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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79화 (179/216)

179화. Episode. 57 절반과 절반이 하나되어 (2)

본궁에 위치한 넓은 연회장.

좀처럼 쓰이지 않던 그곳에 각국의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의 차이는 대번에 구분되어질 정도로 명명백백했다.

우직한 얼굴로 연회장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지휘관이었으며, 오만한 눈을 한 이들은 왕족의 피를 이었거나 그에 준하는 대귀족들이었다.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한숨을 삼켰다.

지휘관들의 기상은 그나마 우직하다.

한데, 격변하는 정세에 대비하고자 찾아온 이들은 꼭 하이에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뒤룩뒤룩 굴려 대는 눈알은 기회주의자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고, 주름 잡힌 이마엔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귀공께선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오?”

“아직은 판단이 서지 않소. 당최 호르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음이니…….”

북대륙의 지배자, 바텐베르크.

그 영원할 것만 같던 대가문을 꺾고 북과 남을 아우르게 된 신흥 세력, 호르교.

호르교는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인가.

아니면 어둠이 드리운 하늘에 잠깐 반짝하고 사라져 버릴 별인가.

대귀족들은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게 꼭 어떤 줄이 더 튼튼하고 질긴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당장 하늘이 깨질 판인데.

하늘이 깨지면 줄이고 뭐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할 텐데.

속으로만 혀를 차던 바텐베르크의 기사, 애드런이 슬쩍 눈만 돌려 일국의 늙은 왕을 바라보았다.

성자와 친분이 있어 보이던 바렌의 국왕이었다.

호오.

그 늙은 왕의 몸에 흐르는 피는 저 하이에나 같은 자들처럼 고귀할진대, 우직하고도 담백한 태도는 어지간한 기사들보다도 더했다.

등장할 때부터 호르교의 깃을 치켜들고 나타났기 때문인지, 몇몇 왕족이 그에게 친근한 척 인사를 건넸다.

왕족이 아닌 귀족들은 귀를 활짝 연 채 몇 마디 말이라도 엿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드비히가 지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인사들이 허리를 접었다.

저벅저벅.

오랫동안 북대륙을 지배해 온 가장 고귀한 혈통이 그 사이를 걸었다.

수많은 왕족마저 굴복시키는 왕중왕.

그 걸음 소리마저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다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시장할 터이니 우선은 연회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사들이 저마다 악기를 켰다.

시종이 음식과 술을 나르고, 끊어져라 허리를 접었던 이들이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

루드비히는 연회장의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턱을 괴었다.

저기서 눈만 뒤룩 굴려 대고 있는 인간 군상들이 대체 누구를 찾는 것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호르교의 수장을 찾는 것이겠지.

다만 그 건방진 막내아들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다.

저들을 불러 모으라 한 것도 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히의 눈매가 살짝 비틀렸다.

아무래도, 무척 재미없고 지루한 연회가 될 것 같았다.

◈          ◈          ◈

“성자님. 벌써 연회가 시작되었답니다."

“그래? 너도 애들 데리고 어서 가 봐.”

기드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별 희한한 것을 다보는 듯 했다.

“……성자님께선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까?”

이럴 거면 요 며칠간의 실랑이는 쓸모없지 않았느냐며, 기드가 제 손에 들린 연회복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오, 저놈의 연회복이 대체 뭐라고.

“연회 사흘 동안 이어진다고 했지? 사흘 차에 참석할게. 그 옷도 입고 갈 테니까 청승맞은 표정 좀 짓지 마.”

“흠흠, 그러시다면야.”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다듬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데 어째서 마지막 날에 참석하시는 겁니까? 현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간이 촉박할 텐데 말입니다.”

나는 기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은은한 빛을 뿌리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심신이 절로 안정되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람을 추려야지.”

“예?”

“신앙심엔 제한이 없어도 신의 은혜는 아무에게나 내리지 않아.”

호르교를 그저 이용해 먹을 놈들.

득과 실을 가려내기 바쁜 놈들.

물론 사람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그런 이들이라고 내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간사한 이들도 조금 더 근사한 대의를 품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아줄을 내려줄 거야. 그럼에도 그들이 간만보기 바쁘다면…….”

“허허, 부탁드리건대 그렇게 웃지 마십시오. 믿을 사람도 못 믿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기드가 방을 떠났다.

나는 홀로 방안에 남아 차를 홀짝였다.

고급진 찻잔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냈을 즈음, 내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신안(神眼) - 발동.]

고풍스런 음악과 산해진미의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눈치만 살피는 인사들.

루드비히와 지크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무표정하기만 한 부자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을 난 알 수 있었다.

으음. 꽤나 지루한가 보네.

하기야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늘 높은 위상의 바텐베르크에게 쉬이 말을 걸어올 만큼 간 큰 작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음식과 술에 취해 본분을 망각할 자는 더더욱 없었고.

“…….”

“…….”

기껏 준비한 연회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이변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

저 과묵한 바텐베르크가 입을 열거나, 새로운 참가자가 연회장에 당도하기를.

그때였다.

벌컥, 열린 거대한 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속속 걸어 들어왔다.

모리츠를 필두로 한 기드와 아론, 그리고 템플나이츠를 대표하여 참가하기로 했던 폴크.

“히끅!”

기세 좋게 입장한 모리츠가 대뜸 딸꾹질을 했다.

들어서자마자 저에게 쏠린 시선이 그렇게도 부담스러웠던 걸까.

내가 다 창피해지는 모습에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모리츠 공, 사레라도 들렸나 보구려. 여기 물 한 잔 들이키시오.”

역시 현왕이다.

자연스레 물을 가져다주는 바렌티스 국왕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호르교의 사내들이 참석하고 난 이후의 연회는 조금이나마 활기를 띠었다.

다만 썩 좋아 보이는 활기는 아니었다.

“리하르트 공자님과 모리츠 공자님의 성취가 그리도 일취월장하셨다 들었습니다. 과연 두 분 공자님께선 바텐베르크의…….”

“오오, 귀공들이 바렌 왕국에서 펼친 활약상은 정말 감명 깊었소. 우리 또한 힘을 보태고 싶었으나…….”

특히나 어느 귀족이 바렌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을 때,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이던 모리츠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형제의 뒤틀린 속내가 손에 잡히듯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원을 간절히 바라 마지않던 바렌을 외면해 놓고선, 이제와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내뱉는 작태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자자, 모리츠 공. 무릇 기사라면 제때제때 양질의 음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겠소? 저기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있소.”

심기 뒤틀린 모리츠의 손을 바렌티스 국왕이 이끌었다.

아론과 기드, 폴크가 그를 거들었다.

음식 가득한 테이블로 향하는 그들에게 좌중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연회 첫날은 그렇게 탐색의 장으로서 지나갔다.

◈          ◈          ◈

연회 이틀차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묵묵히 자리만 지키던 각국의 지휘관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어떤 지휘관은 호르교와 바텐베르크의 관계를 떠보았다.

또 어떤 지휘관은 나의 참석 여부를 물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저들의 기강은 우직한데 그 누구 하나 하늘의 금에 대해 묻지를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문제라는 걸까.

곧 다가올 재앙과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걸까.

"리하르트보다, 호르교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지 않소.”

참다못한 모리츠가 저를 둘러싼 이들에게 툭 쏘아붙였다.

그러자 지휘관들과 귀족들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저들이 어떤 왕명을 받고 바텐베르크까지 찾아왔는지 알 만했다.

바텐베르크의 초대에는 응했으나, 전투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자들.

아마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곧 엄청난 대재앙이 일어날 거라고.

그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바텐베르크를 누르고 일어선 호르교란, 제법 튼튼해 보이는 동아줄이었다.

“호르교는 그대들을 지켜줄 방패가 아니오. 우습지도 않은 정치에 얽힐 세력도 아니오.”

모리츠 또한 그들의 기색을 읽은 듯 했다.

그들은 하나로 규합하여 난세에 대비하고자 찾아온 이들이 아니었다.

누가 제 나라를 보호해 줄 수 있는지, 어느 줄에 매달려야 콩고물이라도 한 줌 얻어먹을 수 있을지 알아내기 위해 발품을 팔았을 뿐이었다.

저 하늘의 금은 관심 밖, 저들과는 관련 없는 일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하늘의 금은 그렇게 묻어 두고 덮어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슬쩍 신안의 초점을 돌려 루드비히와 지크 쪽을 바라보았다.

북대륙의 방패이자 검, 바텐베르크라는 그늘은 크고도 짙었다.

수백 년을 그들 아래 굴복한 이들은 일어나 싸울 생각조차 쉬이 품지 못했다.

마법사와의 전면전은 대부분 바텐베르크가.

강대한 몬스터의 토벌 또한 바텐베르크가.

북대륙의 지배자는 자비로웠고, 적당한 보수를 지불하면 각국의 우환을 해결해 주었다.

북대륙의 방패였던 바렌을 제외하면, 그들은 꼭 사육당한 가축과도 같았다.

물론 바텐베르크가 그리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

다만 고작 수백 년의 독재 체제만으로도 이들은 주눅 들고 검을 신봉하던 기상을 잃고 말았다.

바텐베르크가 없었을 적, 첫 번째 성마대전이 벌어졌을 당시엔 모두가 훌륭한 검이었을진대.

“모리츠 도련님.”

기드가 조용히 내 형제를 타일렀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신안을 해제했다.

“흐음.”

신념에 확신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보살펴야 하는 세계는 옳지 않다.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보살폈다간 지금의 광경보다 더 심한 꼴을 볼 터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또 하나의 신념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지.”

저 뱀 같은 작자들은 아직 힘들지 않은 것이고.

난 기드가 두고 간 새까만 연회복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악연’을 등에 비껴 맸다.

계시는 저들에게 사치다.

우선은 저들이 그렇게나 묻어 두고 덮어 두고 싶어 하던 재앙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려 줄 생각이었다.

◈          ◈          ◈

벌컥.

고상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귀 밝은 지휘관들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문 사이 온통 검은 정장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피부와 새까만 머리칼, 날카로운 눈엔 정광이 흘렀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사내였다.

저벅저벅.

사내가 걸음걸음을 뗄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절로 그에게 모여 갔다.

저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들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리하르트!”

모리츠와 그의 측근들이 반가운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한때 망나니라 불리며 북대륙에 악명이 자자하던 리하르트가 저리도 변했단다.

온갖 귀족과 왕족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이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아라헬.”

리하르트가 웬 거대한 검을 빼들었다.

“보여 다오. 앞으로 펼쳐질 재앙을.”

꺄하-

섬뜩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두의 시야가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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