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Episode. 57 절반과 절반이 하나되어 (5)
대귀족 혹은 명성 높은 지휘관.
바텐베르크를 벗어난 그들이 막 저마다의 자국에 도착했을 즈음, 각국의 하늘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새하얀 한 쌍의 날개와 반짝이는 금발.
신기루처럼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들은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저, 저것들은 무엇이냐!”
한 나라의 왕이 당혹성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깨어진 하늘이 무척 불길하던 참이었는데, 정체불명의 여인들까지 나타나니 간담이 서늘해진 것이다.
그때, 눈을 감은 채 날갯짓을 하던 천사들로부터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땅을 쓰다듬었다.
빛이 닿은 곳엔 풀이 자라났다.
그 누가 어디에 있더라도 평등히 내리쬐이는 신성한 빛, 그 순간 그녀들은 북대륙의 태양이 되었다.
“…….”
불안을 금치 못하던 왕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털썩-
이상 사태에 다급히 소집되었던 병사들이 별안간 무릎 꿇는 걸 보면서도 누구 하나 그들을 다그치지 못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백성과 귀족, 병사와 기사 구분 할 것 없이 북대륙의 모두가 온몸으로 새로운 태양을 알현했다.
[우리는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이니.]
신의 격을 빌린 천사들의 음성이 하늘을 울리고 땅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 상서로운 음성은 각자의 마음에 닿았다.
“아…… 호르시여!”
밤새 성경 집필에 열을 올리던 노인의 얼굴에 환희가 떠오른다.
일찍이 신의 가호를 받았던 어느 성의 기사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는 자들은 경배했다.
천사를 보며 신을 찬양했다.
그에 반해 무지한 자들은 위대한 존재 앞에 겁먹은 어린 양과도 같았다.
[만인은 들으라.]
무릎 꿇은 만인이 고개를 들어 그녀들을 올려다보았다.
더할 나위 없는 경청의 자세.
신이 직접 창조한 영령의 명은 인간들로선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곧 하늘 너머로부터 대환란이 도래할 것이니.]
[너희들은 항상 깨어서 대비하라.]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둠을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매.]
[맑게 깨어 있는 너희들의 영혼 외에는 지리멸렬한 어둠을 막을 수 없으리라.]
천사들의 전언은 만인의 모든 불신과 잡념을 통과하여 영혼 깊숙히 틀어박혔다.
정말로 곧 대환란이 도래할 것이고.
우리는 그 환란에 대비해야만 한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경청하던 인간들의 낯빛이 딱딱히 굳었다.
[단단히 대비하되 두려워하지는 말라.]
[너희에게는 구세주가 함께할지니.]
[유일신, 호르의 빛이 만인의 영을 밝게 비출지어다.]
천사들은 경고와 함께 구원을 암시했다.
그건 예언과도 같았고, 예고와도 같았다.
[대환란은 그분과 충실한 종들로부터 종식될 것이니.]
[유일신이 하룻밤 동안 절대신으로서 재림하시고.]
[비로소 빛과 어둠이 새로이 탄생하여 영원한 균형을 이루리라.]
대환란과 구원의 날.
신의 재림.
그저 허황된 말로만 여겨질 그것들이 어째서인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다가와, 인간들은 간절히 손을 모았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깨어진 하늘을 가린 채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신이 너희들의 기도를 들었노라 말하는 듯했다.
잠깐이나마 태양을 대신하던 천사들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 ◈ ◈
“……취익.”
붉고 투박한 손이 허공을 어루만졌다.
사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빛 조각 한 점이 그 손끝에 머물다 흩어진다.
익숙하고 또 반가운 기운.
휴거의 입꼬리가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그때였다.
멍하니 넋을 놓았던 오크들 사이에서 불현듯 소란이 일었다.
“꾸익! 방금 그것들은 대체 뭐냐! 나를 무릎 꿇리다니!”
“한번 싸워 보고 싶구나!”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오크들은 사라진 천사들을 향해 전의를 불태웠다.
타이탄의 오크들 특유의 야만성이 불가사의 앞에 한껏 자극을 받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휴거가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그대와 싸워 보고 싶다고 하는구려.”
그의 옆엔 반투명한 천사 하나가 남아 있었다.
대륙의 모든 천사들이 종말과 구원을 고할 적에도 그녀만큼은 휴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저는 전하고 알리는 존재일 뿐, 저들과 싸우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천사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 무감정한 눈빛엔 사라진 천사들을 찾아 눈을 번뜩이는 오크들이 담겼다.
“흐음…… 그나저나 문제가 생긴 것 같소.”
휴거는 짐짓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턱을 긁적였다.
천사들이 직접 나서서 경고의 말을 내뱉기까지 했는데, 저 단순한 오크들은 오로지 천사를 향한 전의만을 불태우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전언을 들었고, 의심없이 믿었다.
다만 곧 도래할 대환란이니 구원이니, 그것이 실로 일어난다고 해도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라고.
야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호르께서는 저들의 반응을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임무가 막중한 것입니다.]
흐.
휴거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겠지. 그래서 그대가 나를 전담하는 것 아니겠소, 취익!”
언뜻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하는 대답이었다.
천사가 빤히 휴거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적만 해도 의기소침한 모습에 그녀는 저 오크가 부여받은 임무에 비해 그릇이 작은 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 천사의 귓가에 언젠가 들었던 호르의 음성이 아른거렸다.
[그분은 당신이 왕이 될 것이라 단언하셨습니다.]
[부디 신을 실망시키지 마시길.]
씨익, 붉은 오크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오늘.”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왕이 될 것이오.”
도끼를 쥔 팔뚝에 힘줄이 솟았다.
천사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휴거를 본 오크들이 아는 체를 했다.
조금 전의 천사를 보았느냐며 호들갑을 떠는 그들을 휴거가 묵묵히 스쳐 지났다.
“대장군?”
“뀍, 어디를 가는 거지?”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걸까.
타이탄의 오크들이 홀린 듯 휴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요란한 기운을 품은 것은, 휴거가 비로소 왕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크흐흐, 또 내게 도전하려는 것이냐.”
크락타가 그를 반겼다.
아무래도 네 녀석도 그 이상한 것들을 보고선 달아오른 모양이라고, 왕의 음성이 평소보다도 훨씬 성말랐다.
“취익! 왕이여, 나와 싸워 주시오.”
“마다 할 이유가 없지. 언제나와 같이 목숨을 걸거라.”
저 멍청이가.
타이탄의 다른 대장군 하나가 이마를 짚었다.
크락타 또한 방금 전의 알 수 없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상처 난 왕의 자존심과 한껏 자극 받아 버린 호승심.
오늘의 왕은 이전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흉폭하고 강대할 터였다.
타이탄의 대장군 중에 공석이 생기겠군.
오크들이 내심 고개를 저을 때였다.
“원래는 조금 더 신중히 도전장을 내밀 생각이었소. 아직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했거든.”
삽시간에 만들어진 대결의 장.
그 한가운데에 오롯이 선 휴거가 도끼를 추켜들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소, 취익! 이대로 가다간 타이탄이 멸망해 버릴 게 뻔할 뻔 자인데 말이오.”
“크륵! 그게 무슨 헛소리냐.”
크락타의 인상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큐피트들의 경고를 듣고도 모르겠소? 우리도 이제 슬슬 재앙에 대비를 해야 하오.”
휴거는 분노한 왕을 앞에 두고 덤덤히 말을 이었다.
“타이탄의 현왕인 그대마저 조금도 대비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하루빨리 왕이 되어 동족을 이끌 수밖에 없지.”
도끼를 타고 신성력이 들끓었다.
이미 몇 번이고 보았던 마나였다.
한데 그 빛나는 마나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조금 전 하늘을 수놓았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타이탄의 오크들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 ◈ ◈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포교는 천사들이 할 거라고.”
나는 킬킬 웃으며 멍한 표정의 레오를 툭 건드렸다.
“…….”
그런데 그의 반응이 영 재미 없었다.
내 예상대로였다면 대체 그 천사란 존재들은 무엇이냐며 예의 그 호기심을 폭발시켰을 텐데.
“서, 성자님.”
“레오 경. 왜 그러십니까?”
“그 아리따운 존재들은 대체…… 특히 저와 눈이 마주쳤던 그녀는……!”
레오의 병적인 호기심마저 찍어 누르는 감정이 하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기는 뭘 마주쳐.
“거리가 얼마였는데 눈이 마주칩니까. 정신 차리시지요.”
하지만 레오는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쉭쉭, 강렬한 숨소리.
이야.
아무래도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천사한테 반하냐.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정원의 벤치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웠던 천사의 등장에도 바텐베르크는 큰 충격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텐베르크일 뿐, 바깥의 세상은 한바탕 난리가 난 채였다.
특히 무지하던 자들의 경우가 더더욱 그랬다.
“대환란을 경고했고, 구원을 예언했다. 그 모든 걸 천사와 빛으로서 증명했다.”
그 바텐베르크마저 호르교를 인정한 마당에 저들의 신앙심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쯤 되면 아예 작정하고 믿지 않으려 해도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마침내 나는 북대륙에도 성공적으로 씨앗을 심었다.
곧 발아하여 만개할 터를 가꾸는 것은 각국의 대신관이 해야 할 일이었다.
『신안(神眼) - 발동.』
침소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신안을 발동했다.
타이탄의 왕 후보이자, 오크들의 대신관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 ◈ ◈
신안의 초점에 타이탄이 잡히기가 무섭게 장관이 펼쳐졌다.
꽈앙-!
도끼와 도끼가 부딪치자 지천이 울렸다.
열광적으로 함성을 내지르던 오크 몇이 그 충격파에 땅을 나뒹굴기까지 했다.
“크, 크하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 왕이 세상이 떠나가라 광소했다.
푸확-
그의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기다란 상처가 새겨진 채였다.
“취익!”
솔직히 말해서 휴거와 크락타의 전력 차는 상당했다.
그러나 나는 휴거가 금방 그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다.
그리고 지금.
내 믿음이 완벽하게 보답을 받고 있었다.
비록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이었지만.
고오오-
붉은 오크로부터 느껴지는 이 기운은 나로서도 생소한 힘이었다.
신안에 라플라스의 눈을 덧씌웠다.
난 그 눈으로 붉은 빛을 뿜어내는 휴거를 낱낱이 살펴보았다.
‘맙소사.’
결과는 무척 놀라웠다.
마치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전유물, 갑주를 입은 듯 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갑주를 몸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엮어 냈다는 것이었다.
“과연 건방을 떨 만큼은 강해졌구나! 대체 어디서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이냐?”
“취익, 천외천의 경지를 따라 해 보았소. 내가 아직 부족하여 어설프게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오.”
휴거에 대꾸에 반응한 건 크락타가 아닌 나였다.
저건, 어설프게 흉내 냈다 평가하기엔 큰 무리가 있었다.
온몸에 열린 마나루트를 빽빽히 메운 오러.
몸 속에 오러를 짜 올린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방식과는 궤를 달리했다.
‘……괜찮은 운용법인데?’
나와 루드비히의 것이 오러의 갑주라면.
저것은 오러의 육신이라는 말이 어울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