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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64화 (164/216)

164화. Episode. 53 지옥 (1)

날이 밝았다.

마침내 훌륭한 요새로 거듭난 나무 성의 위에서, 알리사가 손을 들었다.

뿌우우-!

쿵- 쿵-

공격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와 동시에, 웅장한 북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 퍼졌다.

“결계를 깨부숴라!”

지휘관의 외침에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번개와 바람, 불꽃 따위의 마법이 왕도를 둘러싼 장막에 부딪쳤다.

우웅- 반투명한 장막의 표면에 물결이 일었다.

고요한 호수 위에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듯이, 잠깐의 일렁임만 일었을 뿐이었다.

수만의 마법이 일시에 터진 것치고는 허무한 광경이었다.

“마르크스의 결계는 예전부터 악명이 높았지요.”

기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결계를 수놓는 마법의 폭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차단하는 능력만큼은 드래곤보다도 월등합니다. 바텐베르크가 저들과 전쟁을 치를 때도 가장 고역이었던 것이 바로 저 결계였다고 하더군요.”

“기드.”

나는 그를 불렀다.

연륜과 정광이 한데 섞여 아우러진, 백전노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리하르트’가 되어 처음 본 자가 다름 아닌 기드였다.

바텐베르크에서 유일하게 ‘리하르트’를 아끼던 사내.

그 첫 만남에서부터 절절히 느껴지던 애정은 아직도 생생했다.

“무서운 거야? 마르크스와 싸운다는 게.”

“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드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그는 겁이 없는 성격이다.

그래서 ‘리하르트’를 위한 답시고 용의 심장을 뽑아 올 생각을 했던 것이겠지.

“그럼 내가 없어도 잘 싸우겠구나.”

“……도련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걸까.

오랜만에 기드의 입에서 도련님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저 결계가 얼마나 단단하든, 언젠가는 깨진다.”

보라.

앨런의 성화가 엉겨 붙은 저곳은 벌써 실금이 가고 있지 않은가.

쾅-!

마법사들이 실금을 향해 집중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결계의 비명이 커져 갔다.

기사들이 호흡을 고르며 창칼을 빼 들며, 결계 너머 쏟아져 나올 언데드들을 상대로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내 전의는 오직 군단장들을 향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다.

이젠 시간이 없었다.

“아론과 모리츠, 기사들을 네가 잘 다독여 줘. 한눈팔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언데드가 될 테니까.”

“……설마 홀로 군단장들을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기드가 쇳소리를 냈다.

나는 부릅뜬 그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마르크스와 시체들을 전부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 균열이 열리는 건 피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나라도 쳐들어가서 시간을 벌어야지.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전투를 끝내라고.”

“…….”

“미리 말하지만 죽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다. 난 불가능한 것에 목숨 걸지 않아. 조금 고달플 뿐이지.”

아라헬과 마몬.

팽창할 대로 팽창한 둘의 마기가 내 피부를 송곳처럼 찔러 댔다.

하지만 그보다도 날카로운 건, 기드의 시선이었다.

“이런 일을 한 마디 상의 없이 결정하시다니, 주군으로서 실격입니다. 제게는 새 주군을 섬기듯 하라고 말씀하셨으면서, 당신께선 예전처럼 막 나가시는군요.”

그의 음성이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쌓이고 쌓인 불만이 일시에 터져서, 기드는 제 입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에 어쩐지 나는 웃음이 났다.

“알아. 그래서 너한테 미리 말하는 거야. 망나니가 망나니짓을 할 때, 너만큼은 항상 망나니 편을 들어 줬으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기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통솔해 줘.”

한참 입을 달싹이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아는 자의 한숨이었다.

◈          ◈          ◈

콰장창-!

액체처럼 출렁이며 충격을 흡수하던 결계는 깨질 때만큼은 유리처럼 조각나 흩어졌다.

“우오오!”

마르크스의 결계를 깨트렸음에, 사기가 치솟았다.

마법사들은 기세를 몰아 왕도를 빙 둘러싼 뼈의 벽을 거칠게 폭격했다.

쾅! 쾅!

기사들이 철장갑 낀 주먹으로 흉갑을 두드렸다.

그 다부진 입으로는 찬송가를 불렀다.

하얀 뼈에 금이 갈수록 그들의 투지는 고양되어 갔다.

“스승님, 부디 망설이지 마십시오. 바펠 마르크스는 옛적에 이성을 잃었습니다.”

나는 고요히 서 있는 알리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가 적을 앞에 두고 망설일 것 같더냐?”

“노파심에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뒤를 따르는 병력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우스운 소리구나.”

마법진 그려진 눈동자가 나를 빤히 담았다.

“그러는 너는 너를 따르는 기사들을 내버려 두고 홀로 적진에 쳐들어갈 생각이지 않느냐.”

“……그게 들렸습니까?”

“어제부터 네 표정이 심상치 않기에 설마설마했었다. 뭐,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을 게다.”

설마 기드와의 대화가 들렸을 줄이야.

아무래도 그녀는 기사 못지않게 귀가 밝은 듯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던 참이었으니.

“그래. 정말 네가 시간을 벌어야할 만큼 촉박한 게냐?”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왕도의 성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마기가 뭉치고 뭉쳐 성의 주변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무려 군단장이 둘이나 들러붙어 준비한 균열.

언제 하늘이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 상황에서 저게 열려버리면 정말 답이 없을 터.

“후우…….”

내 뜻을 알아차린 알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침내 뼈의 벽이 허물어졌다.

크에에엑-!!

우리에서 벗어난 짐승처럼, 시체들이 무너진 뼈무더기 사이로 뛰쳐나왔다.

“시작되었구나.”

마갑병과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돌진했다.

꽈앙-!

우악스러운 돌진에 시체들이 달려오던 그대로 튕겨졌다.

“언데드는 기사들에게 맡겨라!”

“폭격 중지! 전 마법사들은 리치의 등장에 대비하라!”

지휘관들의 외침이 왕왕 울렸다.

나무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전장을 살피던 알리사가 이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라플라스의 눈이 오롯이 한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성을 잃긴 했나 보군. 감히 내 앞에서 투명화 마법이나 쓰고 있다니.”

디스펠.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리치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뼈무더기의 위쪽에 주르륵 늘어선 채였다.

“리치들을 최우선으로 처리한다!”

“놈들의 공격으로부터 기사들을 보호하라!”

다시금 지휘관들의 목청이 터졌다.

아주 잠깐, 입술을 짓씹던 알리사도 폭격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시선을 조금 위로 치켜들었다.

『라플라스의 눈 - 발동.』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리치들의 머리 위, 커다란 눈알 하나가.

카론이나 2공자의 것보다도 더욱 커다란 마왕의 조각.

- 곧, 곧 있으면…….

- 우으…… 우흐으…….

핏발 선 눈알이 설렘 가득한 음성을 냈다.

내 귀엔 그저 흉악하기만 했다.

◈          ◈          ◈

리하르트가 별 위에 올라섰다.

당장 허공으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그에게 아델이 다가왔다.

“아빠라면 이럴 줄 알았어.”

그녀는 꼬옥 쥔 주먹을 한참 망설이다, 곧 그에게 내밀었다.

일년에 단 한 번 맺어지는, 지고의 보물과도 같은 세계수의 열매.

리하르트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맙다.”

“죽지 마.”

아델은 걱정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리하르트를 배웅했다.

별이 허공을 날았다.

그 위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어?”

홀로 적진을 향해 날아가는 리하르트.

마법사들은 당황 어린 음성을 내면서도, 리치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분이라면 무언가 계획이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온힘을 다해 마법을 흩뿌렸다.

하지만 언데드와 드잡이질을 하던 기사들의 경우는 달랐다.

“서, 성자님!”

죽은피를 흠뻑 뒤집어쓴 사내들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성자가 저리 미안하다는 눈을 하고 있는 건, 여지없이 무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가, 같이! 저도 가겠습니다! 성자님!”

“야! 너 혼자 어딜 가!”

아론과 모리츠가 고개를 치켜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앞을 가로막는 시체들을 모조리 갈라내며 뛰었다.

그러나 허공을 날아가는 리하르트와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멈추십시오, 모리츠 공자님. 아론, 너도 마찬가지다.”

대열을 이탈한 두 사내를 기드가 막아섰다.

마나가 섞인 음성에 기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성자님께서 홀로 군단장들을 막아서겠다 하셨습니다…… 저희는 이 빌어먹을 시체더미들을, 저 짜증나는 리치들을 죄 찢어 죽여야 합니다. 저희가 최대한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그만큼 성자님이 위험해진단 말입니다.”

기드가 리하르트의 전언을 읊었다.

쓰잘머리 없는 원망을 늘어놓을 시간에 시체 하나라도 더 베어야 성자의 생존률이 높아진단다.

그 순간부터 기사들의 기세가 돌변했다.

입을 꾹 다물고선, 온힘을 다해 시체들의 목을 날렸다.

“빌어먹을 자식! 죽지 못해 안달이 난 놈!”

다만 모리츠만큼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에, 악다구니가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          ◈          ◈

아우.

뒷통수가 따갑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별을 타고, 마왕의 조각을 향해 직진했다.

“먹어라.”

악연의 새까만 날이 번뜩였다.

콰득.

불길한 눈알 한복판에 꽂힌 검날.

- 아버지…… 이미 늦었습니다…….

- 당신은 막지 못할 겁니다.

눈알이 하등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을 쏟아 낸다.

곧 악연 속 거인이 놈을 흡수했다.

이로써 군대가 전투를 치르기 한층 더 수월해질 터.

나를 향해 리치들의 마법이 빗발쳤다.

늦장 부리다간 격추당할 기세라 재빨리 뼈무더기를 넘어 왕도 내로 들어섰다.

무너진 건물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반파된 도시의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뼈의 성.

그 꼭대기에서부터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마기가 넘쳐흘렀다.

『폭성(爆星) - 발동.』

꽈아아앙-!!

비산하는 뼛조각들을 뚫고서, 나는 마침내 별 위에서 내려섰다.

그곳에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다.

『꺄하, 꺄하하하하하-!!』

눈을 동그랗게 뜬 아라헬이 광소를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도 웃긴 건지 나로선 모를 일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서……?』

까만 머리칼을 한 꼬맹이는 턱을 짚고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라헬과 마몬.

나는 그들을 보며 신격을 끌어올렸다.

“시간을 끌러 왔다. 잠깐 동안 어울려 주겠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그 꼴도 보기 싫은 균열은 잠시 손 떼.

그리 고하니, 꼬맹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반칙입니다.』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귀 밑까지 말려 올라가는, 뒷골을 서늘케 하는 미소였다.

『아버지를 저희끼리만 가지고 놀 기회라니……!』

그럼 그렇지.

나는 긴장 가득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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