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Episode. 46 드라우프니르 (4)
그날 저녁의 광경은 제법 특별했다.
호화로운 만찬과 값비싼 술들.
왕실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파이란까지 자리했다.
“귀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국에 손님이 찾아왔다.”
알리사의 말에 그들이 발락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계심이 뚝뚝 묻어나면서도 아주 좁쌀만큼은 그를 반기는 눈초리였다.
그 모습에 발락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남대륙에서 이런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마법사들에겐 바텐베르크 다음 가는 숙적인 발락이 아니던가.
이 정도의 대접을 받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린 그대를 리하르트의 검술 스승으로서 대우할 생각이오.”
“호오, 어째서지?”
알리사가 와인 잔을 빙그르 돌렸다.
그 안에 담긴 포도주가 쏟아질 듯 찰랑거렸다.
“위태롭거든, 자국의 상황이. 솔직히 말하자면 늙은 호랑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시국이라오.”
그 말에 몇몇 마법사들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발락에게 어려움을 토로하려는 알리사를 만류하고 싶은 듯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대한 적의 눈 밖에 났고, 손발이 묶이듯 고립되었소. 이대로는 답이 없는 상황이지.”
“남대륙 내에 분쟁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럴 예정이라오.”
“마르크스가 건재한데 대체 어떤 국가가…….”
설마.
발락의 표정이 굳었다.
“맞소. 자국의 적은 마르크스요.”
뒤이어 알리사가 여태까지의 일을 간략히 축약해 설명해 주었다.
모든 정황을 들은 발락이 돌연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따르는구나.”
“바늘 가는 데 실이 안 따라오겠습니까?”
“이 사태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를 꾸짖는 그의 음성이 더없이 딱딱했다.
흠. 가볍게 여긴 적은 없는데.
발락은 그 이후로 식사 내내 술만 들이켰다.
그 단호한 태도로 보건대,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라플라스의 형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 ◈ ◈
“일단 이 스승이 늦게 찾아온 것에 사과를 하고 싶구나.”
식사가 끝나고, 나는 발락과 따로 시간을 가졌다.
진지한 어조로 미안함을 표명하는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께서 바쁘신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리오 성에 남겨 둔 쪽지도 반쯤은 장난이었죠.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이해해 준다니 고맙구나.”
점잖게 말하는 발락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 같았으면 네놈이 너무 빨리 성장해서 그런 것이라느니, 사내놈이 그런 것으로 삐지지 말라느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을 텐데.
예상외의 반응에 내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스승님께서 아무리 만류하셔도, 저는 마법을 배울 겁니다. 검술 수련에도 차질이 없도록 노력 할 테니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알겠다.”
뭐야.
왜 이러는 건데.
내가 상정했던 최대 난제가 너무도 쉽게 해결되었다.
발락의 얼굴엔 체념과 자그마한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난 저런 표정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루드비히 바텐베르크…….’
가주에게 호르교를 이야기했을 때.
그때 가주가 지어 보였던 표정과 흡사했다.
“리하르트. 네 선택을 존중하겠다. 아무리 스승이라 해도, 제자의 한계를 가늠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란 걸 깨달았다.”
“……?”
“하지만 그것을 떠나, 마르크스와 전쟁을 벌이는 건 시기상조다.”
어째서 침몰하는 배에 탑승한 게냐.
그는 그렇게 물었다.
“마르크스가 전쟁을 준비한다면, 바텐베르크 또한 가만히 있지 않는다. 네가 마르크스와 싸울 자리는 이곳이 아니란 말이다. 라플라스는 놈들에 의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불길이 초목을 죄 태우기 전에 진화하는 것이 최선 아니겠습니까.”
“산의 주인이 산을 태우는 것인데, 어찌 외부인이 막으려 하느냐. 놈이 일으킨 불꽃이 너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그때 나서는 것이 옳다.”
아니다.
한 가지, 발락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불꽃이 얼마나 지독스러운지, 또 얼마나 몸집을 부풀리게 될지를.
남 일 대하듯 방관하다가 온 세상이 화마(火魔)에 집어삼켜지고 나서야 후회할 심산이란 말인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 네 마법 스승만이라도 데리고 바렌 왕국으로 가자꾸나. 놈들이 전쟁을 바란다면, 우리 또한 전쟁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더 대륙 간의 골이 깊어져야만 합니까.”
“네가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분쟁을 조장하고 있는 게다. 너는 바텐베르크의 혈통이 아니더냐. 라플라스를 돕는 와중에 네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시, 바텐베르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때는 정말 둘 중 하나가 몰락해야만 전쟁이 끝날 게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만일 제가 죽는다면. 그래서 바텐베르크가 움직이려 한다면.”
내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땐, 찬란히 빛나는 별 한 자루가 떠오른 채였다.
그 형체는 마치 호르교의 징표와 닮아 있었다.
“스승님께서 막아 주십시오. 호르교의 성자,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는 이단과 싸우다 전사한 것이라고. 기사와 마법사들이 써 내려온 피의 역사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고.”
“……뭣이?”
“호르를 섬기지 않는 바텐베르크는 저를 위한 복수를 천명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 적은 어디까지나 이단이었을 뿐이니.”
기사와 마법사 간의 우열을 다투는, 그따위 어처구니없는 이유의 전쟁은 더 이상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진짜 적이 누군지, 진짜 경계해야 할 세력이 누군지.
북대륙과 남대륙은 알아야 했다.
나는 라플라스와 마르크스의 싸움을 계몽의 시발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 ◈ ◈
발락은 연신 입을 씰룩였다.
고집불통 제자가 썩히는 속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후…….”
채 삼키지 못한 한숨이 주름진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런 발락을 향해 리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이 못난 리하르트가 스승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라플라스를 침몰해 가는 배라고 칭하셨지요.”
신성이 일렁이는 눈동자.
“함께 타시죠. 이 배에.”
리하르트의 시선이 발락의 가슴팍을 향했다.
어째선지 발락은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일평생을 무소속으로 살아온 그의 가슴엔 그 어떤 상징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마치 그 공백을 채워 주고 싶다는 듯, 제자의 눈빛엔 탐욕이 어려 있었다.
“일전에도 거절했을 터인데. 신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나는 나대로 살아간다고.”
“신을 믿는다 하여 스승님의 존재가 뒤바뀌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발락은 한사코 거절했다.
무소속.
그것이 여지껏 발락이 걸어왔던 길, 그 자체였다.
이제와 다른 집단에 소속될 이유는 하등 없었다.
“흠, 그렇습니까. 마음이 바뀌게 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리하르트는 입맛을 다시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에도 얼굴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언젠가는 당신도 믿게 될 것이라고.
“쯧.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발락이 화제를 돌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을 뒤덮은 마기는 별 하나 보여 주지 않은 채, 꽁꽁 숨겨 놓기 바빴다.
그에 짤막한 아쉬움을 토로한 발락이 품을 뒤적였다.
“옛다. 선물이다.”
그의 손에 끌려 나온 것은 팔찌였다.
금색의 테두리를 사슬이 칭칭 휘감은 장신구.
“이게 뭡니까?”
“내가 일전에 이야기했던 드워프를 기억하느냐?”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코어를 제작할 수 있다던, 발락의 몇 없는 친우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녀석의 작품이다. 검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아티팩트라더구나.”
이름은 ‘드라우프니르’.
어서 착용해 보라는 발락의 성화에 리하르트가 팔찌를 차 보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티팩트라고 하니, 마나를 불어넣으면 발동하는 건가.’
신성력이 몸을 타고 순환했다.
그러다 손목에 채인 드라우프니르를 향해 질주했다.
촤르륵-!
금색의 테를 휘감은 사슬이 거칠게 요동쳤다.
실타래가 풀리듯, 사슬의 끄트머리가 팔찌에서 벗어났다.
이내 눈덩이처럼 두터워진, 총 여덟 가닥의 쇠사슬이 리하르트의 주변에서 꿈틀거렸다.
“오!”
검성이 별이 아니라 쇠사슬이었다면 이러할까.
차르륵-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사슬들은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흐음.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구나.”
발락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친김에 네 자루의 별까지 뽑아든 리하르트의 모습이 꽤나 흡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흡족함을 느끼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리하르트였다.
‘이건 생각하지도 못한 이득인데?’
이런 아티팩트는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을 물건이란 뜻이었다.
무릇 변화에는 원인이 있는 법.
리하르트의 시선이 절로 발락을 향했다.
“저를 위해 이런 선물을 준비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흥, 그 난쟁이 놈이 멋대로 만든 것뿐이다. 난 쓸모가 없으니 네게 준 것이고.”
고개를 홱 돌리는 스승의 모습에 제자가 피식 웃었다.
팔찌에 떡하니 ‘리하르트’라는 각인이 새겨져 있건만.
◈ ◈ ◈
나흘이 지났다.
리하르트의 하루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먼저 네 마법 스승으로부터 합격점이나 받거라. 검성의 비기는 그 이후에 가르쳐 줄 테니.”
리하르트가 이미 마법 수련을 시작한 마당에 다른 수련을 시작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은 2써클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백 번의 마법을 쏟아낼 때였다.
왕성의 하늘에 수많은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삐이이익-
그것들 전부 ‘우는 새’였다.
그리고 그 위엔 익숙한 장식을 매달은 마법사들이 앉아 있었다.
“마르크스다!”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순식간에 공기가 뒤바뀌었다.
왕성의 모든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치켜들곤 결계를 펼쳤다.
사방에서 활활 끓어오르는 마력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모두가 상공의 적을 노려보는 와중, 두 청년이 앞으로 걸어갔다.
리하르트와 앨런이었다.
“멈추십시오! 위험합니다!”
두 사람은 마법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결계를 해제해 달라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 황당한 요청에, 정작 고개를 끄덕인 건 라플라스의 왕이었다.
“저들은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구나.”
츠즈즉-
결국 결계가 걷어지고, 오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왕성 앞에 내려섰다.
저마다 로브를 깊이 눌러쓴 마법사들.
그 속을 자세히 바라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로안.”
검은 반점이 육신의 절반을 집어삼킨, 끔찍한 모습.
제 부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앨런의 음성이 깊게 가라앉았다.
“애, 앨런 도련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선두에 서 있던 로안이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