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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86화 (186/216)

186화. Episode. 58 호르의 군단 (3)

“취익!”

“크르륵!”

고요하고 정숙하던 바텐베르크의 정문에 웬 짐승 소리가 들끓었다.

아니, 돼지 울음소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나는 이마를 짚은 손을 내리곤 앞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인간 전사! 이 푸른 나무 부족의 하룬과 겨루자!”

“닥쳐라! 저놈은 내가 상대한다! 쿠억!”

정작 나는 대련을 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는데,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오크들은 벌써부터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보면 나와 싸우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줄로만 알 것 같았다.

“동작 그만.”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바텐가의 기사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섰다.

무려 1개 군단에 달하는 오크 전사들의 거친 기세가 피부를 쿡쿡 찔러 들었다.

이 정도야 뭐, 내게는 별 것 아니었다.

“대련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지. 안 그래?”

오크 군단이 뿜어내는 기세 앞에 자유로우려면 얼마의 힘을 드러내야 할까.

상급의 신격을 꺼내도 좋고,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격을 꺼내도 좋다.

내가 이룬 성취 중 어느 하나 저들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힘을 일시에 터트렸다.

쿠웅-!

나를 중심으로 바람이 폭발하듯 휘몰아쳤다.

그저 기세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땅이 떨리고 대기가 일렁거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의 끝자락에 도달한 경지였다.

이 다음은 초월자의 영역이겠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자욱한 흙먼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쿠, 쿠익…….”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괴성을 질러 대던 오크들이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 중에서도 차이가 명백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힘 깨나 쓴다는 녀석들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휴거가 그러했고, 크락타와 몇몇 대장군들이 그러했다.

나머지 오크들은 내 기세를 해소하지 못한 채 억눌린 울음소리를 냈다.

“기선 제압 한 번 거창하게 하는구나.”

뒤쪽에서 루드비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어조가 꼭 약자를 핍박하는 강자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오크는 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종족.

다가오는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선 누가 위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했다.

“하늘이 열릴 때까지 너희는 이 근처에서 숙영한다. 단 한 번이라도 소란을 피운다면 너희들 모두 타이탄으로 돌려보내겠다.”

한 마디 한 마디에 기묘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신앙을 가득 품은 내 목소리는 저들의 뇌리 깊은 곳에 틀어박히리라.

“쿠익! 우리 멀리서 왔다! 진짜 전장에 참가해야 한다!”

자신을 하룬이라 소개했던 푸른색 오크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누가 지금 돌아가라고 했나.

“그니까 소란 피우지 말라고. 호르교가 필요로 하는 건 용맹한 전사들이지, 앞뒤 가릴 줄 모르는 발발이들이 아니야.”

과연 내 협박 아닌 협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오크들이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전의를 불태우던 크락타와 대장군들도 일단은 얌전히 있기로 결정한 듯한 모양새였다.

“흠.”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루드비히와 바텐가의 기사들을 살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 오크들을 들이는 것에 상당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었다.

그 수가 한둘도 아니고 이천에 달하는 군단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터.

더군다나 인간과 오크의 관계는 바른말로도 좋다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 전장을 굴러다니다 보면 기사와 전사들도 서로를 전우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취익!”

타이탄의 군주, 휴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눈이 마주친 그가 씨익 웃었다.

◈          ◈          ◈

“휴거, 따라와.”

휴거는 저만치 앞서 걷는 리하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설명 하나 없이 대뜸 따라오라는 모습이 기억 속 그대로의 대단한 인간 전사였다.

“취익! 대단한 인간 전사. 그건 조금 곤란할 것 같소.”

“왜?”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기엔 좀…….”

붉고 투박한 손가락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크들을 향했다.

조금 전에 소란을 피우면 진짜 전장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협박을 들은 차였다.

당장은 가만히 있기는 하지만 언제 난동을 부리다 쫓겨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군주로서 내가 책임지고 통솔해야 하지 않겠소?”

호오.

리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시선이 어쩐지 철든 자식을 바라보듯 대견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에 휴거가 머쓱하게 웃을 때였다.

“크륵. 다녀와라. 내가 저 녀석들을 통솔하고 있겠다.”

오우거처럼 거대한 덩치의 오크, 크락타였다.

그가 힐끔 리하르트를 보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라 하지 않았는가. 전사에게 있어 동료는 강한 상대 다음으로 소중한 법이지.”

“오오, 고맙소! 냉큼 다녀오겠소! 대단한 인간 전사, 가시게나!”

그렇게 발목을 붙잡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리하르트는 휴거를 데리고 바텐베르크의 정문을 지났다.

한참을 걷자 소검궁의 정원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모리츠 녀석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으음? 마침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있었소. 모리츠 동지라면 가장 먼저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아 줄 것이라 예상했소만…….”

그래서, 동지는 어디 있소?

휴거가 눈으로 묻는 듯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따라와 보면 알아.”

휴거는 리하르트의 인도에 따라 소검궁의 정원 사이를 걸었다.

길 양쪽에 만개한 샛노란 꽃들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메리 소저를 닮은 꽃, 이름이 아마 글로리아였던가.

“취익…….”

휴거는 무심결에 그 꽃에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 했다.

한아름 꺾어 주려다 기드에게 저지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꽃을 향한 매너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입맛을 다신 그가 문득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정원의 한가운데, 익숙한 얼굴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 오오!”

못 본 새 훌쩍 큰 모리츠 동지.

여전히 우직한 얼굴의 아론과 인자한 기드.

휴거를 발견한 그들이 킬킬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른 와, 임마!”

◈          ◈          ◈

소검궁의 정원에선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왕이 되어 돌아온 휴거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모인 이들이 저마다 술을 들고 온 것이다.

“취이익! 다들 잘 지냈소?”

거나하게 취한 휴거가 모리츠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외쳤다.

느껴지는 기운이나 온몸 가득한 흉터나.

타이탄으로 향하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변했는데 그 호쾌한 성정만큼은 그대로라며, 사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왕이 됐다기에 조금은 위엄이 생겼나 기대했건만.”

제 목을 두른 휴거의 팔에 질색을 하던 모리츠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가운 기색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인지 모리츠는 애꿎은 술을 벌컥 들이켰다.

“어제까지만 해도 휴거는 언제 도착하냐 징징거리던 녀석이.”

갖가지 술에 신앙을 꾹꾹 눌러 담던 리하르트가 조소를 담은 채 중얼거렸다.

“내, 내가 뭘!”

빼액 소리를 지르는 모리츠를 중심으로 웃음소리가 퍼졌다.

같이 껄껄거리며 웃던 휴거가 문득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실 이 상황이 그리 바람직한 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져 가는 하늘.

이렇게 술이나 퍼마실 시간이 없을 터인데.

‘즐길 때는 즐겨.’

그답지 않게 우려를 표하는 휴거에게 리하르트가 입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는 끊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리하르트와 동료들은 그동안 상당히 혹사당한 상태였다.

이런 조촐한 술자리조차도 그리웠을 만큼.

“험험! 우리들만 빼고 술을 나누는 건 용납 못하지!”

그때, 정원의 술판에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그 의외의 손님들을 본 휴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쟁이 친구들!”

저마다 옆구리에 큼지막한 술통을 끼고 온 손님들은, 하얀모루 부족의 드워프들이었다.

휴거가 등불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던.

“취익! 그대들도 이곳에 있었소?”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물음에 답한 건 리하르트였다.

“얼마 전에 불렀어. 바렌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꼴은 내가 못 보지.”

‘좋은 무구’ 천 자루, ‘쓸 만한 무구’ 만 자루.

그리고 리오 성의 보수 보강까지.

계약상의 모든 거래를 끝마친 하얀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은 바렌 왕도 근처의 대장간에서 철이나 쪼물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필요할 때 언제든 가용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들이란 뜻이었다.

“흥. 끝내주는 신병기를 손볼 수 있다고 해서 왔거늘, 그런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구나.”

드워프 족장 후르큼이 휴거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그건 곧 완성된다니까. 아무튼 술이 추가됐으니 좀 더 양껏 마실 수 있겠구나.”

리하르트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신앙을 흩뿌려 댔다.

“하하, 성자님께서 저렇게 흥이 오르신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론의 말에 기드와 모리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술판은 하룻밤새 끝이 났다.

원 없이 마셨으니 이제 아무런 후회도 남지 않을 터였다.

그 다음 날부터 우리는 다시금 전시 상태로 돌아갔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회의엔 휴거와 크락타를 비롯한 몇몇의 대장군들이 추가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느껴졌다.

누군들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었을까.

천하의 바텐베르크가 오크와 골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모습을.

뿐만이 아니었다.

가진 바 경지와 힘에 비해 턱없이 떨어지는 오크들의 병장기 수준을 하얀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이 대폭 개선시켜 주었다.

그 명장의 손을 거친 도끼와 거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거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쿠익! 난쟁이 녀석들! 고맙다!”

오크들은 단순했다.

자신의 무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 드워프에게 진심 어린 호감을 표했다.

영혼 깊이 새겨진 대립과 전쟁의 역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점 숨김 없는 오크들의 태도는 인간과 드워프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단순하고 과격하며 예절을 모르나, 그래서 오크는 솔직하고 순수한 종족이었다.

비록 엘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란 아직 요원해 보였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날의 바텐베르크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한때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던 이종족들이 지금은 한 곳에 모여 힘을 합치고자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다.

저들의 화합이 곧 나의 흔적이 되어 줄 것이었다.

“휴거.”

그리고.

이번에는 기사로서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취익? 왜 그러시오?”

휴거의 몸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그만큼 수많은 사투를 펼쳐 왔으리라.

또, 그 영혼은 강철처럼 올곧고 단단했다.

어쩌면 발락이 찾던 인재란 것은 휴거 같은 전사를 칭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검성. 배워 볼 생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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