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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48화 (148/216)

148화. Episode. 48 뜸들이다 엎은 격 (1)

앨런과 마법사들은 한참을 걸었다.

이동 수단도 없이, 제 발로 직접 왕국을 횡단했다.

언제 어디서 마르크스의 사냥개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라플라스로 피신한 50인의 정예 마법사들.

마르크스가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앨런과 일행들이 막 국경을 벗어났을 때, 웬 괴한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을 가린 로브의 끝자락에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가 허리를 접었다.

“가문의 혈통, 앨런 도련님을 뵙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가주님의 명령을 받아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척살대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깊이 눌러쓴 로브가 일순 펄럭였다.

그 아래 드러난 그들의 얼굴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도련님께선 결국 라플라스에 가담하기로 하신 겁니까?”

“그렇다고 답한다면, 나까지 처단할 생각인가?”

“…….”

척살대가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도련님은 가문으로 모셔 오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남자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기세까지 부드럽지는 않았다.

“단, 당신께 어둠의 흔적이 새겨져 있을 시. 즉결 심판하라는 전언도 있었지요.”

“호오.”

앨런이 고개를 까닥였다.

두 팔을 벌리곤 제 몸을 드러냈다.

“그 어둠의 흔적이라는 것이 내 몸에 있는가? 어디 자세히 살펴보아라.”

“……가주께서 얼마나 크게 상심하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지팡이를 꼬나 쥔 사냥개들이 으르렁거렸다.

그것이 우스웠던 걸까.

앨런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상심이라.”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서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과연 나만큼 상심이 크실까. 나는, 내 손으로 아버지와 가문을 불태워야만 하는데.”

화르륵-

솟구친 마나의 기류를 타고 성화가 타올랐다.

“……!”

어둠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성화는 지옥의 불처럼 보였다.

그들의 지팡이 앞에 마법진이 순식간에 연성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들을 뒤로하고, 앨런은 제 뒤편의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이것이 이단을 심판하는 불꽃이다. 심판관으로서 소양이 부족한 내게, 호르께서 내려 주신 힘이지.”

불꽃이 몸집을 부풀렸다.

능히 일대를 집어삼킬 만큼 커다랗게.

“성화는 흑과 백을 명명백백히 구분시켜 주니, 악에 물든 자는 결코 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50인의 마법사들은 성화의 힘에 탄성을 질렀다.

자신의 몸에 들러붙은 불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사냥개들의 경우는 달랐다.

“끄, 끄아악!”

지팡이가 녹아내렸다.

옷가지가 살에 눌어붙었다.

시꺼멓게 물들었던 살이 하얗게 타올랐다.

정신도, 육신도 어둠에 먹혀 버린 그들에게.

성화는 그들의 눈에 보인 그대로, 지옥불 그 자체였다.

“빛을 빛으로 보는 신도들아. 나는 너희도 이 불을 이어받기를 원한다.”

이단을 전부 태워 죽인 심판관은 마법사들에게 그리 말했다.

이단 심판 부대의 창설, 그 첫걸음이었다.

◈          ◈          ◈

검성의 첫 번째 비기, 폭성(爆星).

발락이 보여 준 그 파괴력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내 뇌리에 깊히 틀어박혔다.

그래서일까.

결국 알리사한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쓰읍! 제자야, 오늘도 정신이 딴 곳에 가 있구나?”

“아닙니다.”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 게냐?”

알리사가 지팡이를 붕붕 휘둘렀다.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강타할 것 같은 기세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거 완전 갈대 같은 녀석이로다. 마법에 관심이 있다 할 때는 언제고, 고작 비기 하나 보았다고 눈이 돌아간 것이냐!”

동동 발을 구르며 성을 내는 그녀의 뒤편에서, 한 노인네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세상 흐뭇한 표정을 지은 발락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한테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느니라! 너를 위해 내가 아끼던 지팡이까지 선물해 주었건만…….”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손아귀에 멋들어진 지팡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윽…… 화날 만도 하지.’

애인에게 큰 맘 먹고 명품을 주었는데, 막상 그 애인은 딴 여자한테 헤벌레 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었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흥! 너에게 그 지팡이는 과분한 선물인 것 같다. 이리 내놓거라.”

아아. 보통 화난 게 아닌 모양이다.

척 하고 들이밀어진 손이 무척 단호했다.

이쯤 되면 지팡이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마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이 제자는 힘 하나가 아쉬울 때입니다. 그래서 검성의 비기가 더욱 크게 와닿은 모양입니다.”

“그럼 검술에 매진하거라. 너에게 내 가르침은 시간 낭비일 뿐인 것 같으니.”

으음.

이토록 난처한 상황은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발락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라플라스의 왕이 옳은 말을 했다! 제자야, 이참에 온종일 비기나 수련하자꾸나! 검성만으로도 능히 정점에 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성큼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알리사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자! 가자꾸나. 오늘은 폭성의 묘리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주마!"

“가기 전에 지팡이 내놓고 가!”

발락이 내 손을 붙들곤 끌어당겼다.

알리사가 내 왼손을 움켜쥐었다.

둘 사이에 끼어 있노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후…….”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아아-

몸을 타고 빛이 내달렸다.

내 양팔을 찢을 기세로 잡아당기던 두 사람의 악력이 사그라들었다.

‘이런 일에 후광까지 꺼내 들다니.’

자괴감이 사무쳤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알리사 스승님.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진심을 확인하셔도 됩니다.”

알리사가 몸을 움찔했다.

신도가 된 그녀는 후광의 지대한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분노는 사그라들고, 마음에는 자애가 깃들 터.

“……한 번만 더 내 시간에 딴 생각을 품으면, 다신 봐주지 않을 거란다. 난 질투가 많은 성격이다.”

후광 요법은 성공적이었다.

옆에서 발락이 혀를 차는 소리가 거슬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자, 스승님. 멀티 캐스팅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제자는 스승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흥……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는 뭐하지만, 이 몸이 어디 가서 무시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온 진심을 담아 긍정해 주니, 그녀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          ◈          ◈

다사다난한 마법 수련이 끝나고, 발락의 수련까지 끝마쳤다.

어쩐지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폭성의 묘리는 압축과 폭발.

별의 폭발이란 무릇 거대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 가히 일격필살의 기술이라 봐도 무방했다.

‘내가 조급하긴 한가 보군.’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정말 조급했다.

마르크스라는 강적과의 싸움을 앞둔 지금, 폭성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내가 하루빨리 강해져야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더 많은 경우의 수를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법을 등한시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먼저 마법을 가르쳐 달라 해 놓고 이게 무슨 실례냐.’

고된 수련에 지친 몸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내 나름대로 반성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마나의 순환을 도왔다.

명상을 보조해 주는 능력이 깃들었다더니, 이런 효과인 모양이었다.

“후우…….”

숨을 깊이 내쉬곤 다시 들이마셨다.

‘조급해하지 말자.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신안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남대륙을 넘어 북대륙까지 라플라스의 날조된 추문이 퍼져 나갔다.

이토록 단시간에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은 필시 마르크스가 입김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리라.

라플라스를 향한 외부의 시선이 어떠한지 확인할수록.

죄 어둠에 잠긴 마르크스의 광경을 살펴볼수록.

자꾸만 알게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라플라스는 나, ‘호르’를 믿고 의지하고자 노력하는 중이니까.

귀족들은 백성들에게 믿음을 촉구하고, 백성들은 호르에게 희망을 갈구했다.

새삼 무거운 압박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마왕, 네놈에겐 한낱 유흥에 지나지 않겠지.’

놈은 그저 내 흉내를 내며 종교 놀이를 즐길 뿐이다.

이따위 되도 않는 헛수작은 나를 도발하기 위한 악취미에 불과했다.

그딴 것에 일일이 휘둘려서는 될 것도 안 되는 법.

난 신도들의 믿음에 보답할 필요가 있었고, 이 압박감을 이겨 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중심을 지키자. 내가 흔들려서야 쓰나.’

이단과의 전쟁.

코앞에 다가온 폭풍전야를 덤덤히 맞이했다.

◈          ◈          ◈

칼고스가 눈을 감은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법 평온해 보이는 아비의 얼굴은,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마왕을 속으로 욕하고 있을까. 자신들을 창조한 것을 또다시 후회하고 있을까.

그래, 그렇겠지. 뻔하다.

칼고스가 버릇처럼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한데 눈은 음울하기만 했다.

[네가 아버지라 부르던 존재가 호르였을 줄이야.]

그때, 뒤편에서 알버트의 음성이 들렸다.

칼고스가 아비의 속마음을 궁금해하듯이, 알버트는 칼고스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저 눈은, 원수를 보는 눈빛이라기엔 날이 죽어 있었다.

그렇다고 흠모하는 이를 보는 눈이라기엔 어딘가 크게 비틀려 있었다.

애증.

칼고스의 눈은 애증을 담았다.

[설마설마했건만…….]

유일신, 호르.

다른 말로는 만물의 아버지.

알버트는 언제나 제 생각을 부인해 왔었다.

아니, 천 년 전의 동료들도 모두 그러했다.

호르께서 칼고스와 같은 ‘악’을 만들 이유가 없다 믿었으니까.

악은, 호르가 만들지 않았기에 악인 것이라고 치부하며 살아왔었다.

『그걸 이제 알았냐, 이 멍청아.』

『아버지께서 괜한 말을 하신 게 아니지.』

『네놈은 항상 눈치가 느리군.』

칼고스가 알버트를 돌아보았다.

제 아비가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면서도, 거인은 웃지 않았다.

어찌보면 처음으로 거인의 무표정을 본 것 같았다.

[……그렇군.]

감히 신과의 대화에 훼방을 놓은 장본인이었지만, 용사는 거인에게 연민을 품었다.

[버림받은 아이만큼 가여운 것도 없지.]

[빛에서 어둠이 났으니 너희들은 보살핌받지 못한 것이구나.]

아버지! 아버지이이!!

성마대전의 전장은, 언제나 그들의 음성이 들끓었다.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질투, 사무치는 그리움은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날 때부터 악한 존재들.

그래서 그들은 그때부터 버림받았나 보다.

분노의 화신이어서 내뱉는 줄로만 알았던 그 외침은, 버림받은 자의 통곡일 뿐이었다.

[총애를 원했던 건가?]

[관심이 절실했던 것이냐?]

알버트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시선에, 거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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