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Episode. 55 부흥 (1)
마법사들과 교전을 치르던 리치들이 전부 소멸한 이상, 전장의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왕도 앞을 가득 메웠던 시체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되는 데에는 네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승리했다!”
“호-르! 호-르!”
격전 끝에 살아남은 자들의 함성이 온 세상을 울려 댔다.
목청을 드높이며 함성을 내지르는 자들 사이에서, 다만 알리사와 앨런은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가 서 있던 곳.
그렇게 홀로 서 있다 한줌 뼛가루가 되어 사라진 곳.
그 자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앨런, 스승님.”
언제 다가온 것일까.
리하르트가 그들의 어깨를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손길엔 진심 어린 걱정이 적잖게 담긴 채였다.
알리사가 아비의 묫자리에서 시선을 떼어 내곤, 리하르트를 눈에 담았다.
이내 그녀의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갔다.
“그 질문을 이제는 네가 하는구나.’
괜찮냐는 물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리사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괜찮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리 묻는 건, 부디 힘든 내색을 드러내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같았다.
그들의 어깨에 놓인 짐은 적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괜찮단다. 이제와 슬퍼하기엔 너무도 많은 죽음을 보지 않았느냐.”
남대륙의 수많은 세력이 라플라스와 호르교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르크스가 자랑하던 마법제일가라는 명성은 이제 옛 것이 되었으며, 새로운 남대륙의 지배자는 라플라스가 될 터였다.
막중한 자리에 올라선 그들에게 슬퍼할 시간 따윈 없었다.
“…….”
리하르트가 금이 갈라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균열이 완전히 열릴 때, 이들은 또 다시 많은 죽음을 직면하리라.
서둘러 대비해야만 한다.
그의 눈에 각오가 차오를 때였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앨런이 툭 내뱉었다.
“네놈이 말한 군단장이란 것들은 대체 어디로 갔지?”
슥-
리하르트가 조용히 ‘악연’을 들어 올렸다.
그 까만 날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대한 마기에 앨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마기를 혐오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겠구나.”
알리사는 라플라스의 눈을 켠 채 리하르트와 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검에 갇힌 강대한 영혼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버린 리하르트의 영혼.
이 모두 짧은 시간에 일궈 낸 변화라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음,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조금 바쁠 것 같아서.”
리하르트가 질린 음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기사들이 그에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저들을 걱정시킨 성자를 향해 분노를 한껏 표출하며.
◈ ◈ ◈
티폰 왕국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제는 언데드마저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죽은 왕국에 불과했다.
승전의 기쁨도 잠시.
기사와 마법사들은 그 폐허들을 가로지르며 수도 없이 생각했다.
저 하늘의 균열이 열릴 때, 자신들이 막지 않으면 이러한 폐허가 온 세상에 가득 찰 것이라고.
그건 결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각국의 지휘관들은 리하르트를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희는 호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빛을 온몸으로 느꼈으니, 앞으로도 진실된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겠습니다.”
각국에서 모여든 군단들은 자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항상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리하르트는 그럴때면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간은 힘들때 신을 찾는다.
어둠이 도적처럼 찾아올 것을 하늘에 예고했음이니, 호르교는 비로소 인류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북대륙이군. 뭐, 발락이 잘 말해 줬겠지.’
이번 전쟁에서 발락은 참전하지 않았다.
그는 호르를 섬기지도 않으며, 남대륙에 뿌리를 둔 인물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외부인.
그가 나설 전쟁은 이 다음이었다.
입이 댓발 튀어나온 채 떠났던 발락을 떠올린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뚜둑, 꺾었다.
‘루드비히. 그 꽉 막힌 양반을 만날 때가 왔구나.’
라플라스로 복귀하는 길은 무척 길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인 군단들이 하나둘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니, 마침내 라플라스와 리오 성의 사내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라플라스의 국경선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함께 했으면 길동무의 역할도 충분했으리라.
“스승님. 그럼 저희도 이만 북대륙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리하르트가 대뜸 작별을 고했다.
“……너도 가 버리는게냐?”
묵묵히 앞만 보고 걷던 알리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애써 숨긴다고 숨긴 듯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전부 다 끝난 건 아니니까요. 최대한 시간을 아껴써야지요.”
“그래도 큰일을 하나 끝냈는데 곧바로 떠나는건 너무 매정하지 않느냐. 네게 가르쳐 주고 싶은 마법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단다.”
리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처럼 붙잡아 대는 그녀의 모습이 의외였던 탓이었다.
다만 리하르트는 매정한 남자였다.
“어차피 금방 다시 마주할 날이 올 겁니다.”
“…….”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그에게, 알리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약속하거라.”
“예?”
“다음에 만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다오.”
뭐. 그 정도쯤이야.
◈ ◈ ◈
새하얀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니, 리오 성의 기사들이 그 위에 성큼 올라섰다.
“좀 더 달콤한 말을 해 주실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냉정하게 뒤돌아서신 것 아닙니까.”
하늘길을 한참 걸어갈 때였다.
아발트가 돌연 헛소리를 시전했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당최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반문하는데, 아발트의 얼굴이 은근히 기분 나쁘게 생겨 먹었다.
의미심장한 웃음과 얼굴 옆으로 치켜든 새끼 손가락.
손가락을 확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뭐야? 뭔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흐흐.
아발트는 대꾸 없이 실실 웃기만 했다.
이놈, 난리통에 언데드한테 물린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고 있노라니, 뒷편의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장에도 꽃은 핀다더니! 거, 달달해서 죽겠사옵니다-!”
“우리 성자님께도 봄날이 왔구나!”
하늘길 위에 나만 빼고 축제가 일어난 듯 했다.
아니, 이게 대체 웬 난리람.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모리츠에게 입을 열었다.
“야, 얘네들은 왜 쌩뚱맞게 봄날 타령을…”
그런데 모리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입 닥쳐, 이 빌어먹을 놈아.”
쌩-
어째선지 몹시 화가 난 듯한 모리츠가 쌩하니 나를 지나쳐갔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
왜일까.
모리츠는 왜 화가 났고, 기사들은 왜 신이 났을까.
“모리츠 공자님, 원래 첫사랑은 가슴 아픈 법입니다.”
기드가 새삼 진지한 얼굴로 모리츠의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보나마나 이 마초들은 나와 알리사의 관계를 오해한 것이리라.
바보 같은 놈들.
우리는 그냥 스승과 제자 관계인데.
‘내버려 두자.’
나는 굳이 나서서 부정하지 않았다.
꼭 알리사와의 열애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큰 전투 후엔 알게 모르게 심리적 후유증이 남기 마련이다.
그 후유증을 치료하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억지로라도 웃는 것이었다.
알리사도 이 상황이었다면 나처럼 가만히 있었겠지.
“그래도 좀 적당히 웃어! 명색이 템플나이츠가 체통이 없냐!”
다만 나만 빼고 웃어 대는 기사들이 퍽 재수 없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빛 닿는 곳을 따라 하늘 위를 걸어가니, 어느새 하늘길의 끝이 리오 성에 걸쳤다.
“템플나이츠 1군은 말에 탑승한 채 북문으로 집결한다!”
나는 본래 바텐베르크의 검이었던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 내게 오르드 성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왕도로 가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희는 바텐베르크로 향할 겁니다. 우선 급한 일부터 끝내야지요.”
“알겠습니다. 성자님, 다시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성주와 기사들을 비롯해 스노우폴의 선지자들과 트란티스 후작이 큰 아쉬움을 표했다.
나와 제1군은 그들을 뒤로하고 리오 성의 북문을 빠져나왔다.
중간중간 들린 영지나 왕도에선 하루라도 묵고 갈 것을 권유했으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니, 시간보다는 내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말이 알맞을 터.
날이 갈수록 하늘의 금이 깊어지는 마당에 쉬고 싶은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 ◈ ◈
리하르트가 여덟 자루의 별을 얻었단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루드비히는 실로 오래간만에 경악이란 것을 느끼고 말았다.
“요즘 들어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십니다.”
그는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점을 레오가 꼬집자,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오고 있구나. 집 나간 녀석들이 말이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건방지게도 내 기감을 자극하면서 말이다.”
루드비히는 문득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입가에 걸린 사나운 미소.
근방에서부터 느껴지는 막내의 기운에 절로 피어난 미소였다.
“왔구나, 왔어!”
의자에 앉아 성수나 홀짝이던 발락이 벌떡 일어섰다.
“흠흠. 내 사랑스런 제자가 오고 있으니 마중을 안 나갈 수가 없구나.”
몇 번 헛기침을 터트린 그가 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내 별에 올라탄 발락의 뒷모습이 점처럼 빠르게 사라져 갔다.
체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민망한 표정을 짓던 레오가 힐끔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가주님께선 심정이 어떠십니까?”
“무엇이 말이냐?”
“막내 도련님께서 괄목상대할 성취를 이루신 것. 그리고 이제는 바텐베르크를 위협할 만큼의 세력을 꾸리신 것 말입니다.”
심정이 어떠하냐…… 라.
툭, 툭-
루드비히의 손가락이 창가를 두드렸다.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창에 비친 미소는 점점 더 사나운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드득-
방안의 모든 것이 깨질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놈의 성취든, 세력이든. 그저 덩치만 부풀린 것에 불과하다면 결코 바텐베르크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레오가 슬그머니 웃었다.
저토록 즐거워 보이는 가주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