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Episode. 58 호르의 군단 (4)
“검성이라면…….”
잠시 말끝을 흐리던 휴거가 서서히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 시선이 떠듬떠듬 내 손등을 향했다.
“췩!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 거요?”
“달리 검성이라 불리는 게 있던가?”
“허어……”
휴거는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검성을 배워 볼 생각이 없냐는 말은, 내 제자가 되라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왕이 돼라 해서 왕이 되었건만 이제는 대뜸 제자가 되란다.
나 같아도 어이가 없었을 터다.
하지만 그에겐 갑작스러울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선 오랜 시간 고민하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문제였다.
“검성은 일인전승의 검술이라 들었소만, 어째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오?”
흔적을 남겨야 하니까.
내가 남길 수 있는 기사로서의 흔적, 그것은 곧 후대 양성이었다.
적어도 내 대에서 검성의 명맥이 끊기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너라면 검성의 자격 요건을 충족하고도 남을 것 같거든. 흔하지 않지, 그런 인재는. 그래서 대답은?”
“…….”
우리 사이에 전에 없던 정적이 나돌아 다녔다.
나를 바라보는 휴거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조급해 하지 마시오. 언젠가 훌륭한 제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나처럼 힘만 센 오크 같은 것보다도.”
그런가.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곡한 거절 앞에서 내가 달리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싫다는 녀석을 붙잡고 제자가 되어 달라 간청하는 것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취익, 대단한 인간 전사.”
그런 나를 타이탄의 군주가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는 오크치고는 꽤나 현기 짙은 눈을 하고 서 있었다.
“마지막을 준비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소?”
“…….”
“그대도 발락처럼 꼬부랑 할배가 되고 나서야 제자를 찾으란 뜻이오. 아직 우리는 살날이 많이 남았으니.”
“그래. 그러지.”
나는 이어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뜨겁고 진한 시선이 나를 쫓았다.
여전히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 ◈ ◈
“으어어…….”
알리사의 입에선 연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여지없이 손가락에 끼인 반지에서 빛이 일렁였다.
눈 밑에 드리운 피로가 지운 듯 사라진다.
안개 낀 듯 흐릿하던 정신이 점차 맑아졌다.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반지의 효용은 기분 나쁠 정도로 뛰어났다.
“드디어…….”
미간을 꾹꾹 누르던 알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거대한 배 한 척이 둥실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 어떤 장식이나 마도구도 탑재되어 있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배.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배를 움직이는 것이 마나 감응석으로 이루어진 동력원이라는 것이었다.
“파이란.”
“예.”
미리 대기하고 있던 파이란과 다수의 마법사들이 양 손을 펼쳐들곤 마나를 양껏 뿜어냈다.
우웅-
배의 선수에서부터 선미까지 이어지는 용골, 거기에 빼곡히 틀어박힌 동력원이 밝게 빛났다.
허공에 떠오른 배가 그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동을 벗어난 배는 부드럽게 방향을 선회하며 라플라스의 상공을 향해 뱃머리를 틀었다.
“오오!”
그 속도도, 조종에 소모되는 마나의 효율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적어도 ‘방주’의 동력원만큼은 더 건들 것도 없는 완성품이었다.
“후우…… 내가 기어코 해냈구나.”
배를 따라 밖으로 나선 알리사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신을 채근하던 리하르트를 향해 이를 박박 갈던 그녀였으나, 막상 개발을 끝내고 나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몰려왔다.
“전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로써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으신 겁니다.”
파이란이 다가와 그녀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러다 그가 은근한 어조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분께서도 무척 놀라워하시겠지요. 기대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무, 무슨!”
기분좋게 듣고 있던 알리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리하르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무심결에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내가 그 녀석 좋으라고 이 고생을 한 줄 아느냐! 이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선 것일 뿐이다!”
그 생경한 반응에 파이란은 그저 허허로이 웃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알리사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그녀가 밤낮 없이 연구한 동력원의 설계도였다.
“서둘러 두 척의 배를 더 띄워야한다. 이 설계도대로만 하면 문제는 없으리라.”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동력원 개발이 끝난 이상 이제부터는 다른 마법사들이 나설 차례였다.
라플라스에서도 명성 높은 마법사들이 ‘방주’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방주’는 아직 전쟁 병기라고 불리기엔 무리가 많았다.
그저 허공을 날기만 하는 배는 약점투성이에 불과했다.
“마도구도 아닌 것을 제작하는 건 마법사들의 특기가 아니지.”
그런 그들의 우려를 알리사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진짜 명장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그저 배만 띄울 수 있으면 될 뿐이라고.
그녀의 진두지휘하에 두 척의 배가 빠르게 만들어졌다.
그때, 하늘에선 불길한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늘을 항해하기에 퍽 좋은 날씨는 아니구나.”
“……배가 전복되지만 않기를 바라야겠습니다.”
마침내 다가온 출발 당일.
알리사의 중얼거림에 앨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로 저 부실해 보이는 배에 올라타도 되는지를 진지하게 고심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 누님이 설계한 작품이다. 뒤집어질 성싶더냐.”
“커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호언장담하는 제 누님에게 차마 못미덥다는 말은 못한 앨런이 애꿎은 헛기침만 해 댔다.
이내 그의 눈짓에 따라 한 켠에 도열해 있던 이단심판관들이 배 위에 우르르 올라섰다.
그들의 눈빛과 기세가 일전의 전장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직하고 강렬했다.
“호오, 앨런아. 너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닌가 보구나.”
그들을 보는 알리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번 전쟁엔 이단심판관들이 가장 큰 활약을 할 겁니다.”
누가 알리사의 동생 아니랄까 봐, 이번엔 앨런이 콧김을 내뿜으며 호언장담을 했다.
◈ ◈ ◈
1개 군단급의 마법사들이 세 척의 배에 나뉘어 올랐다.
그 중엔 라플라스에서 지내고 있던 마르를 비롯한 남쪽의 엘프들도 함께였다.
우우웅-
미리 추려 놓은 병력이 모두 배에 오른 직후, 마도의 정수가 집합된 동력원이 빛을 뿜어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게 곧 출발 신호나 다름없었다.
세 척의 ‘방주’는 그렇게 라플라스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순식간에 왕도를 벗어나고, 몇몇의 대도시를 지나 국경선을 넘었다.
호르교의 상징이 그려진 돛이 바람결에 나부끼니, 감히 그들 앞을 막아서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타국의 상공을 가로지를 적엔 수많은 사람들이 목청을 높이며 호르를 칭송했다.
배에 오른 마법사들의 표정이 저마다 오묘한 빛을 품었다.
“호르시여.”
특히 앨런은 가슴깊이 감명받은 듯 두 손을 그러모았다.
남쪽의 성자이자 이단심판자로서 오늘날 대륙에 들끓고 있는 신앙의 향연이 무척 달가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케케묵은 마음속의 미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검과 마법이 만연한 이 세상에도 정말 평화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애초에 평화가 무엇인지.
앨런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세상을 백지로 만들어 신의 통치하에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그 신념과도 같은 원대한 목적도 어느새 방향을 잃고 말았다.
모두 리하르트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는 세상을 백지로 만들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 보였으니까.
그저 호르가 곧 평화라고 단언할 뿐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번엔 기필코 듣고 말 것이라며 앨런은 속으로 다짐했다.
“…….”
그가 사색에 잠긴 동안 배는 어느새 북대륙의 초입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렌 왕국의 리오 성에서 잠시 정박한다!”
알리사의 명령에 배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이내 리오 성의 성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세 척의 배가 멈췄다.
뿌우우-
그들을 발견한 리오 성이 공기가 잠시 부산스러워졌다.
뿔피리가 몇 번이나 울리고, 잠시 후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저들 또한 천사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았던 모양인지, 성문 사이로 엘프와 몇몇의 사람들이 떠날 채비를 갖춘 채 걸어 나왔다.
“…….”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얼굴과 무거운 발걸음.
묵묵히 배에 오르려던 엘프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줄지어 늘어선 성벽 뒤, 성을 휘감고 오른 세계수가 보였다.
목숨보다도 중요한 정원을 두고 떠나야 하는 건, 엘프들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리오 성의 사내들이 목청껏 소리쳤다.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정원은 우리가 지키고 있겠소!”
“우리 대신에 성자님과 함께 활약해 주십시오!”
처음은 어색하고 껄끄러웠으나, 이제는 둘도 없는 동료가 되어 버린 리오 성의 기사들이 온 진심을 다해 엘프들을 안심시켰다.
“……믿겠소.”
엘프 족장, 타사르가 작게나마 미소를 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북쪽의 엘프들과 스노우폴의 선지자들, 그리고 성경을 집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부득불 따라붙은 트란티스 후작이 배에 탑승했다.
“출발하겠노라!”
그 광경을 짐짓 흐뭇하게 바라보던 알리사가 외쳤다.
우웅, 한차례 몸을 떤 ‘방주’가 다시금 하늘을 날았다.
◈ ◈ ◈
카득.
길고 흉측한 손톱이 허공의 금을 긁어 냈다.
카득.
샛누런 이빨이 금을 꽉 물고 놓지를 않았다.
수도 없이 많은 괴물들이 ‘균열’을 둘러싼 채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고기가 어서 익기를 기다리는 걸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같이 붉게 충혈된 눈.
입가엔 줄줄이 군침을 흘리고, 차마 식욕을 억누르지 못한 자는 열리지도 않은 균열에 손과 얼굴을 들이민다.
『????????????-!』
말을 잃은 존재는 그저 울부짖었다.
그의 울음이 그들을 더욱 부추겼다.
“크라아아!”
광기가 광기를 집어삼켜 더 큰 광기를 만들어 냈다.
악의에 악의가 더해져, 성마른 손톱과 이빨이 균열을 파헤쳤다.
카득, 카드득.
깨져나간 균열 조각이 새까만 발에 짓밟혔다.
수백 수천 번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문이 이제는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원성 짙은 울음에 희열이 섞였다.
광기에 물든 포효가 더 큰 광기를 채근했다.
쾅! 쾅! 쾅!
그 붉고 검은 세계 전체가 균열을 중심으로 난동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 우으.
왕은 그 모습을 보며 그답지 않게 점잔을 뺐다.
저가 나고 자란 왕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난리통을 바라볼 뿐이었다.
콰직.
그가 대뜸 제 손가락을 씹었다.
불결한 피가 왈칵 솟는 손가락에서부터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이것이 고통이란 걸까.
그는 최근 들어 느껴지기 시작한 ‘고통’이라는 감정이 무척 생소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가 제 가슴을 파헤쳤다.
알싸한 통증.
이것도 틀림없이 고통이리라.
왕은 이 낯선 감정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통증만큼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우…….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임무에 실패해 버린 멍청한 형제들.
칼고스에 더불어 아라헬과 마몬마저 죽었으니, 이제 태초의 피조물은 둘밖에 남지 않았다.
셋 중 하나라도 제대로 성공했다면 자신은 진즉 아버지와 만났을 텐데.
한데 왕은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죽은 형제들을 생각하면 도리어 가슴이 아팠다.
그 생경하고도 생소한 감정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기만 했다.
방금 전 손톱으로 살갗을 헤집을 때와는 또 다른 통증.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음을 시인했을 적의 그때와 비슷했다.
그 통증을 되새기고 있노라니 어느샌가 기분이 나빠졌다.
왕은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균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단순한 화풀이.
기분이 나쁠 때면 마계의 괴물들을 짓눌러 죽이던 그로서는, 이마저도 제 스스로가 낯설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