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Episode. 49 역천 (1)
제법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친 몸과 마음에 채찍질을 가하며 버텨 왔다.
시간이 나면 마법과 폭성을 수련했고, 자는 시간을 쪼개어 회의를 거듭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으니, 조금이라도 풀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뭇 충격적인 기도가 내게 닿았다.
“…….”
어둠을 떨쳐 내려 하지 마라.
빛이 있기에 어둠의 탄생은 필연적이다.
빛과 어둠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니, 빛이 존재하는 한 새까만 자리는 끝없이 탄생하리라.
그건 휴거를 통해 보내진 어떠한 주술사의 경고였다.
그 경고가 뇌리에 완전히 틀어박혀서, 도무지 떠날 생각을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도의 탈을 쓴 경고문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술사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추상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혼란을 야기할지언정,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그의 말대로라면, 첫 번째 세계가 태초부터 어두웠던 이유가 전부 내 빛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한낱 오류 따위가 아니라.
“…….”
나는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했다.
의식이 저 깊은 곳까지 침잠하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성자의 육신 안에 꽁꽁 감춰진 신격.
저것이 너무 밝게 빛나서, 마계라는 어둠이 필연적으로 창조되어야만 했다는 뜻이라면.
마냥 오류라고 치부했던 것이 사실은 꼭 탄생해야만 했던 것이라면.
이 난세의 원흉은 누구에게 있는가?
홀로 자문해 보았으나, 자답은 쉬이 뒤따르지 못했다.
입술을 짓씹었다.
마왕은, 그 다섯 피조물들은 자신의 본질을 따른 것이다.
그저 태어나길 까맣게 태어났을 뿐이었다.
어둠이 어둠으로서 있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 어둠이 이 세계를 침공하여 수많은 피해를 낳았다.
그래서 그들은 죄가 되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실이다.
한데, 그렇다면.
어둠이 죄를 짓게 만든 ‘원흉’은 누구인가?
어둠은 무엇을 갈망하여 이곳을 침공하는가?
“빌어먹을.”
그저 전제 하나만 바꾸었을 뿐인데.
‘놈들은 오류로 탄생됐다’는 생각을 거둬 보았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내가 어둠을 오류라고 여긴 것부터 죄의 시작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엇이 되었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마계는 여전히 악당이고, 우리는 여전히 섞일 수 없었다.
◈ ◈ ◈
“마르크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강철가시 성의 회의실.
그곳에서 나는 신안으로 알아낸 것들을 밝혔다.
패퇴했던 카발과 2공자의 출전.
그 소식을 들은 지휘관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한 번 고배를 마셨으니 더욱 많은 준비를 해서 들이닥칠 터. 하물며 2공자까지 합류한다면…….”
“3공자와 2공자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니 병력을 나누어 습격해 올 가능성이 크군요.”
내 말은 끝나지도 않았건만, 지휘관들이 바삐 의견을 나누었다.
쿵쿵!
테이블을 크게 두드려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해 주었다.
애석하게도 본론은 이제부터였다.
“타하르 왕국, 티폰 왕국, 쟌 공국. 이렇게 세 국가가 마르크스에게 지원 병력을 보냈습니다.”
강제로 인한 것도 아닌, 자발적인 지원.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르크스의 승리에 확신을 가진 자들, 혹은 그들의 광기에 매료된 자들.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몰려들겠구나.”
알리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테이블 중간에 놓인 수정구 너머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각 요새마다 연결된 연락책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카발이 이끄는 군대는 다시금 이 성을 공격할 겁니다. 그의 입장에선 반드시 설욕전을 해야만 할 테니.”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덧붙였다.
카발 마르크스. 내 검에 목이 달아날 뻔한 마르크스의 혈통.
역시 그때 단칼에 죽였어야 했던 건데.
아쉽게도 꽤나 진귀한 아티팩트를 줄줄이 차고 있던 탓에 놓치고 말았다.
그리 생각하다, 힐끔 알리사를 살폈다.
저번의 전장에서 그녀가 내게 내린 명령은 카발의 수급을 챙겨오란 것이었다.
제 동생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릴 때의 표정은 정말 차갑기만 했다.
승리의 마녀란 별명이 무척 잘 어울렸다.
“이건 세 개의 국가가 참전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오. 이를 대체 어찌…….”
“여기서 밀린다면, 더 많은 국가가 마르크스의 옆자리를 견고히 다질 것이오. 그럴수록 우리에겐 승산이 없어질 게 자명하오.”
마법사들은 골머리를 싸매느라 바빠 보였다.
이번 싸움은 특히 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지원군들을 불러 모았다.
◈ ◈ ◈
“아빠아-!!”
“야, 임마!”
리하르트의 지원군들이 강철가시 성에 당도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쪽의 정원에서부터 라플라스의 국경선을 넘는 데만 2주일.
그로부터 다시 4일을 이동해 겨우 리하르트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성자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허허, 기세가 더더욱 정돈되신 것 같습니다.”
아론이 달뜬 어조로 말했다.
기드는 한걸음 물러난 채로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인사는 리하르트에게 닿지 못하였다.
“아빠, 아빠-!”
“이 녀석! 이 형님한테 언질도 없이 전쟁을 벌여?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리하르트의 품을 파고든 아델이 연신 아빠를 부르짖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모리츠는 그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는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홀로 떨어진 동생 탓에 마음 고생을 했던 모양이었다.
“큼, 흠흠! 그만, 그만!”
한참을 시달리던 리하르트가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리하르트의 동료들은 반가운 얼굴들을 이끌고 왔는데, 남쪽의 엘프 수십 명이 저 뒤편에 서 있었다.
윤기 나는 피부와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저들의 기력이 제법 회복되었음을 알려주었다.
“호오. 이들이 너의 동료더냐.”
그때 알리사가 다가왔다.
푸른 눈동자가 손님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나는 라플라스의 국왕, 알리사 마르크스라고 한다. 전시 상황인 탓에 성대한 환영 인사는 하지 못한 점. 양해를 부탁하는 바다.”
아론과 기드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예법이었다.
한데 어째선지 모리츠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모, 모리츠 바텐베르크라고 합니다. 제 못난 동생이 그동안 실례를 많이 끼쳤겠지요.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는 녀석이라 뻔할 뻔자이지요. 형인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아름다우신 왕이시여.”
우욱-
리하르트가 입을 틀어막았다.
한껏 내리깐 음성이 듣기 거북했다.
전장에서도 사랑은 꽃피는 법이라고 하더니만.
“후후.”
난데없는 모리츠의 구애에 알리사가 웃었다.
“전시 상황만 아니었다면 연회라도 열었을 터인데. 아쉽구나.”
“스승님께선 연회를 좋아하시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연회를 열어 기쁨을 누려야 함이 마땅하지. 그게 인생을 즐기는 법이란다.”
리하르트와 알리사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강철가시 성의 분위기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
고작 성 하나로는 도무지 막을 수 없는 대군이 몰려오는 중이었으니, 마법사들이 지레 겁을 먹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계 마법의 경고음이 3번 울렸다.
첫 번째 울음은 적군이 경계선을 넘었음을.
두 번째 울음은 적군이 제법 다가왔음을.
세 번째는 적군이 지척까지 왔다는 뜻이었다.
“허, 타이밍 하고는…… 오자마자 전투인가.”
“역시 성자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싸움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리하르트의 설명을 들은 동료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부터, 저 멀리 쿵쿵거리는 소리가 어렴풋 들려왔다.
삐이익-!
우는 새가 성의 상공을 날아다니며 적군의 당도를 알렸다.
미리 배치시켜 놓았던 마갑병들의 안광이 번쩍번쩍 빛나고, 성벽의 계단을 날듯이 오른 마법사들이 침을 꼴깍 삼켜 댔다.
쿵. 쿠웅.
성벽 아래 놓인 언덕 너머, 웬 까만 것들이 바글거렸다.
마기가 달빛마저 가린 탓에 적군의 모습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눈앞에 드리운 어둠이 밤의 어두움인지, 마기의 까만색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고로 보이지 않는 상대가 더 두려운 법.
성의 마법사들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알리사와 리하르트의 경우는 달랐다.
“예상대로 카발이 이끄는 군대로구나. 타하르 왕국과 티폰 왕국의 깃발도 보이는군. 게다가 놈들도 까맣게 물들었어.”
“2공자의 군대에 쟌 공국의 병력이 추가되었겠군요.”
“우선은 이 전투부터 끝내자꾸나.”
우워어어-!
그 순간, 적군에게서 괴성이 우렁우렁 터져 나왔다.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오른 그 괴성이, 성벽을 두드렸다.
“히, 히익!”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마수를 앞에 둔 기분.
강철가시 성은 싸움이 채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웬 노래가 성벽 위에 흘렀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알리사였다.
몸을 움찔 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로브를 깊이 뒤집어쓴 수십의 엘프들, 두 손을 그러모은 북대륙의 기사 셋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그것이 밤의 어두움이든, 마기의 새까만 색이든.
성가의 성스러운 음색이 어둠을 밀어냈다.
기가 눌렸던 마법사들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찬란한 격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촤르륵-
여덟 갈래의 사슬이 허공을 수놓자, 땅에서 굵은 나무줄기가 솟구쳤다.
네 자루의 별이 밤하늘을 밝히자, 기사들의 몸에서 빛이 터졌다.
[그저 믿을지니]
[이제는 동이 터 오를 차례이리라]
키잉, 키이잉-
이제는 네 개가 된 고리가 동시에 회전했다.
그 소음이 마법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상서롭게 빛나는 고리의 모습에 저들의 고리까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우어어어억-!
빛을 쬔 적군이 포효했다.
하지만 그 괴성은 이제 성벽에 닿지 못했다.
“……실로 대단하구나. 너희가 어떻게 싸워 왔는지 전부 머릿속에 그려지는 광경이야.”
알리사가 나직이 감탄을 토했다.
성가를 부르며 전투를 맞이하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숱한 어둠과 대적해 왔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진짜는 북대륙에 놓고 왔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그들과 라플라스가 함께 할 기회가 올 터이니.”
너스레를 떠는 리하르트의 음성에 기대가 어렸다.
리오 성의 템플나이츠와 라플라스가 함께할 때면 정말 듬직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