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Episode. 57 절반과 절반이 하나되어 (4)
“저희 호르교에겐 그 불길한 존재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습니다.”
홀로 중얼거리기라도 하듯 아무런 높낮이 없는 어조.
그런데 그 음성을 들은 인사들의 가슴에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신기하게도 전날의 악몽 이후 도통 진정되지 않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져 갔다.
“다만.”
싱긋 미소를 지은 리하르트가 회의장의 인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헉……!”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양새들이 꼭 모닥불의 온기를 쬐다 데인 것만 같았다.
‘무슨 눈빛이…….’
성자의 음성은 햇볕처럼 따스하고 입가에 만연한 미소는 저리도 자애로운데, 그 눈빛만큼은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침묵만 가득한 장내.
모두가 리하르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여러분들은 각자의 나라를 대표해 이곳까지 당도하셨지요.”
그러니만큼 이들 중 누구 하나 자국의 요직이 아닌 자가 없을 거라고, 리하르트는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었다.
“마, 맞습니다.”
인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긍정을 표했다.
씨익, 리하르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의 육신에서 거대한 신격이 내뿜어졌다.
쿵! 쿵!
수많은 무릎이 영문도 모른 채 땅을 찍었다.
넙죽 엎드린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주체가 되지 않았다.
“어……?”
제 나라의 왕에게 보이던 것보다도 더한 복종의 자세.
힘으로 찍어 누른 것도 아닌, 영혼 그 자체의 굴복.
이게 대체 무슨…….
바들바들 떨던 지휘관 하나가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 ◈ ◈
“으으…….”
신격을 마주한 이들이 억눌린 비명을 흘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내가 저들에게 드러낸 신격엔 아무런 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따스함도, 엄격함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격.
“당신들은 어떤 죄를 저질러 왔습니까.”
그래서 저들의 속이 더욱 고스란히 보였다.
나는 어렵사리 고개를 든 지휘관에게 시선을 던졌다.
덜컥,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춘 그의 눈에서 죄책감 가득한 눈물이 흘렀다.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보인다.
한 사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저지른 숱한 죄들이.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했던 탐욕의 발자취들.
그것들이 모조리 그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다.
“미안, 미안하다…… 나는 그저…….”
“아아……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지체 높은 왕족의 실수.
대귀족의 막강한 권력이 불러온 사고와 비리.
수없이 쌓인 죄가 그들의 영혼에 흉터를 남겼다.
나는 신의 빛을 가졌음에도 저 흉터 가득한 영혼들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그저 들여다보고, 판단할 뿐이었다.
이번엔 루드비히를 비롯한 바텐가의 사내들을 보았다.
그들의 영혼은 맑고 청명했다.
신격을 앞에 두고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저들은, 스스로의 신념을 따르는 기사들이었다.
설령 여지껏 수많은 생명을 꺼트렸을지라도 그 맑은 영혼엔 흉터 하나 없었다.
그래서 저들이 바로 사자였다.
용맹하고 신의를 지키며 신념을 따르는 자.
죄를 흉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업보로서 기꺼이 짊어지는 자.
저들의 영혼과 상처투성이 영혼들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올곧은 신념의 유무.
“다행이군.”
나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뿜어내던 신격을 갈무리하며 엎드린 자들의 몸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바텐베르크를 찾아 온 이들은 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뱀도 아니었다.
진정 뱀이었다면, 흉터 없이 까맣기만 한 영혼이 보였을 테지.
그런 사악한 작자들은 애초에 죄를 죄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호르께선 여러분들의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여러분은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좋은 말로도 선인이라 할 수는 없더군요.”
몸을 추스른 인사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와, 왕국을 지켜야만 합니다. 제가 저지른 죄의 벌은 달게 받을 터이니 왕국만큼은……!”
그들의 절망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제는 무엇이 진정 재앙이고 무엇이 희망인지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진정하시지요. 도움을 드리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 ◈ ◈
나는 율법을 적은 종이를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의 당부를 전한 뒤, 서둘러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정말 이리 보내셔도 되는 겁니까?”
수많은 마차가 바텐베르크를 떠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레오가 우려 짙은 음성을 내었다.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저들을 불러모으신 줄 알았더니…….”
“당연히 그걸 위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대책은커녕 포교만 하시지 않았습니까.”
대책이라.
포교 말고 또 다른 대책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곧 벌어질 재앙은 전 세계적인 침공, 각자의 보금자리는 각자가 지켜 낼 수밖에 없다.
호르교는 저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호르께서 모든 곳에 빛을 뿌리실 겁니다. 대신관이 있는 나라를 어찌 모른 척하시겠습니까.”
나는 저 뱀도 사자도 아닌 자들에게 호르교의 대신관 자격을 주었다.
그 말인즉, 그들은 앞으로 각자의 나라를 대표하는 호르교의 신관이라는 뜻이었다.
“저는 신념 없는 자들에게 신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준 신념은 율법.
그러니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스스로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다.
신격 앞에서 자신을 돌아본 저들이라면 크게 와닿을 테지.
“그래봤자 한 나라에 한 명입니다. 다들 지위가 높다고는 하나 혼자서 자국의 귀족과 백성들을 성공적으로 포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하물며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도…….”
그것 또한 걱정할 것 없다.
대신관은 포교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도들이 율법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게 지도하는 존재에 가깝지.
이건 이 세상에 신이 사라진 이후의 시대를 위한 초석이었다.
“포교는 천사들이 할 겁니다.”
“……천사?”
레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콰득.
바라보기가 무섭게 금이 한층 더 깊어진 듯했다.
저 하늘이 깨지기 전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천사들이 있으니 포교는 걱정 없어.’
문제는 역시 라플라스 쪽인가.
알리사에겐 미안하지만 조금 보채야 할 것 같았다.
◈ ◈ ◈
“하아…….”
알리사가 미간을 꾸욱 눌렀다.
그 눈가에 피로가 거멓게 끼어 있었다.
마르크스와의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 그녀는 왕도에 돌아오자마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 저번에 말씀하셨던 하늘을 나는 배, 서둘러 완성해 주십시오.
리하르트가 떠나기 전 했던 말 때문이었다.
“끄응. 배가 하늘을 나는 건 이론적으로만 가능한데…….”
마나를 주입하면 허공으로 떠오르는 마나석, 이른바 마나감응석을 이용하면 분명 하늘을 나는 배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저 하늘이 깨지기 전에 완성시키는 건 분명 요원한 일이었다.
짝!
미간을 꾹 누르던 그녀가 돌연 제 뺨을 내리쳤다.
번쩍 든 정신엔 리하르트의 부탁만이 맴돌았다.
“제자를 실망시켜서야 쓰겠나.”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마나 감응석의 제작이었다.
다행히 남대륙의 수많은 왕국이 마나석을 지원해 주었다.
알리사는 몇날 며칠에 걸쳐 수천 개의 마나석에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눈이 빠질 것 같구나…….”
우웅-
마나를 주입하기가 무섭게 까만 돌덩이들이 허공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출력 효율부터 시작하여 안전성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게다가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배의 제작뿐만이 아니었다.
“호르교의 수장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이용해, 그대들에게 대신관의 자격을 내리겠다.”
이따금 남대륙의 여러 왕국에서 인사들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알리사는 라플라스의 눈을 통해 그들의 심성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더 독실하게 신을 믿느냐보다 누가 더 선하고 올곧은지를 알아보았다.
이 또한 리하르트의 부탁 중에 하나였다.
찾아온 인사 중 악인이 있다면 돌려보내고, 심성이 올바른 자라면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신관의 자격을 내린다.
“…….”
라플라스의 국왕이자 대신관, 알리사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착실히 이행하고는 있으나, 어쩐지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대신관의 자격 요건은 율법을 지키며 타의 모범이 되는 자.
“흠, 억측이겠지.”
홀로 중얼거린 그녀가 다시금 눈가를 문지르며 배의 제작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알리사 마르크스.]
[맞습니까?]
순백의 날개를 매달은 여인이 그녀를 찾아왔다.
“리하르트의 기운을 품고 있구나. 그 아이가 보낸 게냐?”
알리사가 마나감응석에 시선을 집중한 채 물었다.
다만 익숙한 기운이 내심 반가운 것인지 입가에 미소가 내걸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중재자입니다.]
호오.
그제서야 알리사가 뒤를 돌았다.
“그래, 내게 무슨 말을 전하라고 했느냐.”
언뜻 기대심이 묻어나는 음성.
그에 반해 천사의 목소리는 철보다도 딱딱하기만 했다.
[‘방주’의 완성까지 얼마나 걸리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라고 명하셨습니다.]
“…….”
알리사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그 알 수 없는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천사가 말을 이었다.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서둘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거, 보채기는 엄청 보채는구나. 나는 말이 아니다. 채찍질 한다 해서 더 빨리 달리는 그런 생물이 아니란 말이다. 건방진 제자 같으니라고.”
고개를 휙 돌린 알리사가 신경질적으로 마나감응석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사의 표정이 일순 오묘해졌다.
그녀로부터 전해지는 신앙심은 분명 적잖은데, 신에 대한 태도가 무척이나 불경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천사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그만 가 보거라. 내 기필코 하늘이 깨지기 전까지 완성하고 말겠노라고 전해다…….”
불만을 가득 담아 말하던 알리사가 제 얼굴 옆으로 불쑥 튀어나온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엇이냐?”
몹시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반지.
피로에 쪄들어 있던 알리사의 안색이 그 빛을 쬐는 것만으로 제법 나아졌다.
[그분께서 전하라 하신 물건입니다.]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알리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천사는 그녀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녀는 리하르트에게 들은 그대로 전했을 뿐이었다.
“그 아이가 선물이라 했더냐? 역시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이로다.”
반지를 집어든 알리사가 쿡쿡, 숨죽여 웃었다.
천사의 우려와는 다르게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천사는 마지막 전언을 내뱉었다.
[예. 선물이라 하셨습니다.]
[피로 회복에 능한 물건이니 ‘방주’ 개발에 박차를 가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뚝.
알리사가 웃는 얼굴 그대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