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Episode. 56 검집 속의 검으로서 살아온 이들아 (1)
초대 검성과 검황, 그들에게 있어 무척 특별했던 장소.
흉터 빼곡한 섬을 바라보는 발락의 시선이 한없이 깊어졌다.
쉬익.
감회가 새로운 건 발락뿐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섬이 가느다랗게 흐느꼈다.
쉬이이익-
바람결이 깎이고 패인 상처들을 스칠 때마다 그곳은 구슬피 울었다.
“여기가 정말 초대의…….”
발락이 별에서 내려서며 중얼거렸다.
발락조차도 초대 검성에 관한 이야기는 제 스승에게 들은 몇 마디 구전 설화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검성의 시조는 끝끝내 열두 자루의 별을 다뤘다더라.
인간의 한계를 넘은 초월자의 반열에 들었다더라.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수십 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의문이 다시금 꿈틀거려서, 그는 섬의 상처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저토록 깊디깊은 자상(疵傷)은 바텐가의 비전검술이 스쳐 간 흔적일 테지.
아, 저 거대한 구멍은 폭성(爆星)이 터진 자리가 틀림없다.
섬에 남겨진 흔적들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머릿속에서 선조들의 대결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
루드비히 또한 발락만큼이나 성마른 눈빛으로 섬을 살펴보았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어떤 상처는 깊고 단면이 매끄럽다.
또 어떤 상처는 비교적 얕고 거칠다.
두 최강자가 대결을 거듭하며 서로간의 성장을 도모한 흔적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는 게냐.”
리하르트에게 두 사내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
그 앞에 리하르트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호르께서 주선해 주신 자리입니다. 저와 루드비히 경이 대결을 치르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죠.”
곤란한 질문을 둘러대기에 신만큼 편한 핑계거리는 또 없었다.
뚝, 뚜둑-
목을 이리저리 꺾어 대며 분위기를 전환시킨 그가 ‘악연’을 빼들었다.
“유적지나 감상하고자 여기까지 날아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감상보다는 맘껏 날뛸 장소가 필요해서 온 거지.
리하르트의 목소리에 점차 열기가 스며들었다.
며칠을 굶다가 마침내 만찬을 앞둔, 몹시 허기진 자의 음성이었다.
“……건방진 것.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루드비히가 나직이 아들을 꾸짖었다.
그의 눈에 비친 리하르트는 꼭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단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성취를 얻게 된 경위는 모르겠으나, 어린 나이에 최강의 반열에 올랐으니 온 천하가 제 발 아래에 놓였다 느껴질 테지.
다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 했다.
“천외천(天外天)이 무엇인지 내 직접 알려주마.”
한 번쯤은 기를 눌러 줄 필요도 있겠지.
패배란 오묘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굴복시키기도 하는 반면, 또 어떨 때는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도와주기도 한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막내가 후자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스릉-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수도 없이 많은 용들을 갈아 넣어 만든, 바텐베르크의 보검, 만룡(萬龍).
“제가 먼저 갑니다.”
만룡의 오색찬란한 자태가 불씨를 당긴 걸까.
리하르트가 거칠게 땅을 박찼다.
번들거리는 눈, 그 안에 호승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 ◈ ◈
쾅!
악연과 만룡이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허공에서 얽혀든 두 검날 사이로 예기(銳氣)가 솟구쳤다.
티끌만한 마나조차 담기지 않은, 순수한 검격.
다만 그 안에 상대를 참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넘치도록 흘러서, 멀찍이 떨어진 발락의 피부까지 저릿거렸다.
쾅!
검과 검이 맞부딪 칠때마다 광풍이 일었다.
그리고 그 광풍은 쉴 새 없이 섬을 울렸다.
쉬익! 쉬이익!
선선한 바람결의 울음과는 또 다른 소리.
마치 섬 자체가 두 사람의 대결을 반가워하듯 목청을 드높이는 것 같았다.
“흡!"
악연이 만룡의 검신을 기어올랐다.
그대로 검을 쥔 손을 베어 내겠다는 속셈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검격에 루드비히가 검을 떨쳤다.
다만 악연이라 함은 무릇 집요한 구석이 있는 법.
만룡을 기어오르는 흑백의 검날은 꼭 뱀처럼 끈질겼다.
그 순간 루드비히의 팔뚝과 손목이 꿈틀거렸다.
카드득-
이번엔 만룡이 악연을 휘감았다.
두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은 분명 올곧게 뻗은 직검일진대, 흐르는 물처럼 서로의 검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삽시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쾅!
강검은 강검으로.
카가각!
유검은 유검으로.
드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들의 검은 변화무쌍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쯧! 저 빌어먹을 놈들이 애꿎은 늙은이 심장만 괴롭히는군.”
발락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고 있었다.
구경만 하고 있자니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가 끓어올랐다.
둘의 대결에 반대를 펼치고 들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서로 눈만 마주쳐도 검을 뽑아들었던 발락과 루드비히는, 해가 갈수록 자웅을 겨루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마저도 이젠 몇 년 전의 싱거운 대련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자신은 늙었으니까.
루드비히와 비등비등했던 자신의 검과 별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게 피부에 와닿았으니까.
호적수가 더는 호적수가 아니게 되는 것.
그건 루드비히와 발락, 둘에게 무척이나 씁쓸하고도 서글픈 일이었다.
한데 지금은 자신의 제자가 옛 호적수와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저가 남긴 단 하나의 유산이, 그 루드비히에게 닿고 있었다.
혹시나 제자의 성장에 해가 되지는 않을지 우려가 되는 와중에도 가슴 한 켠으로는 기꺼움이 사무쳤다.
“……고맙구나, 리하르트야.”
진심이 담긴 발락의 음성은 허공에 나타난 별의 소음에 묻혔다.
고오오-
리하르트 주변에 피어난 여덟의 별.
어느샌가 악연에도 밀도 높은 오러가 넘실거렸다.
“탐색전은 그만.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신앙 섞인 음성이 루드비히를 자극했다.
줄곧 덤덤한 얼굴로 검을 섞던 루드비히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은 채 굳어지지 못한 모래성인 줄 알았건만.
그래도 자신과 검을 섞을 수는 있는 모양이라고.
과연 너는 어디까지 받아 낼 수 있을까.
막내를 향한 대견함 속에 호승심과 호기심이 일렁였다.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이겠구나.”
루드비히가 만룡을 양손으로 쥔 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쿵.
리하르트는 심장이 일순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섬을 둘러싼 공기가 삽시간에 돌변하기 시작했다.
“바텐베르크의 가주에게만 허락된 검술이다.”
초대 가주 검황이 창안하여 현재까지 이른 최강의 검.
검술제일가, 바텐베르크의 근간.
“검(劍).”
루드비히가 그 검술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의 육신에서부터 오러가 폭발했다.
범람하는 오러 속에, 베고자 하는 것을 베고 말겠다는 의지가 섞여 들었다.
루드비히의 장대한 오러가 상처투성이 섬을 뒤덮었다.
그 순간부터는 섬 자체가 그의 사정권이었다.
검을 아로 긋는다면 섬의 모든 나무와 바위가 동강 날 것이고, 세로로 긋는다면 섬 위 하늘이 갈라질 것이다.
바텐베르크의 검은 그런 힘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검황께선 작명에 영 소질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대단한 검술을 두고 그냥 검이 뭡니까.
리하르트가 너스레를 떨었다.
◈ ◈ ◈
루드비히가 가슴 앞에 세웠던 검을 늘어트렸다.
그 검 끝이 향한 궤적의 땅이 쩍- 갈라졌다.
빌어먹을.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거, 검이 아니라 고밀도로 응축된 레이저가 아닐까.
저 검술 앞에서 어설픈 방어 행위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검격이 한 점 손상 없이 온 섬을 아우르니, 목가에 칼끝이 드리운 기분이었다.
차라리 공간 지배에 가까운 힘.
“……?”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데, 시야 한 켠이 요란스러웠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루드비히 뒤편에 선 발락이 웬 이상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무언가를 뒤집어쓰는 시늉.
제 목가로 오른 손날을 긋더니, 그걸 또 왼손가락의 끝을 모아 막는 시늉.
마지막으로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구불구불한 모양새를 그려댔다.
갑주, 별, 사슬.
“아하.”
저 양반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잡혔다.
그래. 루드비히가 공간을 지배한다면 나는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면 될 일이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갈수록 노망이 심해지는 건가.”
루드비히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건지 혀를 끌끌 차기 바빴다.
나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이 대결을 허무히 끝내고 싶지는 않구나. 어서 준비하거라.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려무나.”
“생각보다 관대하십니다.”
오만이 뚝뚝 묻어나는 루드비히에게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악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먼저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전유물부터.
콰드득-
악연을 휘감은 오러가 검 자루를 타고 내 몸을 집어삼켰다.
내 육신에 빛의 갑주가 들어찬 것은 순식간이었다.
“호오. 생각보다 견고한 갑주군.”
환영 속에서 실전 아닌 실전을 거듭하며 미친 듯이 수련한 덕이었다.
“루드비히 경께선 갑주는 안 입으실 겁니까?”
“그럴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로구나.”
후회하지 말라지.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발락과 루드비히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저들에게 내 힘은 어쩌다 한순간에 얻어 버린, 근본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힘으로만 비춰지겠지.
쿠득.
빛의 갑주를 입고는 한 걸음 나아갔다.
“아로 베겠다. 막아 보거라.”
루드비히는 그답지 않게 유난히 친절해서, 친히 공격을 예고하기까지 했다.
그가 제자리에서 선채로 검을 그었다.
나는 악연과 여덟 별의 끝을 그 궤적에 가져다 댔다.
검 끝을 타고 오르는 거센 충격, 그리고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
나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반으로 갈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이것이 루드비히의 전력은 아니겠으나, 이정도라면 막아 내는 데 무리가 없었다.
촤르륵-
드라우프니르의 여덟 사슬을 전부 풀어헤쳤다.
콱.
콰각.
루드비히는 산보라도 나온 듯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사슬과 별이 요동을 쳤다.
나는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꽤나 고생했는데. 마냥 한순간에 얻은 건 아닌데.”
별안간에 헛소리를 늘어놓는 내게 루드비히와 발락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두 발자국.
두 발자국만 더 가면 악연이 닿을 거리.
그곳에서 나는 멈춰 섰다.
『끄흐흐…….』
빛으로 가득찬 악연의 한쪽 날에서 어둠이 새어나왔다.
이내, 두 색이 뒤섞여 회색 빛깔 기운이 흉성을 드러냈다.
“세로로 벱니다. 어디 한번 막아 보십쇼.”
“……!”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걸까.
표정을 굳힌 루드비히가 검을 치켜들었다.
다만 흉포한 회색 참격은 루드비히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뻥인데.”
방금 그 공격, 직격했으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크게 화를 입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힘, 혼돈은 인간이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도 이 대련에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갑옷. 꺼내 입으십쇼.”
다만 경고의 의미로서는 안성맞춤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