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Episode. 55 부흥 (2)
거대한 군기.
나와 템플나이츠를 찍어 누르는 듯한 사내들의 기세였다.
스릉-
그중 선두에 선 자들이 칼을 빼들었다.
하나하나가 익숙한 얼굴들, 제1기사단의 사내들이었다.
“호르교의 수장이여! 바텐베르크의 영역을 찾은 목적을 밝혀라!”
마나 섞인 쩌렁쩌렁한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차라리 윽박지름에 가까운 그 소리에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쯧, 되도 않는 짓거리들을 하는구나.”
“당연한 절차 아니겠습니까.”
대뜸 날아와 저 앞에서부터 함께한 발락에게 그리 말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와 모리츠는 옛적에 바텐베르크의 호적에서 지워진 바, 이 땅에 다시 설 적에 저들이 경계심을 드러내리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물며 옛 제3기사단, 지금은 템플나이츠의 1군이 된 사내들까지 함께 대동했으니.
쿵!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발을 굴렀다.
한층 더 거세진 군기가 요동을 치며 나를 압박해 왔다.
머리털이 가시처럼 곤두섰다.
저들은 그저 경계심을 드높였을 뿐인데,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과연 검술제일가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기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기상에 군침까지 돌았다.
“목적을 밝히라 하였다!”
제1기사단의 사내들이 뿜어내는, 검과도 같은 기운.
그 뒤편에 대열을 이루고 선 기사들 또한 어디 가서 완장을 꿰차지 못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탐이 났다.
마치 잘 차려진 잔칫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묵묵히 서 있던 나는 느즈막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군주에게 받을 것이 있어 찾아왔다.”
받을 것.
그것은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 루드비히와 약조했던 것.
내기의 승패는 이미 판가름 났다고 판단되는 바, 눈앞의 바텐베르크는 진즉 내 손안에 쥐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텐베르크를 먹으면 북대륙을 얻는다.
라플라스를 선두로 한 남대륙에 더불어 북대륙마저 얻는다면, 그것이 곧 호르교의 ‘부흥’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처럼 온 세상에 신앙이 들끓게 될 테지.
나는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앞에 정면으로 걸었다.
템플나이츠가 내 뒤를 따랐다.
저들이 계속 우리 앞을 막고 선다면 뚫고 지나가면 될 일이다.
그것 또한 호르교가 바텐베르크를 넘어섰다는 증거가 될 터이니.
그리 생각하며 격을 끌어올리고자 할 때였다.
“기사들은 길을 터라. 가주께서 허가를 내리셨다.”
귀에 익은 음성이 바텐베르크의 사내들을 물렸다.
홍해처럼 갈라진 사내들 사이로 웬 미남자가 서 있었다.
“그대들도 객으로서의 예를 갖춰 주시오, 호르의 신도들이여.”
붉은 역병 거인을 참살하는 데에 일조했던, 바텐베르크의 두번째 혈통.
지크 바텐베르크가 짐짓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다만 그 눈가에 흠뻑 묻어나는 반가움만큼은 숨길 도리가 없어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연기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지.”
갈라져 대열을 이루고 선 사내들 사이를 걸었다.
막 그 선두를 지나쳐갈 때쯤, 까불거리는 인삿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보고 싶었지 말입니다.”
제1기사단의 막내, 애드런.
서글서글 웃어 대는 그를 필두로 온갖 환영 인사가 쏟아졌다.
여전히 바보 같은 놈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다, 본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사들을 대기시켰다.
루드비히와 마주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끼리의 대면.
그리고, 그랜드 소드마스터끼리의 대면.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본궁의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강맹한 기운이 내 피부를 저며 왔다.
이것은 시험인가, 아니면 순수한 호승심인가.
둘 중 무엇이든 간에 내가 버티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바텐베르크의 가주, 루드비히 경. 오랜만에 보오.”
어깨를 펴고, 허리는 한껏 곧추세웠다.
치켜든 턱에는 권위를 담았다.
나는 그렇게 북대륙의 지배자와 마주했다.
◈ ◈ ◈
하.
루드비히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보다 조금 더 일찍, 그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부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하르트의 건방진 작태는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다.
같잖기 그지없는 도발.
다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업신여김 당해 본 적 없는 루드비히에겐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쿠구구-
그의 몸을 타고 칼날 같은 예기(銳氣)가 줄기줄기 터져 나왔다.
그에 질세라 리하르트 또한 빛 섞인 격을 꺼내 들었다.
‘서, 성자님……!’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에 방 한구석에 시립한 레오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다만 그렇게 노심초사하는 것도 아주 잠시였다.
쿠구국-!
점점 더 상승하는 루드비히의 기세에 맞춰, 리하르트의 빛 또한 그 밝기를 더해 갔다.
그게 마치 나 또한 당신과 같은 격을 갖추었노라- 온몸으로 외치는 듯했다.
‘여덟 자루의 별을 얻으셨다더니…….’
레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멀끔한 얼굴에 땀이 흘러내렸다.
너무도 단기간에 일궈 낸 비정상적인 성취.
기반을 착실히 다지지 못한 채 이뤄 낸 급격한 성장은 어린아이가 칼을 쥔 것과 같다.
힘은 있어도 정신이 그만큼 여물지 못한.
루드비히는 그것을 두고 덩치만 비대하게 부풀린 것이라 말하였고, 레오 또한 동의했다.
성장은 했으되 그 힘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소요되리라고.
한데 눈앞에 나타난 성자에게선 덩치만 커진 어린아이의 모습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저 완숙한 사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 내 앞에서 건방을 떨 만큼은 되는구나.”
루드비히가 덤덤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서서히 가라앉는 두 사내의 기세.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그들 사이로 적막이 맴돌았다.
“바텐베르크의 가주시여. 하늘을 보셨을 겁니다. 제 스승님으로부터 이야기 또한 들으셨을 테지요.”
장난인지 도발인지 모를 태도를 멈춘 걸까.
자세를 바로 한 리하르트가 대화에 물꼬를 틀었다.
“보았고. 들었다.”
“보셨고, 들으셨는데 어찌하여 북대륙의 병력을 규합하지 않으셨습니까.”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네 명령에 따라야만 하더냐?”
루드비히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몹시 건방지다. 벌써부터 네놈이 바텐베르크를 넘어선 듯 행동하지 말거라.”
조용한 일갈.
웬만한 기사라면 대번에 압도당할 그 일갈 앞에 리하르트가 다가섰다.
“북대륙의 바렌 왕국과 프로트 왕국, 그리고 남대륙의 모든 국가들. 그들 모두 호르교의 깃발 아래에 모여들었습니다.”
대륙 하나를 더하고도 두 개의 왕국을 얻었다.
이래도 호르교가 바텐베르크를 넘어서지 못했느냐고.
리하르트는 그리 묻는 것 같았다.
그에 루드비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영향력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군. 언제부터 그것이 몸집을 뜻하게 되었지?”
나직한 물음에 리하르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남대륙에서 바텐베르크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다. 북대륙에서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지.”
그들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남대륙은 공포를 느끼고.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북대륙은 거대한 칼과 방패를 얻은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바텐베르크라는 가문이 가지는 영향력이었다.
신흥 세력이 맞먹으려 들기엔 터무니없이 높은 권위와 위세.
역설적이게도 북대륙에서 궐기한 호르교는 남대륙에서 큰 성장을 이루고 말았다.
즉, 아직까지도 마법사들에게 적대적인 북대륙 내에선 그 영향력이 바텐베르크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그 점을 꼬집을 줄이야.
리하르트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치사하게 나오시는군요. 저 하늘이 깨어지고 난 후엔 모든 이들이 빛을 찾을 겁니다. 그때는 세상의 중심에 호르교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에 선 뒤에 다시 찾아오거라.”
“정녕 수많은 이들이 무차별하게 죽기를 바라십니까? 바텐베르크가 힘을 실어 준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딱딱하게 굳은 눈가에 분기가 뒤섞였다.
무엇이 그리도 필사적이란 말인가.
루드비히는 제 아들에게서 깊디깊은 절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건 당장 이 상황을 두고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하늘을 깨트리고 나타날 마계의 존재들을 향한 절박함이었다.
우스웠다.
너무 우스워서 루드비히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아들에겐 바텐베르크 따윈 절박함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반드시 얻어야만 하고, 또 마음만 먹으면 능히 얻어 낼 수 있는 것.
천하를 반으로 갈라 지배하던 바텐베르크가, 리하르트에겐 고작 잠시 거쳐 가는 이정표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위에 서고자 하는 이 가문은, 수많은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섰다. 바텐베르크를 원한다면 그만큼의 성의와 자격을 보여라.”
루드비히, 그 또한 일생을 바쳐 바텐베르크를 이끌었다.
루드비히에게 있어서, 바텐베르크는 세상 그 자체였다.
아무리 리하르트가 무고한 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호소한다고 한들 이것은 도저히 용납 못할 행동이었다.
루드비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그는 인간일진대, 그가 선 자리에 거인 같은 존재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정녕 갖고 싶다면 싸워서 빼앗아 보란 말이다. 나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없을 터.”
북대륙의 지배자는 당돌한 성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로 했다.
자신을 꺾는다면 호르교를 북과 남을 아우르는 지배자로서 인정할 것이고.
꺾지 못한다면 바텐베르크 밑에 호르교가 자리할 것이다.
“좋습니다. 그 말씀 잊지 마십시오.”
리하르트와 루드비히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레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
레오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갸웃했다.
갑작스레 성사된 대결만으로도 넋이 빠질 지경인데, 그 당사자들이 저를 빤히 보고만 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저는 중립입니다! 고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벽 하나의 두께를, 레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그랜드라는 경지의 문턱을 밟지 못한 레오로서는 그야말로 고래 싸움이었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저희 대결에 왜 레오 경을 끌어들이겠습니까?”
뒷걸음질을 치며 손을 내젓는 그에게 리하르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참관인.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물론 제 스승님께도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아!”
레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에 오른 자들의 대결.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성취를 꾀할 수 있는 아주 귀한 기회였다.
“한데 대체 어디서 대결을 하실 겁니까? 두 분의 힘을 쏟아부어도 될 만한 곳은…”
레오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마침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