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52화 (152/216)

152화. Episode. 48 뜸들이다 엎은 격 (5)

반파된 성벽과 금이 간 성채.

전투가 끝난 호메르 성은 더 이상 요새로서의 기능이 불가능해 보였다.

성주로 추정되는 노인과 알리사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결계를 유지하는 주요 장치가 망가졌단다.

마법사들의 요새에 결계가 없다는 건, 성벽 없는 성과 똑같은 소리였다.

“고맙소. 그대 덕에 극악무도한 적들로부터 왕국을 지켜 낼 수 있었소. 아, 나는 아반 백작이라고 하오.”

성주가 내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마법사치곤 다부진 체격과 맑게 빛나는 눈이 꼭 기사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라플라스.

역시 좋은 인재들이 많은 왕국이다.

“리하르트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보니 막 이곳에 도착했을때, 어렴풋한 음성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호르께 기도 좀 하셔야겠습니다. 그분께서 백작 각하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으하하! 그렇군. 내 소망이 닿았던 것이구료! 이렇게 빛나는 원군이 온 걸 보니!”

성벽에 아반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다만 마냥 웃기만 하기엔 영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쿨럭!

주름진 그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아득바득 억누르던 마나 역류의 여파가 뒤늦게 찾아온 모양이다.

동시에 곳곳에서 앓아눕는 마법사들이 속출했다.

“적들은 선발대일 뿐이었소. 곧 본대가 들이닥칠 터.”

백작이 털썩 자리에 주저 앉고는 이를 악물었다.

성을 둘러보는 얼굴에 다시금 무거운 기색이 맴돌고 있었다.

“보다시피 이런 몸상태로 진형을 옮기기엔 시간이 촉박하오. 그대는 국왕 전하와 돌아가시오. 단 한 번의 승전보만으로도 자국의 사기가 올라갈 것이오.”

“그럼 백작 각하께선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적들을 막아야지! 단 한 걸음이나마 놈들을 저지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이지 않겠소?”

용맹을 불태우는 아반 백작.

그의 모습은 마치 리오 성의 기사들을 연상시켰다.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저들을 도울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했다.

역시 내 스승님은 나를 잘 알았다.

“마법사는 만전의 상태일 때에서야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요. 여기서 성과 함께 무너지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역류에 빠진 상태요. 어쩔 도리가 없는 게지.”

고개를 도리 젓는 백작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곤 신앙을 듬뿍 흘려 주었다.

“그깟 마나 역류 따위, 호르의 은혜가 함께하면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제가 마법사들을 치료할 테니 서둘러 이동할 준비나 해 주십시오.”

목적지는 강철가시 성.

그곳까지 가는 길에 호메르의 병력을 열렬한 신도로 만들 셈이었다.

◈          ◈          ◈

남대륙엔 긴장이 감돌았다.

강대국, 약소국 할 것 없이 모든 국가와 세력이 단 한 곳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 라플라스.

그들은 라플라스가 단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 선언을 뱉으리라 예상했다.

아니, 어쩌면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꼬리를 말 것이라 단언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라플라스를 향한 눈과 귀는 한낱 흥미 위주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남대륙을 지배해 온 마르크스에게 반기를 든 나라는 실로 수십 년 만이었으니, 관심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라플라스가 호메르 성의 수성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곧바로 들이닥친 마르크스의 본대에 결국은 무너졌으나, 첫 전투의 승전보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3공자가 이끄는 본대의 전력은 국가 하나를 능가했다.

고작 선발대에 성 하나, 마르크스의 본대가 진군을 시작한 이상 라플라스에 희망은 없다고 여겼다.

이윽고 그 강대한 전력이 강철가시 성에 도착했다.

“어둠에 심장을 빼앗긴 자들이 마르크스에게 반항하는가!”

쾅, 콰앙-!

3공자, 카발 마르크스의 마법이 강철가시 성의 결계를 때렸다.

대기가 요동치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부르르-

어째선지 카발은 스스로가 펼친 마법의 전율에 몸을 떨었다.

‘강하다! 이것이 빛의 은혜란 말인가!’

제 손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탐욕이 일었다.

저 악의 축을 무너트린다면, 아버지께서 더 많은 은혜를 나누어주시리라.

어쩌면 신의 총애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절로 마나가 솟구쳤다.

“공격하라! 가시를 죄 꺾어 버려라!”

그들이 사기충천하여 마법을 엮었다.

상등품의 마갑병 수만 기가 칼과 방패를 뽑아 들었다.

그 강맹한 대군 앞에 강철가시 성은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 시간이면 끝나리라 여긴 전투가 하루가 넘어갔다.

하루 반나절이면 끝나리라 생각한 전투가 어느덧 삼 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카발 앞에 우뚝 솟은 성은 굳건했다.

당혹스럽기도 잠시, 어느 순간부터 카발의 가슴에 천불이 솟았다.

남대륙의 시선이 모조리 이곳에 쏠렸는데, 이깟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치욕스러운 일도 없을 터였다.

자신감이 조바심으로 변모한 건 순식간이었다.

“이익! 어둠에 영혼까지 팔아넘긴 것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되었다! 마갑병으로 모두 쓸어버려라!”

아쉽게도 카발의 명령은 충실히 이행되지 못했다.

쩌어엉-!

마르크스의 문양을 새긴 철덩어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 기마병입니다!”

눈 좋은 마법사 하나가 소리쳤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카발이 몸을 흠칫 떨었다.

웬 거대한 기마병들이 가문의 병기를 모조리 박살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라플라스의 마갑 기마대입니다!”

강철가시 성이라는 이름의 유례, 그건 바로 마갑병의 특별함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말의 형태를 한 몸에 기사의 상체가 달린 그것들은 상급 기사들의 돌격에 못지 않은 박력이 느껴졌다.

그 중 하나가 카발에게 랜스를 겨눴다.

“흥! 겁먹지 마라! 다리를 노리면 된다!”

쾅!

카발이 쏘아보낸 마법이 기마병의 다리를 분질렀다.

달려오던 모습 그대로 고꾸라지는 작태에 마법사들의 동요가 차츰 가라앉았다.

‘제법 놀랍긴 하지만 그뿐이다. 오늘, 이 성은 함락될 것이다!’

카발은 승리를 직감했다.

벌써부터 빛의 총애가 자신과 함께하는 것만 같았다.

촤륵-

그때 어디선가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서걱.

한 번의 사슬 소리에 냉병기가 무언가를 베는 소음이 뒤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트였다.

마르크스의 마갑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쓰러져 드러난 길목.

그 한복판에 웬 기사가 있었다.

◈          ◈          ◈

수많은 왕국과 마법가들이 귀를 활짝 열었다.

골리앗이 다윗을 어떻게 잡아죽였는지 가감없이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의 귓가에 마침내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마르크스의 3공자를 선두로 한 본대가 패퇴했다.]

라플라스가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는 호메르 성을 제외하면, 카발의 군대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만의 마법사 중 생존자는 5천 미만.

4만의 마갑병 중에 1만기도 채 회수하지 못한 채 패퇴.

그것이 의미하는 건 압도적인 패배였다.

“맙소사!”

충격적인 소식에 남대륙 자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라플라스에 대한 소문이 잇따랐다.

[전대미문의 마검사가 활약을 펼치고 있다.]

[라플라스의 국왕이 예전의 힘을 되찾았다.]

그때부턴 몇몇 국가가 계산기를 꺼내들었다.

태도를 달리하고, 숨을 죽였다.

‘마르크스가 약해진 것인가. 라플라스가 강해진 것인가.’

어떤 제국의 황제는 눈을 빛냈다.

오로지 마르크스가 약소국을 어떻게 요리할지에 대해 흥미를 갖던 그들이, 이제는 라플라스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굳건하던 마르크스의 위신이 그만큼이나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때, 이번엔 기이한 소문이 흘러나왔다.

[마르크스가 어딘가 이상하다.]

[그들의 군대가 전부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눈치 빠른 몇 국가는 진즉 알고 있었지만 쉬쉬하던 이야기.

그것이 비로소 공론화 되고 말았다.

“좋아, 좋아.”

신안으로 대륙의 정세를 살펴본 리하르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단 두 번의 전투만으로 마르크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대승도 이런 대승도 없었다.

마르크스는 어둠을 숨기지 못한다.

애초에 어둠을 어둠이라 여기지 않으니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할 터였다.

‘곧 모두가 알게 되겠지. 마르크스가 미쳤다는 것을. 악의 축이 바로 저 짝이란 걸 말이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마르크스의 광기를 알아차렸다 해서, 다른 국가들이 무조건적으로 라플라스를 돕지는 않을 것이다.

힘 있는 자가 곧 법이고 정의다.

이 경우엔 아직 마르크스가 법이었다.

강자 앞에서 약소 국가가 살기 위해선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이긴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다른 놈들은 지켜보기만 할 거야.’

리하르트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악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라플라스의 명분.

그것을 챙긴 것만으로도 언제든지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라플라스의 편이 생겨날 조짐이 꿈틀거리는 중이었으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알리사에게 대륙의 정황을 알렸다.

“후우. 마르크스는 뜸들이다 엎은 격이구나.”

“그렇지요. 처음부터 라플라스를 몰아붙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둠을 빛이라 섬기니,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틀린 것이지.”

알리사가 리하르트를 두 눈에 담았다.

희소식을 들었건만, 그녀의 눈가에 자그마한 염려가 일렁였다.

“그래, 속은 괜찮아졌더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크게 다친 곳도 없습니다만.”

“그때 말이다. 네가 조금 힘들어 보였단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리하르트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말했다.

호메르 성에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눈이 밝은 건 마냥 좋기만 하진 않지. 보지 말아야할 것이 보이기도 하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분노를 쏟아내던 거인.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던 거대한 눈.

찬란히 빛나던 십자가는, 오롯이 선 채로 그 지독한 원망을 떠안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엔 그렇게만 비춰졌다.

“……괜찮습니다. 다시 바로잡으면 됩니다.”

리하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퀭한 눈가는 그가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려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