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Episode.48 뜸들이다 엎은 격 (4)
“나는…….”
입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검자루를 타고 전해지는 ‘악연’의 떨림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마왕의 울음이 말문을 틀어막았다.
으득-
혀를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나는 역시 너희가 싫다.”
그래. 싫다.
저들은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
천하에 다시없을 쓰레기이자, 이 모든 재앙의 주범으로 몰아간다.
만약에.
저들이 착했다면, 난 큰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착하지 않았다.
“탓하려거든 너희의 비틀림을 탓하고, 슬퍼하려거든 너희의 거뭇함에 슬퍼해라.”
내가 첫 번째 세계를 만들었을 때.
신의 상서로움에 온몸이 녹아내리던 다섯 피조물들을 기억한다.
녹아내린 살갗 사이로 한껏 치켜 올라간 입꼬리는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 광기 어린 애정은, 불꽃에 달려드는 부나방에 지나지 않았다.
갈망하고 또 갈망하나, 그들은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족속이란 뜻이었다.
심지어는 그 까맣고 붉은 세계마저 신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 ‘호르’는 그곳에 있어서 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했던 걸까.
죄다 소멸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원하지 않던 색과 모양새라고는 하나, 난 그들에게 애착을 품고 있었다.
하여 내가 만든 첫 번째 세계를 그들에게 온전히 넘겨주었다.
적어도 나로 인해 죽지는 않도록.
스스로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 우으…….
울음이 거세졌다.
검의 떨림이 강해졌다.
그에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거기서 살지. 그곳에서 쥐 죽은 듯이 살아갈 것이지.”
왜 이곳까지 와서 사달을 일으킨단 말인가.
이제 와 저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많은 이들이 1차 성마대전에서 죽었다.
성마대전이 이쪽의 승리로 끝난 직후, 난 마왕과 그 수하들이 포기하기를 바랐다.
마계야말로 그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으니까.
하나 놈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렇듯 다시 찾아왔다.
오늘날엔 리오 성의 동료들이 스러져 나갔다.
아마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그런 피바람을 앞에 둔 이상, 내게 남은 건 안타까움도, 미안함도 아닌 책임감이었다.
이 세상에 있어서, 마왕은 그저 재앙이 되어 버렸다.
내 안일함으로 비롯되었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우리는 너희 세계를 침범한 적이 없다. 선을 넘은 것은 네놈들이야.”
악연에 별을 덧씌웠다.
그러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 끝을 마왕의 눈을 향해 치켜세웠다.
- 아버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돌아가. 마계에 처박혀 지내라.”
- 아버지이…….
척.
검을 쥔 팔을 한껏 뒤로 뺐다.
온몸의 근육을 꽉 조인 상태로, 악연을 쏘아 올렸다.
쐐애액-!
빛에 휘감긴 칼날이 눈알 한복판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왕은 저항하지 않았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호메르 성을 괴롭히던 이단의 신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군의 환호성이 전장을 울렸다.
알리사와 호메르 지휘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데 왜 이리도 입안이 씁쓸한 건지.
난 차마 악연을 휘감은 별을 없애지 못했다.
◈ ◈ ◈
신이 사라진 이단은 그저 살색 까만 마법사에 불과했다.
설령 그 마법이 조금 흉흉하다 하더라도, 호메르 성엔 승리의 마녀가 함께하고 있었다.
쿵.
발을 구른 그녀의 곁으로 마법진 서른 개가 떠올랐다.
제각기 다른 원소 마법이 적진의 결계를 무참히 깨트렸다.
쾅, 콰아앙-!
그사이로 아군 마법사들의 폭격이 쏟아졌다.
“…….”
이로써 승기는 완전히 넘어왔고, 아군의 피해도 더 이상 늘지 않았다.
한결 여유를 되찾은 알리사가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리하르트가 그곳에 있었다.
팔짱끼고 선 자세는 덤덤했으나 투구 너머의 눈빛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니, 함성이 빗발치는 호메르 성에서 그 혼자만 침체된 분위기였다.
“괜찮으냐.”
“또 무엇이 말입니까?”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물은 바 있던 것을 또 물어보았다.
그러자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피가 난무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군을 위해서라도 착잡한 감정을 내색하지 말라 했으니, 그 이유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리하르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번을 물어도 답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버지라.’
지독한 기운을 내뿜던 눈알은 분명 리하르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온 세상이 울음소리와 폭음으로 가득 찼을지언정, 리하르트의 지척에 있던 알리사에겐 그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알리사는 대화의 내용보다는 제자의 감정에 집중했다.
“리하르트.”
“예.”
“고맙다. 네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분에 피해가 많이 줄 수 있었다.”
토닥토닥.
그녀의 손이 마갑병의 철제 투구를 쓰다듬었다.
“정말 잘해 주었다.”
“갑자기 웬 칭찬이랍니까?”
“자고로 풀죽은 아이에겐 칭찬이 특효약이라고 하지 않더냐. 하물며 넌 칭찬받아 마땅한 일을 했단다. 자, 보거라!”
그녀는 이번엔 손을 뻗어 전장을 가리켰다.
전장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무너진 성벽 앞, 수많은 시체가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야, 참 기운 나는 광경입니다.”
“그것 말고. 아군들을 보란 말이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당장 조금 전만 해도 두려움에 떨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승리에 기뻐했다.
알리사는 그게 모두 리하르트의 공이라 칭찬해 주었다.
“그러니까, 너도 조금은 기뻐해도 된단다. 모두가 너를 바라보고 있지 않느냐.”
그제야 리하르트가 몸을 움찔했다.
주변을 돌아볼 때마다 시선이 마주쳤다.
“마검사이시여! 용전에 경의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에게 경의를 받는 기사는, 리하르트가 처음이었다.
리하르트도 그것이 못내 기꺼운 모양이다.
파앗-!
그가 빛을 내뿜었다.
“오오, 호-르!”
“호-르!!”
반쯤 무너진 성벽 위에 함성이 가득 찼다.
그 사이엔 아반 백작도 함께였다.
◈ ◈ ◈
“호오르으으으-!!!”
타이탄에 괴성이 울렸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휴거의 음성이었다.
그런 그의 어깨에 거대한 송곳니가 장식된 견갑이 매달린 채였다.
“새내기 장군! 또 헛소리 한다!”
“왕한테 처맞고 정신이 나갔나, 퀴익!”
해괴한 것을 보는 듯한 오크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휴거는 연신 호르를 외쳤다.
어째선지 그러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췩, 또 대단한 인간 전사가 대단한 일을 했나 보오.’
한참 호르를 외치던 그가 콧잔등을 문질렀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업적을 세웠음을 홀로 어필하는 것이다.
‘지금쯤이면 호르 양반한테 전해 들었겠지. 나 장군이 됐다오, 대단한 인간 전사!’
비록 빈사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맸다지만, 이렇게 보란 듯이 살아나 호를 외치는 자신이 대견했다.
“크륵! 휴거 장군! 오늘도 왕한테 도전하지 않겠는가?”
“그거 구미가 당기네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소. 껄껄!”
웬 오크의 말에 휴거가 손사래를 쳤다.
웃을 때마다 뼈마디가 아려 왔다.
크록타의 무력은 휴거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다.
머리가 나쁜 휴거는 그 사실을 뼈에 새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냐, 이제와 겁을 집어먹은 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취익!”
휴거가 정색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반년! 반년 안에 왕을 자빠트릴 것이오.”
“오오오!!”
새내기 장군의 당돌한 발언에 투박한 주점이 소란스러워졌다.
“반년짜리 장군직이었구먼! 크하하!”
오크들은 용맹을 일순위로 따진다.
그렇기에 타이탄의 떠오르는 인기스타가 바로 휴거였다.
왕과 13번 싸워 13번 진 전사는 그밖에 없었으니.
“뀌이익! 오늘은 내가 술을 사겠다!! 휴거 장군을 위하여!”
샛누런 오크가 골든벨을 울렸다.
그렇게 주점의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를 때였다.
늙은 오크 하나가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우락부락한 근육의 소유자인 마초 오크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오크였다.
“네놈이로구나.”
그 오크가 지팡이를 땅에 찍으며 말했다.
기이할 정도로 크게 몰아쉬는 숨결에 온몸에 매달린 장신구가 출렁였다.
“취익?”
시선을 느낀 휴거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시오?”
“난 타이탄의 하나뿐인 주술사, 파튼이다. 쿠륵!”
“호오, 주술사는 처음 보는구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주술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끌벅적하던 주점이 어느샌가 적막에 휩싸인 채였다.
“자리를 옮기지.”
◈ ◈ ◈
파튼이 휴거를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의 거처였다.
온갖 기이한 물건들이 곳곳에 내걸린 장소였는데, 역한 냄새가 풍긴 탓에 휴거가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오? 골든벨이 울렸단 말이오! 어서 용건만…….”
“네놈, 빛의 전사렷다? 쿠륵!”
우뚝.
휴거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왕과의 결투를 보았나 보군. 취익!”
“흐음…….”
파튼은 한참이나 휴거를 살펴보았다.
백색의 눈동자는 마치 흰자위만 가득한 것 같아서,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씨익-
그가 웃을 때면 금니가 번쩍였다.
“어둠이 짙어지면 빛이 더욱 밝아지고. 빛이 밝아지면 또 다른 곳에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췩?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오?”
“어찌하여 빛은 그것을 모를꼬? 어둠과 빛은 도끼의 양면과 같을 터인데! 크루륵!”
휴거가 뒷걸음질을 쳤다.
몸을 꺾어가며 웃어 대는 파튼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괴이했다.
‘뭣, 이 용맹한 휴거 장군님이 뒷걸음질을 쳤단 말이오?’
화들짝 놀란 휴거가 다시 자세를 바로할 때였다.
와락-!
주름진 파튼의 양 손이 휴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뀌이익?!”
“빛의 전사여!”
파튼의 입에선 구역질나는 악취가 났다.
“그대가 섬기는 빛에게 전해라. 그대는 결코 어둠을 떨칠 수 없을 거라고. 떨쳐서도 안 된다고 말이야.”
꽈드득.
늙은 오크의 악력은 보기보다 제법 강했다.
휴거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정체가 뭐요.”
“빛이 어둠을 만들지. 그건 당연한 순리 아니겠는가!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