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Episode. 45 빛을 빛으로 보고자 하는 이들아 (2)
봄처럼 화사했다.
온 땅에 겨울의 시린 마기가 끼었는데, 라플라스에는 싱그러움이 사무쳤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서, 꼭 별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뛰어난 대마도사도, 성군이라 칭송받는 왕도, 한순간에 봄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하물며 만인의 가슴에 봄날을 안겨다 주는 것은 더더욱.
그래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기적이라 칭송한다.
“참으로 따스하구나.”
광장의 한복판.
빛을 뿜어내는 석판은 마치 모닥불 같았다.
모두가 석판을 바라보았다.
하나 감히 손대지 못하고 눈과 몸으로만 열기를 탐했다.
왕도를 내려다보는 왕의 눈에 백성들의 면면이 담겼다.
따스했다.
조금 전만 해도 추위에 떨던 이들이 따스함에 기대어 몸을 녹이고 있었다.
왕의 마음에 봄이 다가왔다.
어쩌면 왕도 그동안 추웠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라플라스 전역에서 모여든 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
◈ ◈ ◈
온몸에 공허함이 몰려왔다.
심장 반쪽이 뭉텅이로 떨어진 기분이라 해야 할까.
라플라스 왕국을 신앙으로 죄 덮는다는 것은, 내게도 큰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순간에 이렇게나 많은 힘을 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흐윽…….
잇새로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겨우 붙들었다.
그따위 요상한 소리를 내기엔 자리가 좋지 못했다.
“리하르트. 왜 그러느냐?”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알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수를 닮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기가 허해 보이는구나.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더냐.”
흐으음-, 하고 그녀가 재차 비음을 흘렸다.
움찔거리는 미간은 그녀의 내적 갈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설마 라플라스의 눈을 발동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죠?”
“……아픈 걸 참으면 독이 된단다. 혹시 아느냐, 네가 큰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것이니. 거듭 말하지만 내 눈은 정확하다.”
“아뇨. 저 멀쩡합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죠.”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 영혼은 반쪽이 되었을 것이다.
라플라스의 눈에 그 모습이 비춰지면 곤란했다.
‘내가 호르다- 라고 자백하는 꼴이지.’
사실 알리사가 아예 눈치채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내 영혼을 본 적이 있으니, 나와 호르의 연관성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완고하게 그녀의 선심을 거부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깊이 알려고 하지 마라.
보아도 못 본 척하고, 눈치채도 모른 척하라.
나는 내 정체를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이 없다.
나는 그러한 뜻을 담아 말했다.
“음. 내 관심이 지나쳤나 보구나.”
현명하신 마법 스승께선 흔쾌히 물러나 주셨다.
그럼에도 그 말간 눈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속이 도통 안 보이는데, 그녀만 내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이거 완전 반칙 아닌가.
‘제 속마음이 보인다면 영약이나 하나 내려 주십쇼.’
영약. 영약. 영약. 영약.
열과 성을 다해 영약을 부르짖었다.
“고된 수련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지. 영약을 줄 테니 밤마다 달여 먹거라.”
……극에 달한 통찰력이란 이토록 무서웠다.
“허허,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특제품으로 주셨으면 좋겠군요.”
“와! 이미 용의 심장까지 섭취한 주제에 욕심 하나는 일품이구나.”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너처럼 마나가 넘쳐나는 이들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용의 심장을 섭취했거나, 사특한 금술을 부렸거나. 네가 후자일리는 없지 않겠느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알리사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찻잔이 큰 건지, 얼굴이 작은건지.
그녀가 찻잔을 기울일 때면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지곤 했다.
“리하르트.”
“예.”
“오전의 연설에서 밝혔듯이, 라플라스는 교국(敎國)이 되었다. 네가 거하던 바렌 왕국에 이어 두 번째 신성 국가라고 불리겠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국(敎國).
말은 그러했으나 실상은 이제 막 신앙심에 눈을 뜬 신자들 뿐이었다.
바렌이 한 층 한 층 쌓아 올라가는 석탑이라면, 라플라스는 땅 밑에서부터 끄집어 올리는 탑과 같았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는 없었다.
이 또한 제법 색다른 횃불을 피우게 될 것이니.
“각 영지의 영주들도 자세를 달리 하였다. 마르크스를 두려워하던 이들이 이제는 어둠을 두려워하더구나. 진정 빛을 보고 나서야 마르크스의 괴의함이 와닿은 것이겠지.”
알리사가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이데올로기. 그래, 네가 우리에게 제시해 준 것은 이데올로기란다. 우리의 적은 마르크스가 아닌, 어둠을 신봉하는 ‘이단’이라고. 빛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자고.”
“그렇지요. 이제 타국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합니다.”
“알고 있단다. 쉽진 않겠으나 포기할 순 없지.”
그래서.
갑자기 왜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애당초 연설을 끝내고 나를 곧장 자신의 방으로 끌고 온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리하르트,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단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 싸움의 끝엔 평화가 있느냐. 우리가 마르크스를 저지한 뒤에 말이다.”
이번에는 내가 차를 홀짝였다.
생각보다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아서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알리사는 내가 입맛을 가다듬을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만사태평한 세상은 없을 겁니다.”
난 다시 한번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신기하게도 이번엔 달았다.
그만큼 내가 내뱉은 말이 풍미 하나 없이 쓰기만 했다는 뜻이리라.
“그런가. 그 뒤에도 평화는 없는 게냐.”
알리사의 음성은 덤덤했다.
그러나 덤덤하다고 하여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평화를 모르나 평화를 갈구하는 여자.
나는 이 여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승님. 진정한 평화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모른단다. 십수 년을 고민해 보아도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누구도 아프지 않은 것. 배고프지 않은 것. 불안하지 않은 것. 슬프지 않은 것. 최소한, 불행하지 않은 세상을 평화라 생각한다.”
“그 또한 평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래. 그런 세상이 있다면 틀림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한데 그런 세상이 대체 어디 있을까.
그딴 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평화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처음으로 알리사의 눈이 흐릿함을 띠었다.
극에 달한 통찰력도 평화라는 난제 앞에선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없는 답을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스승님.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세상이란 없습니다.”
입을 열어 내 생각을 밝혔다.
“누군가가 불행하기에 누군가가 행복을 얻습니다. 그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면, 모든 사람이 불행하겠지요. 아무도 행복을 느낄 수 없으니까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성취욕도, 향상심도 모조리 거세당할 뿐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밟아야만 얻을 행복이라면 없는게 낫지 않겠느냐.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는 너처럼 재능을 부여받고, 또 누구는 그렇지 못한 세상이다. 비단 재능뿐만 아니라 배경도 그렇지. 그럼 운이 없는 자는 스러질때까지 불행해야 한단 말이더냐.”
하여튼간에 이놈의 공산주의 집안.
아니. 알리사는 양반이다.
앨런, 그 미친놈은 한 술 더 떠서 모든 권력자를 죽여 버리겠다는 꿈을 세웠었으니.
“그래서 라플라스의 왕이 되셨습니까?”
“…….”
“그렇게 생각하셔서 두 눈을 잃으면서까지 라플라스를 독립시키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하시고, 곳간을 무리하게 개방하신 겁니까?”
본래 라플라스는 마르크스로부터 착취 아닌 착취를 당해 왔다.
그 국력의 모든 것은 대부분 마르크스를 위해 존재했다.
철저히 마르크스를 위해 건국 된 나라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악연을 끊어 낸 것이 바로 알리사였다.
“백성들은 행복에 젖었겠지요. 국왕 전하를 연호했을 겁니다. 저라도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렇기에 스승님께선 이 나라에 평화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전지의 눈으로도 제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나 보지.
“그 평화 아래엔 스승님의 희생이 깔려 있지요. 지금은 그 희생이 무색하게 전쟁을 앞두고 있고요.”
알리사의 평화는 깨졌다.
라플라스의 평화도 함께 깨졌다.
이렇게 쉬이 산산조각 나 버릴, 유리 같은 평화가 진정한 것일까.
“그럼.”
알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쥐어짜내는 듯한 음성이 뒤를 따랐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라면 앨런의 주장도 틀렸구나. 그 아이의 뜻은 자르고 잘라 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니.”
“한참 엇나간 답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물으마. 너는 평화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세상 모두가 호르를 믿으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냐? 분명 그 빛이라면 타인의 불행을 거름 삼을 필요는 없을 터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알리사는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웃었다.
“아니요. 신은 평화를 안겨다 주지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나한테 그런 대단한 능력은 없거든.
“뭐라?”
“평화는 저희가 직접 쟁취하는 겁니다. 싸워 이겨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끝내 저희의 손으로 쟁취하는 것이 곧 평화입니다.”
리오 성의 사나이들.
그들은 수없이 싸웠다. 숱하게 동료를 잃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했을 때, 함성을 내질렀다.
성을 지켰고,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과 신념을 지켰다.
그리하여 바렌 왕국은 오늘도 건재했다.
그게 평화를 쟁취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호르는 거들어 주실 뿐입니다.”
오늘날의 알리사는 웅크린 잠룡이다.
힘이 있어도 쉬이 휘두르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세상은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에 파묻혀 자신의 우위를 다루는 데에 거부감을 느낀다.
어쩌다 그녀가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잠룡이 다시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옛 시절.
오직 승리만을 탐하던, 마르크스의 전무후무한 마녀로.
“싸움이 시작되면, 전력으로 욕심 내셔야 합니다. 전력으로 힘을 휘두르셔야 합니다. 호르께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다.”
“…….”
그녀는 머리를 떨었다.
아마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 ◈ ◈
기나긴 얘기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내린 후 내 방에 처음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과는 방 안의 풍경이 사뭇 달랐다.
아니, 딱 한 가지가 지나치게 달라진 채였다.
“뭐야. 이건 또.”
혹시 몰라 세계수의 줄기로 꽁꽁 묶어놓은 ‘악연’이 허공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칼고스, 이놈이 또 뭔 짓을 하려고!”
당장에 한 자루의 별을 엮어내곤 ‘악연’과 대치했다.
그때였다.
[하, 하나만 여쭙겠사옵니다…….]
[혹시…… 당신은 호르십니까……!]
용사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