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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62화 (162/216)

162화. Episode. 52 두번째 성마대전 (4)

붉고 어두운 세상이 산산이 조각났다.

『이제야 일어나셨나요?』

환영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를 반긴 건 아라헬의 새빨간 눈이었다.

광기와 흉성이 한데 섞여 일렁이는 눈을 보자니, 채 가라앉지 않은 두통이 거세지는 것 같았다.

킁킁.

그녀가 대뜸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곤 냄새를 맡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첫째 오라버니의 향이……?』

사라진 어둠의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아라헬이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품고 있기 버거워서. 마침 꽤 좋은 창고가 생겼거든.”

그리 말하자 그 붉은 눈에 작은 체념이 깃들었다.

『……제가 보여 드린 마계는 어떠셨는지요.』

『한 치의 꾸밈도 없는, 그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답니다.』

이미 반쯤은 체념한 주제에 구태여 물어 오는 아라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언데드와 인간들의 싸움.

환영 속에서 꽤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진 않은 모양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목 달아난 시체들의 수가 거의 그대로였으니.

『아버지.』

『사랑스런 딸이 물었답니다.』

아라헬이 답을 재촉했다.

난 돌렸던 고개를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흠, 그래.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칼고스와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시야 한편에 떠오른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체내에 자리잡은 어둠이 제거되었습니다.]

[혼돈의 성향이 빛의 성향으로 되돌아옵니다.]

숨쉬기가 편해졌다.

머릿속을 쿡쿡 찌르던 두통도 사라지고, 돌덩이를 매단 것 같던 어깨도 한결 가벼워졌다.

마침내 내게 꼭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내 앞에 있는 마족의 표정이 무척 싸늘했다.

『모든 걸 보셨으면서도…….』

『그게, 겨우 그게 제 질문의 답이란 말인가요?』

상정하던 답변이 아니라는 듯.

그건 결코 정답이 아니라는 듯이, 그녀는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럼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걸까.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빌기를 바라는 걸까.

“너희들이 수백 년이나 나를 기다렸다는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와서 옛 모습 좀 들여다봤다고 우리 입장이 바뀔 건 없지.”

그리 말하며 악연을 들어 올렸다.

새하얗기만 하던 검날의 반쪽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사아아-

나는 반대쪽 검날에 손을 대고 빛을 발했다.

“아라헬.”

검의 중심을 기점으로 빛과 어둠이 나뉘었다.

척-

까맣고 하얀 검극이 그녀에게 겨눠졌다.

라플라스의 눈에 담긴 아라헬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한낱 인간으로 역사하시매.』

『아버지께선 정말 인간 그 자체가 되신 것 같군요.』

『오직 인간만을 위하는,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신!』

그래, 맞아.

내가 인간인 걸 뭐 어떡하라고.

더 할 말은 없냐는 뜻을 담아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그녀가 날개를 한껏 펼쳤다.

그 새까만 날개로부터 웬 알갱이들이 안개처럼 흩어져 나왔다.

저 알갱이가 전장에 퍼지면 곤란하다.

언데드를 코앞에 두고 단체 환각 증세라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시체들의 잔치가 열릴 터.

혹여나 바람결에 기생충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일격에 소멸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내겐 그것을 가능케 할 힘이 있었다.

쿠구국-

악연의 흑색과 백색이 조금씩 뒤섞인다.

검은 물감에 하얀색을 풀어 놓듯.

하얀 물감에 검은색을 풀어 놓듯.

두 색이 서로의 경계를 서서히 넘나들기 시작했다.

『잿빛……?』

『그 기운은 대체 뭡니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걸까.

아라헬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언데드와 드잡이질을 이어나가던 기사들도 홀리기라도 한 양 이쪽을 바라보았다.

본래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

누군가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악연’을 타고 넘실거리는 이 잿빛의 기운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힘이라는 것 또한 쉽게 알 수 있었다.

키르르륵-

잿빛이 닿은 공간이 기이하게 비틀렸다.

검 자루를 통해 전해지는 압박감은 너무 거대해서, 검을 쥔 손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하아…….”

오한에 떨듯 이가 딱딱 부딪쳤다.

입김이 쉬지 않고 새어 나오는데, 몸은 땀에 흠뻑 젖어갔다.

내가 지금 추운 건지, 더운 건지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았다.

섞으면 안될 것을 섞은 대가.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라헬. 다음엔 이런 가짜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마.”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나는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소음 따윈 일지 않았다.

참격으로 인한 바람도, 별다른 기척도 일지 않아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검을 휘둘렀다는 걸 알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여파만큼은 흉흉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니.

참격의 궤도에 놓였던 땅과 하늘에 한 줄기 선이 그어졌다.

반으로 갈린 구름이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그 아래 땅은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땅과 갈라진 하늘 사이, 아라헬의 몸에도 선이 이어졌다.

『…….』

그녀가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다.

다만 채 끝맺음 되기도 전에 육신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          ◈          ◈

“쿨럭!”

가짜 아라헬이 소멸했음을 확신함과 동시에, 나는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꺽꺽, 숨을 토하고 들이쉬고를 반복했다.

혼돈은 생각보다 더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그만큼 리스크가 엄청난 힘이었다.

‘칼고스 놈 말대로 내 몸으로 시도했으면 앓아누웠겠는데.’

나는 잠시 혼돈이 할퀴고 간 자리를 돌아보았다.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도 천지를 가르는 힘.

과연 이것이 그놈에게도 통할까?

속으로 가늠해 보니,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통한다.

양날의 검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분명 이 힘은 마왕에게도 닿을 것이다.

마왕과의 싸움을 결정지을 날카로운 이빨.

“성자님!”

“아론?”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으니, 아론이 냉큼 달려왔다.

얼마나 시체 사이를 휘젓고 다닌 건지 그 잘생긴 얼굴에 죽은피가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모,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으신 분이……!”

“괜찮아. 버틸 만해.”

심사 복잡한 눈으로 날 보던 그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흑백으로 나뉜 악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라헬과는 달리, 악연의 검은색을 본 아론은 화색을 띠었다.

“성자님, 혹시 몸 속의 어둠을 검에 담으신 겁니까?”

“그래.”

손수 장갑까지 벗곤 왼손을 보여 주었다.

흉측하게 변모했던 내 손은 다시금 살색을 되찾은 후였다.

“이제 내 몸에 어둠은 없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비록 칼고스에게 잠시 맡겨 둔 것뿐이지만.

미리 동료들에게 일러 둘 필요는 없었다.

내 말에 아론은 메리를 영접한 휴거처럼 밝게 웃었다.

한시름 놓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을 보니,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적장도 처리하셨으니 휴식을 취하고 계십시오. 나머진 저희가 금방 끝내겠습니다.”

내가 뭐라 붙잡을 새도 없이 아론이 달려 나갔다.

저렇게 기운찬 아론은 또 오랜만에 보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마법사들이 포진한 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빠!”

“아버지.”

나무를 이용해 언데드들을 휩쓸어 버리던 세계수들이 강아지처럼 헐레벌떡 달려왔다.

요새 들어 내가 허약한 면모를 많이 보이긴 했나 보다.

아델과 마르의 시선에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아빠, 그 회색빛은 많이 쓰지 않는 게 좋아. 그건 너무 위험해.”

“몸은 앞을 향하고 목만 뒤쪽으로 꺾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다 목뼈가 부러지고 말 겁니다.”

“마르! 그 비유는 좀 이상하지 않아?”

“흠. 꽤 적절했다 생각했는데.”

두 세계수가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나는 그들에게 주의를 주곤 전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어둠으로 움직이는 시체들이다! 이단심판관들이여, 전부 불태워라! 빛의 불꽃으로 저 더러운 육신들을 정화시켜라!”

한쪽에선 희멀건 불길이 치솟았다.

앨런이 불을 흩뿌리고, 마법사들이 바람 마법을 통해 불꽃을 확산시켰다.

“우오오!”

또 한쪽에선 기사들이 온힘을 다해 시체의 목을 쳤다.

리오 성을 지켜 온 그들은 언데드와의 싸움에 무척 능숙하다.

함께 싸우던 동료가 시체가 되어 달려드는 것을 경험했고.

그 동료였던 시체의 목을 숱하게 날렸다.

이런 곳에서 쓰러지기엔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터라, 전투는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우린 언데드로 가득하던 요새를 넘었다.

몇 차례의 마을을 지났고, 수많은 시체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쉽게도 그 길목에 아라헬이나 마몬을 비롯한 거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리하르트."

“예.”

“……그거, 정말 믿을 만한 게냐.”

티폰의 왕도를 향해 진군하는 길.

알리사가 굳은 얼굴로 악연을 힐끔거렸다.

그것도 라플라스의 눈을 켠 채로.

“허어! 척 보기에도 그 심성이 곱지 않은 녀석이로다. 네 몸에 어둠을 쌓는 것도 불안하다만, 이놈도 그에 뒤떨어지지 않다! 놈은 악귀다, 악귀!”

어째선지 그녀가 대뜸 검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알리사라면 검 속의 영혼을 볼 수 있을 터.

잘은 모르겠으나, 평소 점잖던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으리라.

[라플라스의 눈 - 발동.]

눈에 기묘한 감각이 어렸다.

그러자 까맣기만 하던 검날에 붉은 거인의 형상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났다.

“……이 미친놈이.”

눈을 까뒤집은 채, 그 불결한 혀를 연신 낼름거리는 칼고스의 모습이란.

끄흐흐-

듣기 싫은 웃음소리까지 귓전을 때렸다.

“제자야! 이놈이 자꾸 나를 약 올린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손까지 부들거리는 알리사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내가 미안해졌다.

그러게 왜 검을 살펴봐서는.

“하아…… 죄송합니다. 이놈이 조금이나마 힘을 되찾는 바람에, 예전의 광기까지 돌아온 모양입니다.”

“……그럼 위험하지 않겠느냐? 저건 그야말로 시한폭탄이니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하얀 날을 손으로 덮었다.

그리곤 칼고스가 품은 어둠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빛을 부여했다.

우웅-

그러자 칼고스의 모습은 희미하게 사라지고, 비대한 칼고스의 자아에 묻혔던 용사의 영혼이 점차 밝아져 갔다.

[호르시여……!]

용사, 알버트가 오랜만에 검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구나. 알버트.”

그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칼고스에게 밀려서 옴짝달싹하지도 못했던 탓에, 나를 볼 면목이 없는 듯했다.

“아무리 너라도 수천 년을 살았던 칼고스에겐 어찌할 수 없었겠지. 괜찮다.”

그리 말해 주니 알버트가 감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호르시여, 당신께 힘이 되고 싶습니다.]

너는 그냥 칼고스만 견제해 주면 되는데.

……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어째 그의 표정에 결의가 넘쳐흐른다.

“네가 뭘 할 수 있지?”

별 기대는 들지 않으나 예의상 물어봐 주었다.

[제가 다루던 성검, 템페스트를 기억하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안 날 리가 없지.

그토록 훌륭한 능력을 갖춘 검은 흔치 않으니.

백귀와 섞는 과정에서 템페스트의 고유 능력이 사라진 것은 무척 애통한…….

[검과 검이 합쳐지면서 템페스트의 능력이 제게 종속된 것 같습니다.]

[제가 도와 드린다면 호르께서도 그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뚝-

나아가던 걸음이 멈췄다.

“야, 알버트.”

끼리릭 소리가 날 것처럼 목이 뻣뻣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러자 용사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칼고스가 도통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터라…….]

“…….”

[모든 건 이 부족한 용사의 탓입니다!]

[버,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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