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60화 (160/216)

160화. Episode. 51 두번째 성마대전 (2)

하늘길을 타고 수많은 기사들이 내려왔다.

그들의 몸에 채 사라지지 않은 빛무리가 있던 터라, 말 그대로 빛의 기사들 같았다.

그중 선두에 서 있던 자가 투구의 바이저를 들어 올렸다.

철제 투구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미남자가 미소를 띄었다.

가주 잃은 헬가의 기사, 아발트였다.

철컹-

그를 비롯한 수많은 기사들이 부복 자세를 취했다.

“호르의 성자를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 속에서 바짝 느껴지는 군기.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 쓴 이들이건만, 어찌 된 일인지 내 눈엔 저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분명 다부진 얼굴을 하고 있겠지.

“반갑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쿵쿵!

기사들은 주먹으로 흉갑을 두드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길게 늘어선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리 익숙하진 않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트 왕국의 기사들도 온건가?”

“바렌 왕국에 내려온 호르의 계시를 전해들은 바! 그분의 은혜를 입은 저희 또한 참전을 마다치 않겠습니다! 먼 길 달려온 호르의 신도들을 내치지 말아 주소서!”

내 말에 기세가 잘 정돈 된 장군 하나가 나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과 결기 넘치는 기백이란 영락없는 성기사의 그것이었다.

이야, 잘 키웠네.

내가 남대륙에 틀어박힌 사이 프로트 왕국에선 호르교가 완전히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내가 예상했던 병력보다 배는 많다 싶더라니.

“프로트 왕국과 바렌의 우정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어둠이 두 왕국의 사이를 갈라놓았으나, 빛이 다시금 길을 이어주었군요.”

장군에게 그리 말해주니, 뒤편에 대기 중이던 프로트의 기사들이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을 내비췄다.

난 그들을 보다가 조금 더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또 생각지 못한 손님들이 있었다.

“성자님!”

“호-르! 호-르!”

30여명의 일반인들, 스노우폴의 선지자들이 방방 뛰며 반가움을 표하는 중이었다.

한창 전의를 다지는 군인들 사이에선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었다.

“메리, 너희는 왜 온 거야?”

“용사님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비록 큰 위로는 드릴 수 없지만, 찬송가라면 용사님들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메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마냥 해맑은 선지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어딘가 불안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또 예지몽을 꾼 건가.’

그녀가 내게 말해주었던 예지몽의 내용은 이미 변했다.

물론 전쟁 자체는 막을 수 없었으나, 북대륙과 남대륙의 싸움은 조기에 막아낸 것이다.

만약 메리가 다시금 예지몽을 꾸었다면, 그건 바뀌어 버린 오늘날의 미래이리라.

“좋아. 혹시 할 말이 있으면 막사로 찾아…….”

“끌끌! 저도 왔습니다, 성자님.”

웬 음성이 내 말 허리를 끊었다.

어떤 놈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노인이 보였다.

“후작께서 여긴 왜…?”

가장 믿음 없는 불신론자였으나, 이제는 독실한 신도가 된 트란티스 후작이었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빛과 어둠의 전쟁! 저는 국왕 전하께 서기관의 자격을 임명받아,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자 참가하였습니다.”

나 참.

기사만 보내랬더니 이것저것 많이도 매달아 보냈다.

“정신 한번 놓으면 목이 날아가는 전장입니다. 그 누구도 개개인의 목숨을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아셔야 할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늙은이, 제법 다사다난하게 살아온 덕에 생존능력은 뛰어난 편입니다.”

다사다난한 정도론 안 될 텐데.

호언장담을 하는 후작을 보니 골이 아파왔다.

◈          ◈          ◈

다음 날.

여명이 다 밝기도 전에 북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밝게 빛나는 채가 빛을 머금은 북을 때려서, 그 웅장한 소리마저 빛을 품고 널리 퍼져나갔다.

우리는 그 소리를 따라 진군을 시작했다.

남대륙의 마갑병이 전부 여기 있다는 듯, 앞서 걸어가는 철덩어리들이 눈에 치이도록 많았다.

마갑병.

근접전에 취약한 마법사들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전쟁 병기.

얼마 전까지 마법사의 주적은 기사였으니, 마갑병은 기사를 보다 수월히 상대하고자 만들어진 마도구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마갑병 사이에 섞여 함께 나아가고 있는 저 기사들은,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마법사들을 지킬 터다.

남대륙은 더 이상 마갑병 제작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물론 승리한다면 말이지.’

패배는 곧 죽음이다.

호르교의 전력이 이곳에 모였으니, 이 싸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병력의 체력을 조절하며 진군을 이어나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와 썩은내는, 우리가 향하는 곳이 곧 죽음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 했다.

“……아빠.”

내 오른 손을 꼭 붙들은 아델이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그 감정의 여파가 마르에게까지 닿은 것인지, 그 또한 나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델가르텐과 마르가르텐.

내가 만든 여섯번째 피조물은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본래는 마계의 피조물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격을 가졌으나, ‘호르’의 몰락과 함께 시들고 말았다.

‘너희들 또한 예전의 힘을 되찾게 해줘야겠지.’

세계수는 이 세상의 근간이다.

그들이 힘을 잃은만큼, 이 세상이 병들었다는 뜻이었다.

“아라헬이랑 마몬이야. 그들이 넘어왔어.”

“그들은 지금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서둘러 제거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마계의 문이 활짝 열릴지도 모른다-

그 경고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저 멀리서부터 군단장들의 끔찍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야기가 통할거란 기대는 하면 안될 터.’

네번째 피조물인 아라헬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고, 다섯번째인 마몬은 제법 이성적인 면모도 있지만, 나 한정으로 미친 성정임엔 타 피조물과 차이가 없었다.

난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원망이 벌써부터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아델, 마르.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놈들을 만나기 전에 준비부터 해야겠지.

◈          ◈          ◈

우리는 한참을 진군했다.

타국의 국경선을 넘고, 다시 넘었다.

그 강행군으로 숨을 헐떡이는 이들이 속출한 탓에 군대의 걸음은 계속 늦춰지기만 했다.

결국 오늘 또한 예상보다 일찍 진군을 멈추고 말았다.

“성자님…… 또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야영 중, 메리가 말을 걸어왔다.

내내 어딘가 얹힌 얼굴을 하던 그녀는 두손을 꼭 그러모은 채였다.

“그래.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

나는 입만 우물거리는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기다릴 뿐이었다.

“성자님이 점점 까매져서……. 꼭 마인처럼 변하는 꿈을 꿨어요.”

“그리고? 그게 끝은 아닐 텐데.”

“어둠인지, 빛인지 모를 괴물들이 울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평화로워졌지만, 성자님께선…….”

역시. 메리에겐 성녀의 자질이 있었다.

그녀로부터 예지몽의 내용을 듣고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건 곧 내 계획이 성공한다는 보증과 같았으니까.

목까지 차오른 안도의 한숨을 꾹 누르며 메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파리했다.

“그렇게까지 꿈에 심각해지지마. 그래봤자 꿈이야.”

“정말 그럴까요……?”

“호르께서 함께하는데 뭐가 두렵냐.”

몇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나서야 메리가 웃었다.

“그렇죠. 호르께서 성자님을 지켜 주실 거예요.”

“그래. 밤이 늦었다. 어서 자.”

나는 메리를 내보내곤 자리를 잡고 누웠다.

다만 잠은 오지 않았다.

조용한 야영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과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만 새벽 내내 들려왔다.

◈          ◈          ◈

“저 협곡만 넘으면 티폰 왕국이다.”

알리사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거대한 협곡이 좁은 길목만 내어준 채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기만 넘으면 티폰 왕국이라.

쿵! 쿵! 쿵!

누군가가 진격의 북을 울렸다.

우리는 등을 떠미는 듯한 웅장한 북소리에 저항하지 않았다.

좁은 길목에 마갑병들을 먼저 이동시켰다.

그 뒤엔 기사들이, 또 그 뒤엔 스노우폴의 신도들과 마법사들이 줄지어 움직였다.

“전부 통과하였습니다!”

지휘관 하나가 마나를 담아 외쳤다.

고개를 끄덕인 알리사가 다시금 진군을 외쳤다.

목적지는 티폰 왕국의 수도였다.

다름 아닌 그곳에 마르크스의 리치들과 역겨운 군단장들이 자리를 잡았으니.

“크에에엑!”

이름 모를 깡촌 마을에서 언데드들을 마주했다.

노부부가, 코흘리개 꼬맹이가, 본디 순박했을 인상의 청년이.

이제는 시체가 되어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다만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 일도 없이, 마갑병의 선에서 처리되었다.

“…….”

언데드를 보는 건 리오 성의 사내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들뿐이었다.

참혹한 시체의 마을을 둘러본 프로트의 기사들은 눈을 감았고, 마법사들은 헛구역질을 했다.

“스승님. 북을.”

“알았다.”

쿵! 쿵! 쿵!

다시금 성스러운 북소리가 울렸다.

그 뒤를 따라 30인의 선지자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널리 퍼졌다.

우리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빛을 휘어감은 채 나아갔다.

몇 번의 작은 마을을 지나고.

몇 번의 도시를 지났다.

그러다 티폰 왕국의 요새를 마주했다.

리치들에게 저항한 흔적이 여실히 새겨진 요새, 무너진 성벽 사이로 시체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전투 준비!”

챙!

기사들이 검을 뽑고,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을 다시 한번 죽이기 시작했다.

“이 시체들을 또 마주하는 날이 오다니. 저희 인생도 참 기구하군요.”

마부를 힘껏 내리친 아발트가 언뜻 지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자 연합의 일원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대체로 앓는 소리였다.

“헛소리들 그만하고 집중하기나 해. 물리면 너희도 언데드가…”

가장 앞에서 가장 많은 시체들을 베던 나는 일순 몸을 떨었다.

진득하고 끈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

고개를 돌렸다.

요새의 반쯤 무너진 첨탑 위.

날개가 달린 여자가 서 있었다.

천사같은 외모였으나, 실은 절대 그렇지 않은 존재였다.

『아버지.』

네번째 피조물이자 마왕의 군단장, 아라헬.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칼고스처럼 웃지 않았다. 마왕처럼 울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분노를 토해내지도 않았다.

그저 첨탑 위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지잉-

나는 고리 다섯개를 회전시켰다.

눈동자에 기이한 감각이 어리며, 조금더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플라스의 눈 - 발동.』

5서클이 되어 어설프게나마 흉내낼 수 있게 된, 알리사의 비기.

수많은 마법사들을 좌절시켰던 그 마법이 내 눈에 덧씌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