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Episode. 56 검집 속의 검으로서 살아온 이들아 (3)
발락이 다급히 별 위에 올라탔다.
폭풍과 낙뢰가 몰아치는 섬, 넋 놓고 있다간 눈먼 공격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꽈르릉-!
섬에서 물러나기가 무섭게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낙뢰 한 줄기가 틀어박혔다.
자연재해, 혹은 천재지변.
인간이 거스를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그것들은 발락으로 하여금 거대한 압도감을 느끼게 했다.
“리하르트……!”
한데 그 재해를 일으킨 것이 그의 제자였다.
일순 발락의 얼굴에 허탈함이 사무쳤다.
그가 살아온 나날은 제자를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더불어 검성의 후계자라는 자부심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말년에서야 리하르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리하르트가 별을 얻어 낼 때마다 발락은 뛸 듯이 기뻤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리하르트 또한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별과 함께 인생을 보내고, 후엔 훌륭한 제자를 받아들여 검성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할 것이라고.
그런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발락에겐 검성이 인생의 전부인데, 리하르트에겐 그저 수많은 힘의 가락 중 하나였다.
폭풍과 낙뢰, 빛과 어둠, 그리고 마법까지.
그것들 중 어느 하나 검성의 힘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발락은 처음으로 리하르트가 정녕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검이면 검, 마법이면 마법.
그 어떤 분야에서도 인간이 따라갈 수가 없는 존재.
마치 지고의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제 힘을 드러낸 리하르트는 전능에 가까웠다.
“역시.”
역사 깊다 여겨지던 섬은 울부짖다 못해 비명을 내질렀다.
점차 가라앉는 섬 위에서, 루드비히가 만룡의 검 자루를 말아 쥐었다.
“너에게 검이란 하나의 도구일 뿐이구나.”
루드비히와 발락은 검술 외길 인생으로 살아왔다.
언제나 검에만 매진하며 그 외의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리하르트의 힘에 감탄하기보다는 씁쓸함이 앞섰다.
자신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겐 많고 많은 도구 중 하나일 뿐이라니.
“실망하셨습니까?”
갑주 위로 신격을 발산하던 리하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저 궁금하구나.”
꽈릉-!
루드비히가 검을 휘둘러 낙뢰 한 줄기를 걷어 냈다.
애꿎은 섬이 비명 아닌 비명을 내질렀다.
“그 정도의 힘을 갖고도 너는 왜 조바심을 느끼고 있느냐.”
쏟아지는 낙뢰를 일일이 쳐냈다.
일검에 폭풍을 갈랐다.
루드비히는 재해 앞에 정면으로 맞서며 나아갔다.
“대체 저 하늘 너머의 적은 무엇이며, 얼마나 강하기에 너마저 그리 긴장했느냐.”
그 물음에 리하르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금이 조금 더 깊어진 것만 같았다.
“놈은…….”
무어라 답해야 할까.
말을 고르던 리하르트는 다시금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두었다.
“신에게 반대되는 존재입니다.”
호르는 빛이고, 마왕과 피조물들은 어둠이다.
그리하여 흑백의 균형이 맞추어졌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호르에 비견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닌가.
그중에서도 왕의 자리를 차지한 마왕과의 전투가 이제 코앞이다.
긴장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신과 반대되는 존재라. 호승심을 자극하는 말이로구나.”
루드비히가 검을 추켜들었다.
“내 모든 힘을 다하겠다.”
대결을 끝낼때가 되었다는 듯, 그의 기운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위에서 아래로.
만룡이 떨어진 궤적을 따라 짙은 남색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궤적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갈라내는 참격.
리하르트가 숨을 골랐다.
이윽고 그의 눈이 번뜩였을 때.
서걱-
온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던 남색 파도에 한 점의 빛이 파고들었다.
◈ ◈ ◈
모리츠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본가에 돌아온 것이 꽤나 오랜만이어서일까.
어릴 적부터 자주 거닐었던 중검궁의 산책로가 새로운 감회를 안겨다 주었다.
“흐흠.”
걸음걸음은 경쾌했고 가는 길목마다 화사한 꽃들이 모리츠를 맞이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풍경에 모리츠의 미소가 짙어졌다.
기분이 좋다.
그래서 입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용맹한 영웅이 되었노라. 후후…… 예전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 아암!”
갑자기 제 얼굴에 금칠을 하기 시작한 모리츠.
“하지만 아무리 용맹해졌어도 가슴 속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으니! 이 모리츠 님은 진정한 영웅의 상이올시다! 트란티스 후작의 책에도 분명 나의 업적들이 적힐 테지!”
모리츠는 때 아닌 감상에 젖어들고 말았다.
옛적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노라니, 자신의 성취가 고스란히 느껴진 것이었다.
물론 제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많이 변했고, 성장했으니까.
다만 대뜸 제 얼굴에 금칠을 하기엔 중검궁의 산책로는 너무도 탁 트인 곳이었다.
짝짝짝!
따사로운 봄날의 오후.
꽃밭 사이로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정한 영웅의 상이신 모리츠 공자님께 박수!”
모리츠의 뒤통수에 짓궂은 사내들의 음성이 틀어박혔다.
끼리릭-
소리가 날 것 같은 동작으로 모리츠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새빨갰다.
“왜, 왜……!”
왜 너희들이 여기 있느냐, 라는 질문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템플나이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이익, 나가! 여긴 내 거처야! 허락도 없이 들어오지 말란 말이야!”
난데없이 엄습해 오는 수치심에 모리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손을 거칠게 휘저으며 출구를 가리켰다.
하지만 건수를 잡은 템플나이츠는 집요했다.
“용맹하신 와중에도 평화를 사랑하시는 영웅을 모시러 왔습니다!”
템플나이츠 1군의 지휘관, 폴크가 장난스레 외치자 다른 기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렁그렁한 눈을 한 모리츠를 보며 전전긍긍해하는 건 바텐가의 기사들뿐이었다.
모리츠 공자 또한 고귀한 핏줄을 이으셨는데, 저들의 태도는 불경죄에 해당되지 않는가.
바텐베르크의 본가에서 바텐베르크의 혈통을 저리 짓궂게도 놀려 대는 기사들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랄 점은 모리츠는 수치스러워할지언정 기사들의 태도를 모욕적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들 간의 관계가 원체 격 없고 스스럼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크흠!”
꽃밭 사이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피어나는 가운데, 바텐가의 최상급 기사가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본래 목적을 상기한 폴크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모리츠 공자님. 바텐베르크의 가주께서 무언가 공표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본궁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공표?”
수치심에 몸서리치던 모리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하르트와 그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어디론가 훌쩍 떠난 게 엊그제였다.
“오늘 오전에 돌아오셨답니다.”
“리하르트도?”
“예.”
한데 그들의 표정이 당최 어떤지 모르겠다고, 폴크가 덧붙여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셨다 함은 분명 바텐베르크와 호르교에 관해서일 텐데, 그것이 잘 성사되었다 하기엔 성자님은 너무도 무덤덤하게만 보이셨습니다. 그렇다고 결렬되었다기엔 그리 나빠 보이지도 않았고.”
“그 녀석 포커페이스가 어디 하루 이틀이냐. 이야기는 잘됐을 거야.”
알쏭달쏭하다며 턱을 짚는 기사들에게, 모리츠가 단호히 말했다.
그 어조에 믿음이 어찌나 가득하던지.
템플나이츠의 사내들이 오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인가 봅니다.”
내내 묵묵히 입 다물고 있던 아론이 기껍다는 듯 한 마디 거들었다.
“으으, 그만! 얼른 가자고.”
모리츠가 빨개진 얼굴로 본궁을 향해 앞장섰다.
◈ ◈ ◈
본궁 앞에 명검들이 늘어섰다.
창밖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저 멀리 모리츠와 템플나이츠가 대열의 한 켠에 자리를 잡는 게 보였다.
흠.
바텐베르크가 자랑하는 명검들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 오히려 더욱 뛰어난 호르교의 정예들.
이렇게 한데 모아놓고 보니 새삼 배가 부르는 기분이었다.
“가주님, 모두 모였습니다.”
레오가 루드비히에게 고했다.
고개를 끄덕인 루드비히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를 보았다.
그 눈에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가자꾸나.”
발락이 뒷짐을 쥐고선 내 옆에 섰다.
레오와 루드비히가 앞서 본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슬쩍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검과 바텐베르크를 위해 살아온 사내.
지금 심정이 어떠시려나.
홀로 자문할 때였다.
“……?”
루드비히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얼굴은 무표정한데 나를 담은 눈빛은 무척 뜨겁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루드비히에게서 그리 부정적인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쿵! 쿵!
우리가 본궁을 빠져나왔을 때, 거대한 군기가 솟구쳤다.
입구 앞에 도열한 기사들이 발을 구르며 루드비히에게 검례를 취했다.
“바텐베르크의 검들이여.”
루드비히는 자신이 거느린 검들 앞에 선채로, 덤덤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바텐베르크는 호르교를 가문의 종교로서 삼을 것이다.”
마나 실은 음성이 멀리멀리 퍼진다.
검 하나 믿고 살아온 사내들의 가슴에도 파문이 퍼졌다.
“곧 하늘이 깨지고 강대한 괴물들이 쳐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호르교를 도와 이 세상을 지켜야만 한다. 그 책임과 의무는 북대륙의 모든 무가(武家)들에게도 해당된다.”
누대에 걸쳐 검술제일가의 자리를 지켰다.
북대륙에서 검술제일가라는 명성은 하늘보다 높은 꼭대기의 서열과 일맥상통했다.
초대 가주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텐베르크는 북대륙의 지배자였다.
그런 고귀하고도 위엄 있는 가문의 수장이 호르교를 도와 세상을 지키겠노라 밝히고 있었다.
한데 그 어조가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그건 마치.
“……!”
눈을 부릅뜬 기사들이 애써 숨을 삼켰다.
퍽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때, 루드비히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이리 오시오. 호르교의 군주여.”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펴고, 턱을 당겼다.
그리 했을 뿐인데 바텐베르크의 공기가 나를 중심으로 흘렀다.
“그대들에게 또 하나의 사실을 고하겠다.”
내게 시선이 쏠린 가운데.
루드비히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여기서 더 할 얘기가 남았던가.
궁금증이 일어 그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 또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척 뜨겁고 진한, 당최 저의를 알수없는 눈빛이었다.
“내게 주어진 대륙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를, 오늘부로 반납하겠다.”
마나 실은 음성이 이번엔 내 가슴에 파문을 퍼트렸다.
이 아저씨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