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Episode. 54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3)
리치들의 안광이 음울하게 일렁거렸다.
이제는 어둠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마르크스.
어둠을 섬긴 자의 말로는 이렇듯 한낱 장기말이 되는 것에 불과했다.
콰앙-!
수도 없이 쏟아지는 마법을 요격하고, 곧바로 반격을 가한다.
요란한 폭음이 전장의 상공에서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
가장 화려한 옷, 가장 흉흉한 마기를 품은 리치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앙상한 손뼈가 애처롭다.
분명 이 손에 빛이 가득했는데, 어째선지 지금은 애처롭기만 했다.
영혼 깊숙한 곳을 보듬어 주던 그 찬란한 빛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기계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반복하면서도, 리치 바펠의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째서 싸우고 있는 건지.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건지 바펠은 알지 못했다.
눈앞이 흐릿했다.
저 멀리, 아른거리는 적들의 모습이 어떨 때는 빛으로 보였다.
또 어떨 때는 더없는 어둠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적들의 울음소리가, 이따금씩은 신성한 노래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혼란하구나.
몽롱한 정신 속에서, 바펠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다간 감당하지 못할 진실을 알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는 두려운 진실 앞에서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돌연 뒤편에서 마나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공간 이동 마법 특유의 전조 현상.
“크아-!”
리치들이 일시에 뒤를 돌아 마법을 쏟아부었다.
한데 폭격의 여파가 가라앉고 남은 자리엔 적은 커녕 그 어떤 혈흔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외측에 있던 리치의 두개골이 땅에 떨어졌다.
퍽, 퍼걱-
영문도 모른 채 머리를 잃어버린 리치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 갔다.
한데, 대체 누가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있는 것만 같았다.
리치들은 색적 마법을 중첩으로 펼치고 나서야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보다 빨리 들켰군.”
바닥을 구르던 두개골을 밟고 선 모리츠가 혀를 찼다.
그의 몸에 빨갛고 노란, 색적 마법의 흔적이 난잡하게 묻은 채였다.
이제는 아무리 기척을 죽인다 한들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터.
곳곳에 도사린 안광이 불길하게 번쩍였다.
키이잉-
그를 중심으로 마법진 수십 개가 그려졌다.
마법제일가의 집중 폭격에 둘러싸인 상황.
모리츠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이내 마법이 쏟아졌다.
눈앞에 가득 들어찬 불꽃과 번개, 바람 따위가 매섭게 몰아쳤다.
삐이이익-!
그때, ‘우는새’를 타고 나타난 아론과 기드가 모리츠를 낚아챘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
모리츠는 점차 멀어져 가는 리치들 중, 가장 화려한 로브를 걸친 자를 바라보았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저자가 나섰다면 사지 멀쩡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
음울스레 명멸하는 안광을 보던 모리츠가 이내 시선을 위로 옮겼다.
수만의 마법사들이 펼친 마법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후…… 어찌 됐든 계획대로 되었군.’
저것을 막아 내기엔, 리치들은 이미 늦고 말았다.
이제 나머지 관건은 자신들 또한 저 공격의 여파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느냐였다.
‘우는 새’의 비행 속도론 저 광범위한 폭격에서 벗어나기가 요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리츠 공자님. 이대로 성자님께 직진하겠습니다!”
“뒤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날 것이니.
꽈악-
아론과 기드가 창을 꼬나쥐며 말했다.
◈ ◈ ◈
여덟 자루의 별이 나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뤘다.
온몸에서 솟구치는 이 힘은, 인간의 한계에 가까운 것과도 같았다.
콰지직.
그 거력을 검에 온전히 담아 마몬의 뼈 검을 찢어 내듯 갈랐다.
『……!』
부릅뜨인 마몬의 눈을 보며 나는 별을 움직였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쩍쩍 갈라진 놈의 살점 사이로 송곳같이 뾰족한 뼈가 찔러 들어왔다.
촤르륵-
다만 그 뼈는 드라우프니르의 사슬을 꿰뚫지 못했다.
그대로 놈을 두 동강 내려다, 뒤를 돌았다.
웬 끔찍하게 생긴 괴물 하나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달려들고 있었다.
서걱.
아라헬이 만들어 낸 환영, 고작 참격 한번에 지워질 덧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이제 너희로는 별 위기감이 안드는군.”
찢겨져 흩날리는 환영의 잔재 사이에서, 나는 검을 늘어트렸다.
그러자 마몬과 아라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여지껏 나를 비웃던 둘은 어느샌가 여유를 잃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시간이 갈수록 여유로워졌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성장이 빠른 편이지. 오랜 시간을 사는 존재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마몬과 아라헬의 패착은 내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죽어도 죽지 않으며, 적들 또한 죽여도 죽지 않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수련의 장이 어디 있을까.
날 때부터 온전한 힘을 갖고 태어난 저들은 이 상황을 상정하지 못했으리라.
그도 아니라면 그만큼 제 힘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겠지.
뭐든 상관없다.
결판은 이미 나고 말았으니.
『다 이긴 것처럼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이제서야 저희와 엇비슷한 힘을 가지게 된 것뿐입니다.』
마몬이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그에 절로 코웃음이 쳐졌다.
“비슷하다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이든 땅이든, 아라헬이 제 멋대로 주물러 댄 터라 온전한 지형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애당초 이 환영 속에서 싸우는 것 자체가 저들에게 무척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전력은 비등비등했다.
하면, 바깥 세상에서 싸우면 어떻게 될까?
검성의 힘은 한계에 끝없이 내몰릴 때 한층 더 격상한다.
바꿔 말하면, 이제 마몬과 아라헬은 내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에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
무엇이 그리도 분한 걸까.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주먹만 거칠게 말아 쥐었다.
“더이상 너희와 놀아 줄 이유가 없다.”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혼돈의 힘을 꺼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칼날을 따라 빛을 덧씌운 뒤, 이 거짓된 공간을 베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기다란 선이 쭉 그어졌다.
콰장창-
이내, 나를 둘러싼 환영이 유리창처럼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끄흐흐…….』
『좋은 구경거리였다.』
『아버지께 제대로 당했구나, 동생들아.』
멋대로 떠들어 대는 칼고스의 음성을 뒤로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길고긴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 ◈ ◈
콰르르릉-
내가 잠든 사이 바깥에선 폭풍이라도 휘몰아치기 시작한 모양이다.
눈을 뜨자마자 귓가에 틀어박힌 건, 하늘이 울부짖는 굉음이었다.
“큭…….”
감히 내 양팔을 베고 누운 두 괴물을 밀쳤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니, 짜릿한 격통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환영에 빠지기 전에 입었던 상처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복부엔 기억에도 없는 바람구멍이 추가된 상태였으니, 과다출혈로 죽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어던 것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내 정신 상태였다.
부르르-
검을 쥔 손이 멋대로 떨린다.
강대한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다는 파괴욕이 샘솟았다.
수없이 죽고 죽여 마모되어 버린 정신은, 광기에 가까운 욕구를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세간에 성자라 불리는 것치곤 꽤 위험한 눈빛을 하고 계십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쯤 몸을 일으켜세운 마몬이 이쪽을 보며 비아냥대고 있었다.
이내 아라헬도 정신을 차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아무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쩍 갈라진 하늘은, 그래도 위태롭게나마 제 형태를 유지 중이었다.
몇 마디 한탄의 말을 뱉어 낸 마몬과 아라헬이 시선을 내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 격전을 치르고 있는 전장을 두 눈에 담았다.
콰르르릉-!
연신 터져 나오는 굉음의 원인은 폭풍 따위가 아니었다.
수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마법들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울 것만 같았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빗발치는 마법들로부터 선명한 빛이 느껴졌다.
어둠에 현기마저 흐려진 리치들은 저 재앙 속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그리 웃을 때가 아니실 텐데.』
『당신께서 아끼시는 인간 몇 놈도 저 난리통에 있습니다.』
물론 내게도 보였다.
‘우는 새’를 탄 채 위험천만한 비행을 즐기고 있는 삼인방이 말이다.
새의 고삐를 쥔 모리츠가 꽥꽥 비명을 지르고, 아론과 기드가 저들을 향해 떨어지는 마법을 쳐내고 있었다.
그 얼굴들이 하나같이 창백했다.
『구경만 하실 건가요?』
『저대로라면 마법에 휩쓸리고 말 겁니다.』
무릎이라도 꿇으신다면 굳이 막아서지는 않겠습니다- 라며, 아라헬이 그 악독한 가학심을 여실히 드러냈다.
“괜찮아. 이런 곳에서 죽을 놈들이 아니거든.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너희 둘뿐이야.”
겨우 20분조차 되지 않는, 짧디짧은 시간.
나와 눈앞의 두 괴물은 그 시간을 무척 길게 보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지겨운 대치를 끝내고 싶었다.
『그 몸으로 저희를 상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기선 죽으면 그대로 끝입니다만.』
악연의 끝을 놈들에게 겨누고 있자니, 쓰잘머리 없는 답변만 들려왔다.
“그렇게 오래 부대꼈는데도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구나?”
설마 내가 이 몸상태로 싸우려고 할까.
난 피식 웃으며 입 안에 미리 숨겨 놓았던 ‘열매’를 씹어 삼켰다.
이내 식도를 타고 솟아나는 생명의 기운.
죄 부서져 버렸던 뼈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찢어진 살결이 재생되고, 마모된 정신이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내 여섯 번째 피조물은 꽤 유능하거든. 어디 사는 누구들과는 다르게.”
그 누구들의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 ◈ ◈
마지막 싸움을 준비했다.
오러의 갑주를 빚어 입고, 찬란한 여덟의 별을 날카롭게 세웠다.
이것이 마지막이니만큼 쉽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덤벼.”
나는 그들이 끝의 끝까지 발악을 하리라고 예상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라헬의 마기가 온 사방을 뒤덮을 기세로 범람했다.
『아버지.』
한데, 어째선지 마몬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일까.
나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 검에 칼고스 형님의 영혼이 종속되었다 하셨지요.』
마몬의 음성이 퍽 비장했다.
『얌전히 항복한다면…….』
『저도 받아 주시렵니까?』
그 말에 대경실색을 한건 아라헬이었다.
마몬-!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제 동생을 노려보았다.
호오.
이건 꽤나 놀라운 상황인데.
“갑자기 왜 항복을 한다는 거지?”
내 물음에 마몬이 손가락을 들어 악연을 가리켰다.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입니다.』
『저 빌어먹을 칼고스 형님만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혼자 날뛰다 죽어 버린 주제에!』
끄흐-
악연 속 거인이 끅끅대며 웃었다.
물론 마몬의 귀엔 닿지 않았다.
『저도 받아 주신다면…….』
『저항할 이유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