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Episode. 48 뜸들이다 엎은 격 (3)
마갑병 하나가 성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쿠웅.
저 밑에서 뒤늦게 육중한 소음이 일었다.
아반 백작이 황망히 눈을 깜빡였다.
외양은 마갑병이었으나, 그것이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그말은 즉,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마갑병이 아니었다.
백작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그리고 곧장 알리사에게 무릎을 꿇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오. 서둘러 몸을 추스르고 수성에 집중하시오.”
알리사의 눈엔 마법진이 그려진 채였다.
전장의 전황이 그 눈에 여실히 담겼다.
많은 아군이 이미 죽었다.
성벽은 군데군데가 무너졌고, 채 꺼지지 않은 불길이 세를 불리는 중이었다.
백작이 피 묻은 입가를 짓씹었다.
“어찌 왕께서 이런 전장에 오셨습니까. 혹여나 일이 잘못되면……!”
승산 없는 전장에 당도한 왕.
그녀만으로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바로잡기란 힘들 것이다.
“아반 백작.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송구하오나, 대군이 아닌 이상 역전을 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어서 대피하십시오.”
그때, 적군의 마법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성벽 위에 우뚝 선 알리사는 적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대는 애초부터 마르크스의 사람이 아니었지. 두 눈을 잃었을 때의 내 모습밖에 보지 못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그녀와 백작을 노리고 날아들던 마법 십수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디스펠 마법이었다.
흉흉한 기세로 쏘아진 마법들이 한낱 마나의 기류로 바뀌어 알리사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꼭 왕명을 내려야만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작이 꿇었던 무릎을 폈다.
엉망진창이 된 성벽과 공포에 떠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이런 모습을 왕께 보였다니.
한 박자 늦은 수치심이 그를 엄습했다.
“이것들아, 무엇하고 있느냐! 싸워라! 호메르 성을 지켜라! 승리의 마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느냐!”
늙은 성주의 음성이 성벽을 따라 울렸다.
한데, 마법사들은 성주의 명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몸으로나마, 전장의 한복판을 눈으로 좇고만 있었다.
“무슨……!”
대체 뭘 보고 그리 놀란 건지.
그 시선들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백작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촤아악-!
그곳에선 이질적인 소리가 울렸다.
냉병기가 피륙을 가르고, 갈라진 살덩이에서 피가 쏟아지는 소리.
“크아아악!”
“죽여, 죽여라!”
사냥에 나선 맹수처럼 고고하던 적들이 고통스런 괴성을 질렀다.
불그스름한 피보라 사이로 웬 마갑병 하나가 보였다.
조금 전 성벽에서 뛰어내렸던 마갑병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다른 마갑병들은 대다수가 처참히 나뒹굴고 있는데, 오직 그것만이 용전에 용전을 거듭했다.
날카로운 검격이 적군의 일각을 갈랐다.
신묘한 검술로 마법을 흘려 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저자는 분명…….”
왕도에 율법이 내린 날, 아반 백작 또한 그 자리에 참석했었다.
그래서 왕도의 손님에 대하여 어느정 도는 알았다.
앨런 도련님의 친구이자, 바텐베르크의 혈통.
틀림없다.
저 사내는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다.
“빚을 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아반 백작이 성벽을 내달렸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마법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지팡이를 쥐라며 독려했다.
◈ ◈ ◈
일검에 적군의 마갑병 10기를 베었다.
그 빈자리는 삽시간에 메꿔졌으나, 이미 내 몸은 적진 한복판에 파고든 뒤였다.
쐐애액-!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마법을 발현했다.
1써클의 볼트류부터, 제법 고절한 마법까지.
마기를 품어 흉흉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그것들이 내게 쏘아졌다.
난 검을 들었다.
시야 한켠에 ‘초집중’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후읍-
숨을 들이마시곤, 지척에 다가온 마법에 검을 가져갔다.
핑-
검신을 타고 내린 볼트 마법의 촉이 뒤편으로 튕겨졌다.
피잉-
길쭉한 불의 창이 검면에 치여 저 멀리 날아갔다.
핑, 핑, 핑, 핑-
흘리고, 흘리고, 또 흘렸다.
나를 향한 공격이 애꿎은 것들을 강타한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그 끝엔 지휘관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서 있었다.
시꺼멓게 물든 얼굴엔 이루 말할 수 없느 공포가 서려 있었다.
폭급하게 치켜든 지팡이에서 마법진이 펼쳐졌다.
“주, 죽어-!”
이번 것은 꽤나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흘려내기엔 무리가 있고, 막아 내기엔 부담스럽다.
그래서 베었다.
콰앙-!
갑옷을 쩡쩡 울리는 폭음 사이로 땅을 박찼다.
희뿌연한 흙먼지를 뚫고 나오니, 당혹에 물든 지휘관의 얼굴이 눈에 틀어박혔다.
서걱-
그 머리통에 실선 하나가 그려졌다.
바람결에 떠밀린 반쪽 머리가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후우…….”
천천히 숨을 고르니,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적진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드디어 호메르 측의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눕혀지듯 기울었던 전세가 조금씩 곧추세워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
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연신 흘리던 음울한 소리조차 내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저를 섬기는 이들이 죽어 나가는 건 안중에도 없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마왕을 바라보며, 빛을 밝혔다.
뒤편의 함성 소리는 더욱 커지고, 내 앞의 적들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우스웠다.
저들에겐 내가 악의 우두머리로 보일 테지.
이 빛이 더없는 어둠으로 느껴질 것이다.
“보아라. 너희들이 섬기는 신은 너희를 보살피지 않는다.”
반응이 없다.
쏘아지는 마법을 흘리며 한 걸음 나아갔다.
“기적을 바라는가? 보살핌을 원하는가? 정녕 너희들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자 반응이 왔다.
- 호…… 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제가 신인 양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놈 따위,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신이시여!”
“저것을 죽여 주십시오!”
이단들이 신을 부르짖었다.
나를 손가락질 하며 천벌을 내릴 것을 소원했다.
촤악-!
하지만 이단의 신은 그들을 버렸다.
신도의 목이 허공을 날아도. 검은 피가 솟구쳐도.
집요한 시선은 나만을 쫓았다.
- 호르! 호르으-!!
분노, 증오, 원망.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너희들의 신은 평등하지 않은가 보구나. 제 신도가 죽는데도 관심조차 없는 걸 보니.”
짐짓 불쌍하다는 듯.
나는 혀를 찼다.
이해 불가한 것을 보는 이단들의 시선이 나를 찔렀다.
그들은 온통 붉고 까맸다.
그게 꼭 내가 처음 만들었던 세계를 연상시켰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붉고 까만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색이 아니었다.
원하지 않던 것이니 보살피고 싶지 않았다.
나와 반대되는, 부정한 것이니 보살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부르르-
손아귀에 쥐여진 검 자루가 떨렸다.
‘악연’ 속의 거인이 분노한 것 같았다.
하늘에 틀어박힌 눈에선 핏발이 섰다.
“너희는 이단이야. 뼛속까지 까매져서, 어떠한 색도 덧칠할 수 없지.”
몸을 돌려 달아나는 놈이 하나 보였다.
화려한 옷매무새를 보니, 일선 지휘관 중 하나로 추정되었다.
촤르륵-
손목의 쇠사슬이 넘실거리다, 그놈을 낚아챘다.
“사, 살려…….”
“나는 너희를 포기했어.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적으로 간주했다.”
사슬에 칭칭 감긴 지휘관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다 이내, 목 달아난 시체가 되었다.
“어둠. 그건 빛이 전지전능하지 못하게 된, 유일한 오점이다.”
빛은 거의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었다.
다만 어둠을 개화시키지는 못했다.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없었다.
오직 죽여 없애는 것만이 답이었다.
하물며, 그 어둠이 양지로 기어 나오려고 발악할 때는 더더욱.
쿵, 쿵, 쿵!
지축이 울렸다.
사기가 드높아진 호메르 측이 자국의 마갑병을 진군시키는 중이었다.
나는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우…….
마왕은 울고 있었다.
비록 본체가 아닌, 흔적에 불과할 뿐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울고 있었다.
참 안타깝게도 놈의 눈물은 그 자체로 악의 정수에 가까웠다.
지고한 생명체, 용이라 할지라도 이 눈물을 뒤집어쓰면 광룡이 된다.
이단이 그것을 뒤집어쓰면 어찌 될까.
알고 싶지도 않다.
몽글몽글 맺혀 전장에 떨어지는 붉은 눈물 한 방울.
그에 맞춰 빛을 쏘아 올렸다.
눈부신 듯, 붉고 거대한 눈이 연신 끔뻑였다.
“제자야. 괜찮은 게냐?”
언제 온 것인지, 알리사가 내 옆에 있었다.
라플라스의 눈이 나를 오롯이 담았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피가 난무하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가는데, 그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구나. 이게 전쟁이라는 것이지.”
알리사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도 드디어 승기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아군을 위해서라도, 착잡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니라.”
그녀의 지팡이에서 빛이 일었다.
허공에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며, 위력적인 마법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광-!
하늘은 울고, 땅은 몸을 떨었다.
그사이에 끼인 이단들은 신의 기적을 부르짖으며 죽어 나갔다.
“써클은 두었다 뭐 하느냐.”
한순간에 대단한 위용을 보인 알리사가 핀잔을 주었다.
그에 손을 뻗어, 고리를 돌렸다.
어느덧 3개가 된 빛의 고리가 공명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키이이잉-!
하얗게 불타오르는 불의 창이 적진을 가로질렀다.
궤적에 남은 불길에 닿을세라, 이단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속이 울렁인다.
언제나 냉정을 유지시켜 주었던 얼음 왕관은 옛적에 잃어버린 터라, 이 살육의 부담을 오롯이 감당해야했다.
사실, 인간과의 전쟁은 나로선 처음 겪는 것이었다.
뿌득 이를 갈며 다시금 하늘과 눈을 마주했다.
- 아버지…….
음울한 중얼거림.
약간의 애틋함.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도, 놈은 애정을 갈구하는 모양이다.
- 아버지!!
하늘이 울부짖었다.
애증의 외침이 온 전장을 울렸다.
음울함에 열기가 서렸다. 애틋함이 조금씩 비틀렸다.
- 우으, 우으으……!!
그건 흐느낌, 혹은 옹알이에 가까웠다.
잔뜩 짓뭉개진 감정의 덩어리가 여과 없이 퍼부어졌다.
그럴수록 악연의 떨림도 강해졌다.
『잔인하십니다.』
『너무도 잔인하십니다……!』
원망 섞인 음성이 골을 뒤흔들었다.
『당신은 저희들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직접 빚어낸 태초의 생명들이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어찌하여 저희를 이리 비참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검신이 휘어질듯 몸을 떨며, 악다구니를 써 댔다.
원색적인 분노를 감내하던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