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Episode. 57 절반과 절반이 하나되어 (6)
경지에 오른 투사의 오러는 겨울철 앙상한 나뭇가지로도 바위를 벨 수 있게 한다.
방패에 오러를 덧씌운다면 도리어 공격을 가한 상대의 검이 산산조각 나게 할 수도 있다.
오러는 단순히 마나를 복잡한 배열로 엮어 올린다고 하여 얻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인이 걸어온 길, 그 자체를 대변해 주는 힘이었다.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날을 벼려 낸 파괴의 의지.
오러라는 것은 그만큼 파괴적이고도 강맹한 기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랜드 소드마스터만의 전유물, 오러의 갑주가 기사들 사이에서 전설과도 같은 위상을 가진 것이다.
서슬 퍼런 파괴의 의지를 온몸에 휘감았다 하여 누구는 그들을 전신(戰神)이라 불렀고, 또 누구는 악마 같은 힘이라며 두려워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길을 완전히 사로잡은 저 힘은 세간에 무어라 불리게 될까.
“크으으…….”
붉게 빛나는 오크가 신음을 냈다.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굳이 라플라스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휴거의 몸 속은 실시간으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중이라는 것을.
그것이 분에 넘치는 힘을 부린 대가였다.
“크륵, 제 스스로 칼날을 삼켰구나. 그 상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크락타가 흉물스레 갈라진 가슴팍을 쿵쿵 두드리며 광소했다.
혼을 불태우며 결투에 임하는 휴거의 태도가 기껍다는 듯, 잔뜩 달아오른 웃음이었다.
“휴거! 네가 자멸하기 전에 이 내가 직접 끝내 주겠다!! 용맹한 전사로서 죽어라!”
쾅! 쾅! 쾅!
어지간한 오우거보다도 거대한 타이탄의 군주가 발을 구르며 뛰었다.
혹사당한 땅이 쩍쩍 부서져 나갔다.
이내 거목 같은 그의 양팔이 쌍도끼를 쥐고선 벼락처럼 내리 꽂았다.
쿠웅!
그 두 갈래 궤적을 하나의 도끼가 가로막았다.
꼭 폭탄이라도 터진 양 무지막지한 광풍이 휘몰아쳤다.
충돌의 여파가 어찌나 크던지, 덩치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크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괴성을 질러 댔다.
“쿨럭!”
카드득-
불똥이 튀기는 가운데 휴거가 붉은 피를 토했다.
한 움큼 갈려 나간 그의 생명력이 라플라스의 눈에 여실히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저만큼 떨어져 결투를 방관하던 천사가 내 쪽을 향해 우려 짙은 시선을 보냈다.
[호르시여…….]
쉿.
나에게서 탄생한 피조물인 그녀는 내 뜻을 금세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로지 휴거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핏빛 나무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
어린 용에게 모든 것을 잃고 복수의 칼날을 벼리던 자.
그는 타고나길 튼튼하고 강맹하게 태어났으나, 용에 비하면 턱없이 약했다.
용의 이빨과 발톱은 오크의 살갗을 종잇장처럼 찢었으며 어떤 마법보다도 뜨거운 불길은 끔찍한 화상을 남겼다.
하나, 그럼에도 휴거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나와 제3기사단을 만났고, 끝내는 복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휴거가 이겨 낸 고난과 역경의 길은 그 영혼에 낱낱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이 대결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저 단단한, 강철 같은 영혼은 칼날 좀 삼켰다 하여 찢어져 버릴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깎이고 갈려 나가는 몸 따위, 생명줄만큼이나 질긴 오크의 마나 루트가 버텨 줄 것이다.
그의 각오와 의지가 죽음을 초월토록 할 것이다.
‘휴거, 끝까지 가면 네가 다 이길 거다.’
나는 이 순간 철저한 구경꾼으로서 휴거를 응원했다.
신의 은혜랍시고 지금의 대결에 끼어드는 짓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죄악이다.
초대 검성도, 나도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홀로 이겨 내려 발악했으니까.
뼛속까지 전사인 휴거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신.
‘오늘 네가 왕이 된다면 그에 걸맞은 상을 주마.’
저가 이룩한 성취에 대한 보상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 줄 테지.
그 순간이었다.
콰장창-!
내게 긍정이라도 표하는 듯, 거력이 담긴 배틀 액스가 크락타의 도끼 하나를 기세 좋게 깨부쉈다.
“크, 크익……!”
예상치 못한 광경에 넋을 놓았던 오크들이 하나둘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부릅뜨인 눈엔 핏발이 섰다.
“우오오오-!!”
온몸을 꽉 조인 긴장과 희열이 그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왕의 자리.
그 왕좌를 직접 만들어 제 것으로 삼은 왕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 ◈ ◈
“크, 하!”
왕이 웃었다.
고통 섞인 음성이 어째선지 즐거움에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콰앙! 콰앙!
도끼와 도끼의 충돌음은 천둥소리를 연상시켰다.
크락타의 가슴팍에서 쉴 새 없이 핏물이 튀었다.
휴거의 입과 눈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둘 다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모든 것을 꺼내어 맞부딪치고 있었다.
“크흐흐! 왕이시여, 조금 전보다 힘이 빠진 것 같소만!”
“건방 떨지 마라, 애송이!”
살을 깎아먹는 대결이 이어진다.
그 열기가 과열될수록 오크들의 함성이 잦아 들어갔다.
단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야망 짙은 전사들의 욕망이 홍수처럼 범람했다.
사실 휴거는 이제 한계였다.
오러라는 날카로운 칼날이 몸 속을 헤집은 탓에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피.
빈혈 아닌 빈혈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도끼를 쥔 손은 굳건하기만 했다.
피가 없어 싸우지 못한다니!
그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은 딱 질색이었다.
“후읍……!”
이깟 피, 혈액 대신에 오러를 흘려보내면 될 일이다.
그래서 휴거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마나 루트를 가득 채운 오러가 텅 비어 버린 혈관을 질주했다.
부족한 피의 곱절만큼 자신의 생명력을 갈아 넣었다.
강대한 각오와 의지가 오러를 빌어 들불처럼 일어났다.
우득, 우드득.
붉은 육신이 오러에 의해 터질듯 부풀어 오르는 모습은, 용맹한 오크들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흠칫.
크락타가 몸을 굳혔다.
순간적으로나마 뒷걸음질을 칠 뻔하였다.
단 한 번도 덩치로 압도되어 본 적이 없던 그가, 어느샌가 휴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붉은 피륙 아래 오러가 일렁거려서, 휴거는 그 자체로 태양처럼 붉게 타올랐다.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 정진했다면.”
대결이 시작된 이후 광소만 터트리던 왕이 미간을 좁혔다.
여태까지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이 그 심장에 안타까움이 가득 들어찼다.
“너는 틀림없이 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굉장한 싸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크락타에게 있어 휴거는 둘도 없는 별미였다.
밍밍하고 물렁거리는 음식만 오르내리던 왕의 식탁에 나타난 싱싱한 고기였다.
아직은 간이 제대로 배지 못한.
얼마간의 숙성을 거치면 더욱 풍미가 깊어질,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별미.
그렇기에 이번 대결도 적당히 즐긴 뒤 제압할 생각이었다.
저 용맹한 전사는 분명 납득하지 못할 테지만, 크락타는 아까운 샛별이 잠깐 반짝이다 져 버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급했다. 너무 급했다. 휴거.”
크락타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로 그를 꾸짖었다.
비대하게 부푼 덩치.
그 안에 담긴 것은 한번 소모하면 다시는 채울 수 없는 생명의 원천.
솜씨 좋은 샤먼의 주술로도 손톱만큼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그 기운이 휴거 안에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것도 진즉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그야말로 점화된 심지가 폭탄 속을 파고 들어간 꼴이었다.
“……취익! 겁먹으셨소?”
이제는 막을 수 없다.
크락타가 할 수 있는 건 폭탄이 저 홀로 터지기 전에, 자멸해 버리기 전에 전사로서의 예우를 다하는 것뿐이었다.
말을 꺼내는 시간마저 아껴야 했다.
왕은 하나 남은 도끼를 양손으로 꽉 잡아 쥐었다.
스스로를 불태운 전사를 위해, 그 또한 모든 것을 그 도끼 위에 그러모았다.
고오오-
대륙 각지에 흩어진 수많은 오크 부족을 규합한 타이탄의 왕.
그의 기세가 전과는 비할 수 없이 잔잔해서 꼭 깊디깊은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가겠소, 왕.”
태양처럼 타오르는 휴거가 걸음을 옮겼다.
전력을 담은 마지막 한방.
그것을 위해 서로가 서로의 영역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콰득.
그렇게 붉고 푸른 오러가 저마다 이빨을 번뜩였다.
◈ ◈ ◈
초절정 강자들의 싸움은 사소한 것 하나로도 승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정말로 심할 경우엔 바람과 습도 따위로 인해 패자와 승자가 구분되어지기도 한다.
전심전력을 다한 승부란 그만큼 예민한 구석이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크락타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쩌저정-
바람과 습도 같은 것에 비하면, 무구의 질적 차이로 인한 패배는 납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크륵, 내 패배로구나.”
한 짝 남았던 쌍수 도끼가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한 차례 갈라진 바 있던 가슴팍이 가뭄 날의 논바닥처럼 더욱 깊게 패였다.
“빌어먹을. 왕씩이나 돼서 다 낡아 빠진 무구를 쓰니까 그런 것 아니오!”
정작 패배한 크락타는 승패에 만족할 뿐인데, 도리어 휴거가 성을 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휴거가 잠시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인정 못하오. 이건 무효란…….”
당장 악이라도 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그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사명이 무엇인지 뒤늦게 상기한 탓이었다.
그는 왕이 되어, 타이탄의 오크들을 이끌고 호르교를 도와야만 했다.
이제와 무효라 여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흐흐, 지금껏 내가 깨부순 도전자들의 무구만 수백 개에 달한다. 그럼 그것도 전부 다 무효로 해야 하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크락타가 비척비척 휴거에게 다가갔다.
주저앉은 그를 일으켜 세우곤, 자신의 목을 내밀었다.
“상처가 깊다. 네 손으로 직접 죽여 다오. 오늘부로 네가 타이탄의 왕이다. 크륵, 너도 금방 죽을 테지만 말이야.”
떨거지만 남게 될 타이탄이 신경 쓰이지만.
그건 저 녀석들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할 문제라고.
크락타는 죽음 앞에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와, 왕……! 아니, 크락타 이 자식아! 누가 떨거지냐! 꾸이익!”
넋을 놓았던 타이탄의 대장군 하나가 불현듯 소리쳤다.
“혼자 잘난 척은 다하더니 이제야 죽는구나! 그 정도면 오래 살았다! 아주 장수한 거다! 쿠륵!”
“이거 참 아쉽구먼. 네놈의 목은 이 푸른 나무 부족의 하룬이 치려고 했거늘!”
휴거와 크락타를 둘러싼 오크들이 소리쳤다.
누구는 분개했고, 누구는 기뻐했다.
그중 어느 하나 슬퍼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이 지금껏 저들을 이끌어 준 왕을 향한 경외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휴거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쁘지 않군.”
쿨럭, 크락타가 피를 토했다.
그런 그를 부축하려던 휴거를, 웬 늙은 오크가 가로막았다.
“크락타는 너를 전사로서 대우했다. 지금 저 떨거지 녀석들 또한 크락타를 전사로서 대우하고 있다.”
타이탄의 참모이자 샤먼.
노파는 휴거에게 물었다.
너는 위대한 전사의 마지막을 욕보일 생각이냐고.
“받아라. 이 왕국의 두 번째 왕으로서 선대왕을 보내 주거라. 크락타에게 허락된 운명은 여기까지다. 너는 내 주술로 잠깐이나마 목숨을 이어 붙일 수 있다.”
그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뼈 왕관을 내밀었다.
크락타는 거추장스럽다며 착용하고 다니지 않았으나, 그것이 엄연히 왕을 상징하는 타이탄의 왕관이라 하였다.
“…….”
휴거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곤 머리 위에 얹었다.
덜그럭.
이마에서 흘러내린 왕관이 콧잔등에 얹혔다.
“젠장. 나한텐 너무 크잖소. 크락타는 머리가 얼마나 거대한 거요, 췩!”
“흐흐…… 그거 미안하게 됐군.”
툴툴거리는 휴거에게 크락타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안색이 빠르게 창백해져만 갔다.
이제는 진짜 끝이 다가온다.
모든 오크들이 숨을 죽인 채 크락타의 마지막을 보고자 했다.
쿠웅.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휴거는 제 도끼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보고 있소이까! 호르 양반-!!”
저 또한 죽어 가는 몸으로, 타이탄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왕관을 제 머리에 고정시킨 채 외쳤다.
“나! 드디어 왕이 되었소-!”
그러니까.
나를 메리 소저와 이어 줄 사랑의 큐피트는 일주일 정도 뒤로 미뤄도 되니까.
“부디! 용맹한 전사가 더욱 마땅한 전장에서 싸우다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휴거를 바라보는 크락타와 오크들의 표정은 미친놈을 보는 듯했다.
다만.
샤먼만은 무언가 낌새를 느꼈다.
이내, 그녀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우, 운명이 비틀려……?”
무언가, 압도적인 것이 오고 있었다.
『계시(啓示) - 발동.』
휴거가 뒤집어쓴 왕관에서, 찬란한 빛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