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Episode. 44 호르가 보우하사(3)
- 우으……!
변화를 먼저 감지한 건 마왕의 찌꺼기였다.
흉물스런 뿔에 도드라진 눈알이 천지사방을 훑었다.
이내 그 시선이 알리사의 반지에 고정되었다.
상서로운 광채가 번져 나오는 반지.
“아…….”
알리사와 바펠의 귓가엔, 거룩한 종소리같은 환청이 들려왔다.
알리사가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라플라스의 눈이, 태양같은 존재를 비췄다.
밝게 빛나는, 거대한 십자가 형태의 영혼.
그 낯설지 않은 영혼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니펠 원로의 저주가……!’
떨리는 손끝으로 눈을 더듬었다.
저주로 인해 흉측히 일그러진 눈가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쿠궁, 쿠구궁-!
단지 빛이 방 안에 거한 것일 뿐일진대, 바펠의 결계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마왕의 찌꺼기에 이성을 잃은 바펠의 손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네년! 어둠을 품었구나! 지옥에 처박힐 년!”
그가 악독한 말을 쏟아냈다.
얼굴엔 혐오와 분노가 뒤엉킨 채였다.
“지독한 어둠이로다! 신이 두렵지 않은 게냐!”
몸도 마음도.
전부 검게 물든 이에게 빛은 오히려 독이다.
그의 눈에 저 신성은 그저 독살스러운 어둠에 불과했다.
“……아버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알리사는 입안이 썼다.
미쳐 버린 아버지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누가 어둠을 휘감고, 누가 빛을 휘감았는지.
사아아-
손을 타고 영혼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오는 빛.
저주로부터 해방된 알리사의 눈은 그 신성한 존재를 더욱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리하르트.’
반지를 끼워 준 것도 그였고, 이런 영혼을 갖고 있는 것도 그였다.
리하르트가 지금의 상황과 연관성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알리사가 그를 떠올릴 때였다.
『라플라스의 국왕이여.』
거룩한 음성이 알리사의 상념을 일깨웠다.
신비한 파동이 그녀로부터 뻗어나가, 바펠과 마왕의 찌꺼기를 압박했다.
마기를 듬뿍 먹은 바펠의 지팡이가 천천히 마모되어갔다.
- 호르으!!
찌꺼기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신성은 놈에게 그 어떤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똑똑히 보라.』
『저것이 잘못된 것을 섬기는 자의 작태이며.』
『세상을 종말로 이끌어 갈 재앙이노라.』
쿵쿵.
알리사의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마법진이 그려진 두 눈이 저절로 아버지에게 향했다.
추악하고 흉측한 모습.
『계시를 내리노니.』
『너는 그 눈으로 본 것을 잊지 말지어다.』
『네가 몸소 느낀 것을 외면하지 말지어다.』
그 말을 끝으로 빛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가락에 끼인 반지가 쨍 하고 깨졌다.
“크, 크흐……! 불쌍한 딸아. 어둠마저도 널 버렸나 보구나.”
이성을 상실한 바펠이 조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확히는 그 너머의, 잔뜩 일그러진 하늘을.
콰릉-!
하늘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 ◈
앨런은 가주의 방문 앞에서 누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까.
결계를 친 것인지, 귀를 기울여보아도 적막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누님, 괜찮으신 겁니까.’
알리사는 그가 유일하게 따르는 피붙이였다.
정신적 지주라고 칭해도 좋을 정도로, 앨런에겐 가장 가깝고 의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우려되었다.
바펠 마르크스가 이단이란 것을 앨런은 알고 있었으니까.
조바심이 들어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콰릉-!
성채 밖 하늘에서부터 묵직한 울음이 들려왔다.
“쯧, 뇌우인가.”
니펠이 혀를 차며 복도의 창 밖에 시선을 던졌다.
먹구름이 낀 하늘과 이따금 울음을 터트리는 번개줄기.
그러나 앨런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호르의……?’
거칠게 꿈틀거리는 먹구름에서 익숙한 기운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내 신성을 동반한 뇌우가 몸집을 부풀렸다.
『천벌(天罰).』
꽈르르릉-!
터질듯 부풀어오른 먹구름에서 새하얀 낙뢰 한 줄기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성채가 크게 몸을 떨었다.
처음엔 한 줄기.
그 다음엔 수십 줄기.
쾅, 콰아앙-!
낙뢰의 폭우가 성채를 휩쓰는 건 순식간이었다.
복도에 쩌적 금이 갔다.
유리창은 진작에 깨져 나갔다.
“니펠 원로시여! 지금 당장 결계를 펼쳐야 합니다!”
삽시간에 난장판이 된 혼란 속에서 정예 마법사들이 니펠을 부르짖었다.
이대로 가다간 성이 흔적도 없이 무너질 판이라고.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성 안의 모든 마법사들을 소집하라!”
니펠이 지팡이를 뽑아들곤 자리를 옮겼다.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마법사들을 제외하면, 바펠의 방 앞에 남은 것은 앨런뿐이었다.
그도 허리춤에서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물론, 다른 이들과 함께 결계를 펼칠 생각은 아니었다.
척-
방문을 향해 치켜든 지팡이 끝에서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고위 마법사들도 쉽사리 시전하지 못하는 7서클 마법.
그 강대한 이적이 눈 깜짝할 새에 발현되었다.
콰아아앙-!
파편이 비산했다.
문과 벽이 터져 나가는 굉음 사이로,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아버지나 누님의 결계가 이리 약할 리가 없지. 이미 강한 충격을 받아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무엇이 되었든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는 표정을 잔뜩 굳히곤 자욱한 흙먼지로 걸어 들어갔다.
이후 펼쳐진 광경은 앨런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을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애, 앨런……!”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힘겹게 서 있는 누이의 모습이란.
거칠게 요동치던 앨런의 눈동자가 금세 가라앉았다.
하나, 그 안에 담긴 분노는 더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님.”
“도망치거라, 어서! 내가 시간을 벌고 있을 터이니!”
절박함이 묻어나는 외침을 들으며, 앨런이 시선을 돌렸다.
악마 같은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정녕 인간이길 그만두신 겁니까, 아버지.”
“어서 오거라.”
바펠은 자애롭게 웃었다.
흉측하게 찢어진 입으로나마, 애정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네 누이를 보거라. 저 년은 어둠을 품은 악한 종자로다.”
“…….”
“자, 앨런. 이제야 좀 믿어 주겠느냐? 내가 섬기는 분은 저 악한 것들을 벌하는 위대하신 존재란다.”
“아버지.”
앨런이 한걸음 다가갔다.
그 순간만큼은 누이를 겁박한 자에 대한 분노도, 이단에 대한 적의도 없었다.
미쳐 버린 아버지를 마주한 아들의 참담한 심정만이 가슴을 괴롭혔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앨런은 비틀거리는 알리사를 부축하며 말을 이었다.
“하늘을 두려워하라고.”
그의 음성은 덤덤했다.
누이를 끌어안은 팔이 떨리는 것은, 오직 알리사만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을 두려워하라? 이깟 뇌우를 두려워하란 말이더냐? 우습기 짝이 없구나!”
“……그렇습니까.”
아비를 향한 눈빛이 싸늘해져 간다.
더 이상 아비를 보는 혈육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구대천의 원수, 혹은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자의 시선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론 저를 두려워하십시오.”
“……뭐라?”
“나는 신벌의 대행자이노니. 바펠 마르크스, 네놈은 내가 언젠가는 꼭 불태워 죽여 주마.”
바펠의 얼굴에 노기가 차올랐다.
“네 녀석도 벌써 악에 물든 것이더냐, 앨런-!!”
허공에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하나하나가 최상위급 위력인 고절한 마법이 앨런과 알리사를 향해 쏟아졌다.
콰아아앙-!
위태위태하던 성채의 일부가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도망친 건가.”
바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절한 분노.
그리고 비애.
우습게도 그는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누님!”
앨런이 다급히 누이를 살폈다.
긴장에 긴장을 거듭하던 알리사는 어느샌가 정신을 잃은 채였다.
뿌득, 이를 간 그는 저 멀리 성채를 눈에 담았다.
거의 반파되다시피 한 성.
“다음에 내가 다시 찾아왔을 땐,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리라.”
위대하고 위대한 마르크스 가문.
앨런의 적은 이제부터 그들이었다.
삐이익-
‘우는 새’가 형태를 갖췄다.
누이를 그 위에 단단히 고정시킨 그는 라플라스를 향해 날아갔다.
마나를 갈아 넣어 허공을 가로지는 와중에도, 그는 뒤틀린 속을 견디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누님이 이렇게 되는 순간까지도 나는……!’
뭐가 성자란 말인가.
뭐가 이단심판관이란 말인가.
대체 뭐가 천재 마법사란 말인가!
뒤틀려서 끊어져 버릴 것만 같은 심지는, 라플라스 왕국에 도착했을 때도 변함이 없었다.
“맙소사! 알리사 아가씨!”
‘멸옥의 마법사’라 불리던 파이란 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라플라스의 마법사들 전부가 눈을 부릅떴다.
그들 모두가 전(前) 마르크스 소속이었고, 모두가 알리사를 따르던 가신들이었다.
“누가…… 누가 이런 짓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어째서 아가씨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알리사는 다급히 이송되었다.
내로라하는 치유 마법사들이 힘을 쏟아붓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렇게 이틀이 더 흐르고 나서야, 마법사들은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아가씨께선 순조로이 회복 중이십니다. 어찌나 악랄한 공격을 받았는지, 모든 마나 루트가 뒤엉켜 있었습니다.”
파이란이 앨런에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도련님께서도 너무 심란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
대답 없는 앨런에게 파이란이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려 할 때였다.
“리하르트는 왜 안 보입니까?”
“아, 공자께선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앨런은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누이를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그가 향한 곳은 왕성 뒤뜰에 만들어진 인공 호수였다.
맑은 호숫가의 수면이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푸른 머리칼을 엉클었다.
그러나 앨런의 가슴속에선 거친 폭풍이 이는 중이었다.
- 죽여라. 죽여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전부 죽여라.
언젠가 들어 보았던 끔찍한 마성.
라플라스로 돌아올 때부터 다시금 들리던 마기의 목소리였다.
수면에 비친 앨런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우스운 꼴이구나. 아직도 마기를 이겨 내지 못하다니.’
그가 스스로를 보며 조소를 지었다.
남쪽의 성자라더니. 이단심판자라더니.
실상은 몸 깊은 곳에 마기를 숨긴 변절자에 가깝지 않은가.
사락.
바람결을 따라 나뭇잎 하나가 호수의 수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나뭇잎은 빛을 양껏 머금고 있었다.
“호르시여. 저를 보고 계신 겁니까?”
이전 같았으면 당장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환희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선 제가 스스로 깨닫길 기다려 주신 것이겠지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뭇잎을 향해 고개를 숙인 앨런이 지팡이를 꺼냈다.
“당신께서 부여해 주신 자격에 걸맞는 자가 되겠습니다. 부디 저를 지켜봐 주소서.”
화륵.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나뭇잎으로부터 빛을 흡수한, 하얗게 이글거리는 백염이었다.
불꽃이 지팡이를 집어삼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앨런의 팔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갔다.
“제 안의 모든 어둠을 불사르겠습니다. 제 자신이 백지가 아닌데, 그런 제가 어찌 이 세상을 백지로 만들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재계(齋戒)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