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Episode. 54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2)
시종일관 행복에 겨워 하던 아라헬과 마몬의 얼굴이 굳었다.
저 붉은 존재의 표정이 너무도 불길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균열이 무엇인가.
다섯 피조물들이 수없는 세월 동안 연구해 왔던, 아버지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던가.
그중 일각인 칼고스라면 균열을 조금 손보는 것쯤은 그리 힘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군…….』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습니까?』
마몬이 고개를 푹 숙이곤 중얼거렸다.
스멀스멀 흘러나온 마기가 거칠게 일렁였다.
“처음부터 시간을 끌러 왔다고 말했을 텐데, 뭘 이제 와서 충격받은 척이야?”
대수롭지 않은 듯한 리하르트의 음성에 마몬과 아라헬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누가 알았을까.
진작에 죽어 바스라진 줄 알았던 칼고스의 영혼이 그의 검에 종속되어 있었다니.
또, 그토록 아버지를 원망하던 칼고스가 자신들을 배반하리라곤 더더욱 에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고개를 치켜든 두 군단장이 붉은 거인을 노려보았다.
끄흐흐-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한 시선에, 거인이 혀를 쭉 빼내며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동생들아.』
『나는 그저 결말을 조금 늦췄을 뿐이란다.』
변명이라기엔 지나치게 뻔뻔하고, 동생들을 다독이는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얄밉다.
두 군단장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 정도의 균열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을 터.』
『룬 문자 몇 개의 위치를 바꾼 것일 뿐이겠죠.』
『모든 건 말 그대로 찰나의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군요.』
『미련해요. 너무 미련합니다, 아버지!』
칼고스의 헛수작 따위로 진즉 정해진 결말이 바뀌진 않는다.
얼마의 시간을 벌었든 간에 머지않아 균열은 완전히 열릴 것이며, 이 세상은 마계의 존재들로 인해 철저히 짓밟힐 것이다.
지금껏 당신이 감내한 수도 없는 죽음은 미련한 희생으로 끝날 뿐이라고, 두 군단장들이 리하르트를 향해 악담을 쏟아부었다.
그에 리하르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희가 나를 걱정할 때는 아니지.”
갑작스러운 칼고스의 등장으로 인해 주어진 약간의 휴식.
그 짧디짧은 휴식은 턱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가라앉게 해 주었다.
그의 표정에 자그마한 여유가 깃들었다.
이 무모한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마음의 짐을 한 움큼 덜어 낸 셈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마왕은 그리 자비로운 성격이 아닌데.”
씨익-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세간에 성자라 불리는 자의 웃음치고는 무척 사악해 보였다.
“나랑 농땡이 피우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으니, 정말 너희 목숨이 위태롭겠구나.”
아라헬과 마몬에겐 이제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 당장 환영을 거두고, 리하르트와 바깥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마왕의 분노를 한 줌이나마 덜어 내든가.
아니면 이 환영 속에서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내든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신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다면 이깟 목숨쯤이야.』
마몬이 날카롭게 갈린 뼈를 뽑아 들었다.
아라헬이 환영을 부려 수많은 괴물을 불러냈다.
전력을 뽑아내기 시작한 둘의 기세는 조금 전까지와는 딴판이었다.
그에 가만히 서 있던 칼고스가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리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입가엔 아직까지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정도라면 여덟 자루까진 늘릴 수 있겠어. 이거, 완전 경사 났군.”
쿠득, 쿠드득-!
검을 집어삼킨 오러가 다시금 그의 육신까지 휘감았다.
빛을 듬뿍 머금은 여덟 가닥의 사슬과 일곱 자루의 별이 사방을 날아다녔다.
이윽고, 리하르트의 눈에 마법진이 그려졌을 때.
『……!』
칼고스는 놀란 속내를 애써 감춰야 했다.
강렬하고, 위압적이다.
리하르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전성기의 자신보다도 더욱 거대했다.
바깥에선 고작 십 분 남짓이 흘렀을 뿐일진대, 리하르트의 무력은 이다지도 바뀌어 있었다.
콰아앙-!
세 존재가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다.
터져 나가는 대기 속에서, 칼고스가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어서 왕과 당신의 싸움을 보고 싶습니다.』
◈ ◈ ◈
시체들은 끝이 없었다.
산 자를 향한 망자의 원한이 거대한 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았다.
“젠장, 젠장!!”
아론이 울분 섞인 고함을 질렀다.
마음만큼은 이미 리하르트의 곁인데, 얄궂게도 몸은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창이 그리는 궤적이 자연스레 거칠어졌다.
분노와 조급함이 가득 담긴 창은, 오히려 그의 몸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비단 아론뿐만이 아니었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
“빌어먹을!”
기사들의 눈에 절박함이 차올랐다.
저 멀리 쉴 새 없이 욕설을 터트리는 모리츠도, 언제나 냉철하던 오르드 성주마저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조용했다.
리하르트가 단신으로 쳐들어간 뼈의 성이 이상할 만큼 조용하기만 했다.
혹시, 이미 끝난 게 아닐까.
군단장의 힘을 익히 경험해 본 바 있는 그들에겐 최악의 상황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쩌저적-
하늘에 거대한 금이 일었다.
홉슨 산맥의 용을 상대할 적에 보았던, 하늘이 찢어지는 괴현상과 똑같은 광경.
“실패한 거냐, 리하르트……!”
모리츠의 눈에 언뜻 물기가 스며들었다.
시간을 끌겠다며 리하르트가 홀로 쳐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
한데 벌써 균열이 열렸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눈가를 적신 물기에 차츰 절망이 섞였다.
연합의 기사들이 하나둘 절규를 내뱉었다.
그 순간, 아론이 벼락처럼 외쳤다.
“아니야, 아니라고! 균열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은 금이 간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있었다.
본래라면 당장 균열이 열려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그들의 눈에 비친 하늘은 일전에 보았던 광경과는 사뭇 달랐다.
“성자님이 성공하셨다!”
아론이 다시 외쳤다.
마나를 한껏 담은 외침이 전장을 타고 우렁우렁 퍼져 나갔다.
“아직 늦지 않은 거야!”
“얼른 성자님을 도와 드려야 해!”
기사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절망하고 있을 때가, 조급함에 떠밀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자들의 눈빛이었다.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해라!”
“모조리 쓸어버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오르드 성주와 연합 지휘관들이 기사들을 이끌었다.
줄곧 고함과 괴성만 오가던 전장 한복판에서, 성가가 울렸다.
“……리하르트. 난 무슨 짓을 해서든 네 녀석이 죽지 않도록 할 거야.”
숨을 몰아쉬던 모리츠의 얼굴에 결기가 차올랐다.
그런 그에게 두 창기사가 다가왔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 ◈ ◈
알리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간담을 서늘케 했던 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녀로서는 감을 잡지 못했다.
“우오오-!”
기사들이 돌연 분기탱천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그 열기가 어찌나 거세던지, 마법사들이 함께 목청을 드높였다.
다만 알리사와 앨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는 이다지도 많고, 저 멀리 마르크스의 리치들은 아직도 건재했다.
이 자리에 모인 마법사들의 머릿수만 수만에 달하는데, 저 리치들의 몸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마법제일가의 가주와 그 원로들.
머릿수 따위는 그들 앞에선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누님. 리치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장기전으로 치달을 겁니다.”
앨런이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알리사 또한 물론 알고 있었다.
다만 이 팽팽한 균형을 깨트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누군가가 리치들 사이를 파고들어가 신경을 분산시켜 준다면.
찰나의 틈만 벌어 준다면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누군가는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기사여야 할 것이고, 당연히 목숨은 장담할 수 없을 터다.
리하르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승낙하지 않았을 전략이었다.
“……어렵구나.”
알리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릴 때였다.
최전방에서 싸우던 기사 셋이 전장을 이탈하여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검게 죽은피가 묻어 그 얼굴들이 흐릿했으나, 그들은 분명 리하르트의 최측근이었다.
이내 세 사내가 알리사의 앞에 당도했다.
“제게 좋은 작전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모리츠였다.
이미 각오를 끝마친 듯한 기색에, 알리사가 귀를 기울였다.
“저희를 리치들 사이로 보내 주십시오.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 사이에 마법사들이 총 공격을 가하면 승기가 기울 것입니다.”
차마 알리사가 먼저 제안하지는 못했던 작전.
리하르트를 따르는 기사들 아니랄까 봐, 참으로 무모한 사내들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될지 모르겠군. 그대들의 주군은 내가 아니니 말이야. 리하르트라면 이 작전을 수락하지 않았을 게다.”
그에 사내들이 이를 아득바득 갈며 말했다.
“먼저 무모한 짓을 한 게 누구입니까. 리하르트, 그놈은 저희더러 뭐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혹여 저희가 죽으면 다 그놈 탓으로 돌리십시오.”
“맞습니다. 이참에 아주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알리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다부진 사내들의 청을 거절하기엔, 그 결의가 너무도 굳셌다.
◈ ◈ ◈
“……정말 네놈의 말대로 되어 가는군.”
루드비히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경악 어린 음성이 잔뜩 억눌린 채로 들려올 뿐이었다.
쯧.
옛 호적수가 나이를 먹더니 정신까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루드비히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금 중요한 건 호적수의 정신 상태가 아니었으니.
저 갈라진 하늘이 시사하는 바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봐, 발락. 감히 그놈이 내게 명령을 내렸다, 이 말이다.”
그의 음성이 무척 사나웠다.
하다하다 제 검술 스승을 고작 전령으로 부려 먹나 싶더니만, 그 전령이 전한 말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바텐베르크의 위세를 이용해 북대륙의 모든 전력을 집결시켜 놓으라니.
머지않아 세상의 명운을 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전 설명이 뒤따랐으나, 바텐베르크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던 루드비히가 이내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이건 호르교가 바텐베르크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 선포하는 것이라 여겨도 되겠지.”
언제였던가.
이런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온 대륙에서 바텐베르크 이상의 영향력을 갖춘다면, 바텐베르크 또한 호르라는 신을 섬기겠노라고.
정말 건방지게도, 리하르트는 벌써부터 내기에서 승리한 양…….
그때였다.
“이, 일곱 자루…….”
루드비히의 상념이 깨어졌다.
그가 시선을 돌려 리하르트의 전령, 발락을 바라보았다.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에 땀이 한가득이었다.
“벌써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송장 치우기는 싫으니 뒷산에서 편히 죽어라, 발락.”
성수나 한잔하자고 집무실을 찾은 게 불과 몇 분 전이다.
한데 그 직후부터 발락의 상태가 이상했다.
성수는커녕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꼬락서니라니.
“흐, 흐어억!”
발락이 벌떡 일어서며 괴성을 질렀다.
경악, 충격, 공포.
그 늙은 얼굴에 뒤섞인 감정들이 무척 괴이했다.
역시 세월의 흐름이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인가.
루드비히가 쯧 혀를 차며 성수를 들이켰다.
그때, 발락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여덟 자루…… 리하르트가 여덟째의 별을 개방했다! 순식간에 네 개나 개방했단 말이다!”
“……뭐라?”
여덟.
발락이 말년에서야 겨우 도달한 경지.
그건 약관도 되지 않은 리하르트가 얻어 내기엔, 너무도 높은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