병기! 끝내주는 신병기다아-!”
“하늘을 나는 배라, 아이디어가 샘솟는구나! 드디어 솜씨를 발휘할 때가 왔다!”
“이봐, 마법사들! 대장간 쪽으로 배를 옮겨 다오!”
배에 찰싹 달라붙은 난쟁이들이 괴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몸이 달아 팔짝거리며 뛰어대는, 털 숭숭 난 난쟁이들.
저 모습이 보기엔 썩 좋지 않지만, 저들의 손을 거친 배들은 그야말로 신병기로서 거듭나리라.
◈ ◈ ◈
신병기라는 미지의 물건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기회는 난쟁이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더 할 나위 없는 자극제였다.
족장 후르큼의 표정이 마치 ‘악연’을 제작할 때처럼 진중했다.
그의 전두지휘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난쟁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제작과 야장의 대가들이 방주의 용골에서 동력원을 조심스레 뜯어내곤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아델에게 겨우 얻은 세계수의 목재로 방주의 선체를 제작하고, 철포와 마공포 등의 갖가지 공성 병기를 탑재했다.
그저 나룻배에 불과하던 방주가 고작 하룻밤 새에 범선이 되었고, 그 다음 날엔 전대미문의 함선으로 변모해 버렸다.
다만 아직 작업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하루.
나머지 작업도 완벽히 끝내기 위해 부릅뜬 명장들의 눈에 핏발이 가닥가닥 섰다.
“드워프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과연 실제로 보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호로록-
고상한 동작으로 차를 홀짝거린 알리사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내 방에선 난쟁이들의 대장간이 아주 잘 보였다.
“제자야, 반지는 잘 받았단다. 덕분에 정말 마갑병처럼 일만 했단다.”
“……그 말씀만 벌써 열 번이나 하셨습니다.”
나는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시간에 맞춰 방주를 개발하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을 봐 가면서 개발하기엔 하늘의 균열은 너무도 성말랐다.
너를 위해서도 아닌, 나를 위해서도 아닌.
세상의 안녕을 위한 숭고한 노력을 우리는 ‘대의’라고 한다.
물론 알리사는 훌륭하게 대의를 완수했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부족하지 않은 값을 치러 주었다.
저 찬란하게 빛나는 지팡이가 그것이었다.
“스승님의 지팡이는 그 어떤 성유물보다 많은 빛을 품었습니다. 빛의 신도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자 알리사가 말없이 샐쭉 웃었다.
마법사들이 바텐베르크에 도착한 지 오늘로 이틀.
그녀는 요 이틀간 틈만 나면 내 방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우리 사이에 크게 의미 있는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알리사는 그저 나와 마주보고 앉아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제 내일이구나.”
“예. 오늘은 일찍 잠에 드십시오. 앞으로 한동안 못 잘 겁니다.”
힐끔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잔뜩 금이 간 하늘은 마치 거미줄이 쳐진 것 같았다.
- 우…….
어젯밤부턴 하늘에서 놈의 울음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마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애써 잠재웠던 만인의 공포가 전에 없이 강렬히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이쪽의 사기만 꺾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방주가 완성되는 대로 곧장 전장을 열어 젖히는 게 현명한 선택이리라.
그렇게 개전의 날로 정해진 것이 바로 내일이었다.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알리사가 방을 나섰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다 식은 차를 홀짝거렸다.
『두려우십니까.』
악연 속 거인이 하등 쓰잘머리 없는 말을 걸어왔다.
두렵다니, 대체 누가.
놈을 무시한 채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칼고스는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
고개를 돌려 거미줄 친 하늘을 바라보는데,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선 공포나 긴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 볼 수 없다.
멍청한 칼고스.
이게 두려워하는 걸로 보이는 건가.
속으로 한껏 이죽였다.
찻잔을 쥔 손끝이 떨리는 건 애써 못 본 척하며.
타이탄에 내렸던 계시의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속였다.
끝이 가까워져 옴을 정면으로 마주하기엔, 지금의 나는 너무도 인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