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Episode. 46 드라우프니르 (2)
중급의 신격 중 한 줌의 격을 꺼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법사들의 경악을 이끌어 내기엔 충분했다.
신격을 목도한 그들의 입에서 끙-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알리사와 파이란만이 전부였다.
다른 마법사들은 절로 숙여지려는 머리를 억지로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외부인에게 복종의 자세를 취할 수 없다는 귀족들의 심정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을 강제로 찍어 누를 생각은 없었다.
그래봤자 일시적인 굴복.
그딴 것은 한낱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말없이 신격을 갈무리하자, 그제야 마법사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황망한 눈빛이 온통 내게 쏠렸다.
“저는 유일신, 호르를 모시는 북쪽의 성자입니다. 여러분이 느낀 기운은 호르의 힘입니다.”
덤덤하게 장내를 훑어보았다.
눈이 마주친 이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치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경외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격을 꺼내든 보람이 있었다.
마법사란 본디 진리의 탐구자라고 불리는 만큼, 그 어떤 것보다도 진리에 가까운 내 힘은 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조금 전, 앨런이…… 남쪽의 성자가 말했듯, 역병 전쟁에 참가했던 마법 연합이라면 회유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귀가 활짝 열린 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과거사도 덧붙였다.
리오 성에서부터 퍼진 호르의 불씨, 그리고 마침내 교국이 된 바렌 왕국.
“마법 연합은 바렌 왕국과 함께 어둠을 무찔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호르께서 그들을 도우셨지요.”
비록 신도는 되지 않았을지언정, 마법 연합의 일원들도 신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단의 싹을 틔웠던 놈들은 이미 이단심판관이 죄 불태웠을 테니까.
“앨런 도련님. 공자님의 말씀이 전부 사실입니까?”
파이란의 물음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곳곳에서 놀람 가득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란 것도 있었으니, 평생 신을 모르고 살던 그들에게 내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불신보다는 충격에 가까운 얼굴들.
그들이 온전히 나를 믿게 되려면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또, 얼마나 절박해져야 할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기엔 시간이 없다.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어.’
어디선가 역한 기운이 내 뒷골을 찌르르 울려 댔다.
내가 신격을 꺼낸 것을 느낀 바펠이 행동을 시작한 것일 터다.
나는 알리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잘못된 것을 섬기는 자를 막아 내기 위해선, 그 대적자인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을 섬겨야만 합니다. 하지만 당장 그분을 믿기엔 힘들겠지요.”
알리사는 말이 없었다.
그저 깊이 가라앉은 눈을 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호르께선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경고하셨습니다. 하여, 저는 여러분께 먼저 호르의 가호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바렌과는 엄연히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는 당사자들로부터 받은 신앙으로 믿음을 꾀했다면, 지금은 내가 선뜻 나서서 힘을 베풀어 줄 생각이었다.
“가호라 함은……?”
조심스런 파이란의 물음에, 나는 두 손을 모았다.
호르시여-,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내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회의장을 가득 채웠던 그것은 이내 각 마법사들의 지팡이에 들러붙었다.
“마갑병이나 결계를 비롯해, 전쟁 대비에 필요한 모든 곳에 빛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실로 파격적인 제안.
하나하나가 걸출한 마법사인 그들이라면, 내 빛의 효용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챘을 것이다.
그때였다.
“리하르트 공자를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웬 젊은 마법사 하나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나를 바라보는 눈엔 경계심이 한가득이었다.
“공자께선 북대륙의 지배 가문, 바텐베르크의 혈통이시지 않으십니까? 지금 공자의 행동은 적대 가문인 마르크스와 남대륙 간의 불화를 촉진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존 도미티안.
제법 그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천재였다.
존의 당돌한 발언에 다른 마법사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아닌 척하면서도 내심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이렇게 되나.’
바텐베르크의 혈통이라는 출생에 발목을 붙잡았다.
아무리 앨런의 친구라고 해도, 내가 바텐베르크인 이상 진정으로 신뢰하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누님께서 본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시면서도……!”
앨런이 분노 어린 음색으로 으르렁거렸다.
난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그리곤 존을 비롯한 마법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건 여러분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러분마저 이 사태를 마르크스와 그 적대 세력의 대립으로 보시는데, 제삼자들이 라플라스를 보는 시선은 어떻겠습니까?”
필시 골리앗에게 덤비는 다윗처럼, 그저 마르크스를 향해 반기를 드는 것으로만 여길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전제부터 모조리 틀려먹은 것이다.
이 나라를 향한 외부의 시선에 반란따위의 인식이 따라서는 곤란했다.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 여러분은 그것을 확실하게 규정한 뒤에 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라플라스와 마르크스의 전면적인 전쟁은 성립할 수 없다.
다른 세력을 끌어모으는 것은 필수에 가까운 일.
그러기 위해선 확실한 명분이 반드시 필요했다.
“호르교가 재앙의 씨앗을 막고자 한다. 라플라스가 대륙에 알려야 할 외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을 도와줄 동료들을 모으려면 정의를 표명해야 함이 옳았다.
그런 이념이 전장에 확고히 깔리게 된다면, 그때부턴 신성 왕국 바렌의 지원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호르교와 이단의 싸움일 테니까.
“으음…….”
마법사들은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구나.”
그때, 잠자코 있던 알리사가 회의의 끝을 선언했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녀의 시선은 속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 ◈ ◈
“혹시 마음이 상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마.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부디 양해해 주길 바란다.”
다음 날, 호숫가에 도착한 내게 알리사가 대뜸 말했다.
전쟁을 막으려는 내 진심을 곡해한 것을 대신 사과하겠다며.
“아, 괜찮습니다. 사실 타당한 말이었죠.”
나는 손사래를 쳤다.
물론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내가 피 같은 신앙까지 선뜻 나눠 주겠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러나 바렌의 경우엔 더 심하지 않았는가.
트란티스 후작이 열과 성을 다해 내 뒷담화를 하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원래 선구자들은 처음엔 욕을 먹는 법이죠.”
아무렇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자, 알리사가 픽 웃었다.
“나는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단다.”
“스승님을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있겠습니까.”
“……호르교나 막내가 성자라는 말이 놀랍기야 하지만은, 그것이 아버지의 상태보다도 충격적이겠느냐.”
착잡한 어조로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표정을 굳히곤 말을 이었다.
“내가 너와 막내를 두둔하지 않은 건, 이 몸이 라플라스의 국왕이기 때문이란다. 종교를 받아들이란 주문은 나 또한 쉬이 고개를 끄덕이기 힘든 일이지.”
바렌과 같은 이유.
한 국가의 지도자인 이상, 무엇이든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은 수련이나 시작할까.”
고개를 털어 분위기를 환기시킨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키잉, 키잉-
심장의 고리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리며, 주변의 마나가 요동쳤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마법들이 생겨나 호수 위를 점령했다.
몇 번을 봐도 혀가 절로 내둘러지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1써클 마법이라지만,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캐스팅은 그렇다 쳐도, 저 매끄러운 마법의 궤도들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까마득한 경지의 기예를 보고 있노라니 전의가 불타올랐다.
그렇게 한참 마법을 쏘아 보내며 악전고투를 거듭할 때였다.
욱씬.
손등의 성흔에서 통증이 일었다.
“아.”
벌써 이 근방까지 당도한 건가.
고개를 치켜들곤 기감을 넓게 펼쳤다.
저 하늘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위협적인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혹시 아는 자더냐?”
알리사 또한 누군가의 접근을 느꼈는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예, 뭐…….”
“흠, 껄끄러워 보이는 구나.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왕도에 결계를 펼쳐 막을 수 있단다.”
“아뇨. 괜찮습니다.”
감히 제 앞을 막는 결계를 보고 순순히 돌아갈 발락이 아니다.
가뜩이나 긴장이 흐르는 라플라스가 어떤 반응을 취할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접근을 알아챈 왕성에서 부산스러운 기척들이 이어졌다.
“스승님. 우선 마법사들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타이밍은 그리 좋지 못한 것 같지만, 어찌됐든 발락은 아군으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나는 거칠게 회전하던 고리를 흐트러트리며 숨을 골랐다.
◈ ◈ ◈
“리하르트, 이눔아! 스승이 왔다!”
며칠 밤낮을 허공에서 지새우며 날아가기를 한참.
발락은 드디어 제 하나뿐인 제자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한데, 그 바라마지 않던 재회를 웬 마법사들이 방해하려 들었다.
들끓는 마력이 당장에라도 발락에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감히!”
대번에 여섯 자루의 별을 뽑아든 그가 노호성을 터트리려 할 때였다.
“진정하시지요, 스승님.”
리하르트가 하얗게 빛나는 별을 타고선, 발락을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여섯 자루 째의 별을 얻을 때쯤에서야 느즈막히 찾아오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스승을 비꼬는 그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발락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변명이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네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한 걸 이 스승 보고 어찌하란 말이냐!’
원래는 네 자루의 별을 다루게 되면 다시 만나기로 약조했었다.
발락은 대략 1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제자 놈이 어느날 단번에 네 자루의 별을 얻어내고 말았다.
‘필시 강대한 적을 상대했던 것이겠지.’
떨어져 나갈듯 욱신거리던 성흔이 어찌나 야단법석이던지.
발락은 역경 속에서 크게 성장한 리하르트가 어여뻤다.
자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노라 광소를 터트렸었다.
하지만.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던 그는 제자와의 만남을 미루게 되었고, 끝내 지금의 상황까지 오고야 말았다.
“제자야, 대체 남대륙의 왕국에서 무슨 스승을 찾겠다는 게냐? 나만 한 스승은 또 어디 있다는 게냐?”
“후…….”
리하르트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 끝엔 왕관을 쓴 여인이 서 있었다.
‘라플라스의 국왕?’
발락의 마음이 급해졌다.
말년에 겨우 찾아낸 보석을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빼앗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