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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28화 (128/216)

128화. Episode. 41 명검 중의 명검 (3)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단다.”

앨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비를 바라보는 시선에 싸늘한 기운이 섞여 들어갔다.

“하하, 막내야. 이 아비를 너무 시기하지 말거라. 너에게도 이 은혜를 나눠줄 터이니.”

“……어떤 존재의 선택을 받으셨고, 어떤 은혜를 나눠주시겠단 겁니까.”

“아마 들으면 놀랄 게다. 혹,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도 곧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펠의 음성에 은근한 열기가 감돌았다.

눈에는 마치 그에게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고, 입은 흉한 미소가 맺혔다.

“아버지…….”

그런 아비의 모습은 앨런으로서도 낯설고 해괴하기만 했다.

남대륙을 호령하는 지배자의 위엄도.

진정한 대마도사 불리던 자의 현기와 지성도.

지금의 바펠에겐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었다.

“아들아…… 왜 내게 적개심을 보이느냐?”

앨런은 확신을 굳혔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기엔, 이 상황이 너무나 잔인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었다.

“대체 누구의 선택을 받았냐고 여쭸습니다.”

“그분은 감히 이름으로 정의내릴 분이 아니다. 그저, 세상을 능히 빛으로 뒤덮으실…… 하늘과도 같은 분이시다.”

지고의 존재.

앨런에게 지고의 존재라 함은, 오직 호르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앨런과 바펠은 같은 존재를 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빌어먹을.’

지독하리만치 꺼림칙한 기운이 바펠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에게도 그분의 은혜를 나눠주마. 못난 네 형들보다는 너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싶구나.”

다가오는 아버지의 손.

앨런이 거세게 뿌리쳤다.

가늘게 흔들리는 바펠의 눈을 직시하며, 앨런이 씹어 뱉듯 말했다.

“하늘을 두려워하십시오.”

“뭐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칠게 몸을 돌린 앨런이 가주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속이 울렁거린다.

찌르르-

가슴에 통증까지 일었다.

‘젠장!’

은혜를 나눠주겠다며 손을 뻗어오던 바펠의 모습이 생생했다.

전쟁을 일으키겠노라 말하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막아야 한다.”

바펠이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남대륙은 빛 한 줌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의 불모지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앨런에겐 사명이 있었다.

신벌의 대행자.

그 대상이 설령 아버지일지라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호르시여.”

침소로 돌아온 그가 무릎을 꿇었다.

꾹 감은 눈엔 비통함과 각오가 복잡하게 뒤엉킨 채였다.

“……제게 아버지를 막을 힘을 주십시오.”

간곡한 기도가 방 안을 울렸다.

◈          ◈          ◈

메리는 꿈을 꿨다.

그것은 어딘가의 전장이었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폭음과 비명.

기사들은 불거진 눈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핏물이 말라붙은 리하르트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연신 무어라 소리치는 템플나이츠의 안색도 결코 좋지 못했다.

그들의 적은 남대륙이었다.

길고 긴 싸움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아론과 리하르트의 곁에, 기드가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수많은 적을 베어 넘겼고, 더불어 수없이 많이 죽었다.

[투항하라! 이단의 길로 빠지지 마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녕 어둠에 모든 것을 내버릴 셈이냐!]

템플나이츠의 외침이 들렸다.

항복을 권유하는 그들에게 마법사들은 새까만 불꽃을 내던졌다.

분명 꿈일진대, 메리는 그 잔혹한 열기에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끄아악!]

기사 수십이 타 죽었다.

분노한 리하르트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런 그를 향해 마법사들이 폭격을 가했다.

리하르트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떴다.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은, 불길한 마기에 휩싸인 중년의 사내였다.

[마르크스으으-!!]

꾹꾹 억눌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의 음성.

리하르트의 절규를 끝으로, 메리가 눈을 떴다.

“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눈가를 훔쳤다.

소매 끝이 조금씩 젖어 들어갔다.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한 상태였다.

“또 이런 꿈을…….”

한낱 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만 같은 기분.

메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괜찮아. 저번에도 괜찮았잖아.”

그녀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창밖 너머의 하늘은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붉게 달아오르는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꿈속에서 수없이 흩뿌려지던 핏물이 떠올랐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협탁의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호르에 대한 찬양이 빼곡히 적힌, 메리의 보물.

그녀가 수첩의 빈 공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꿈의 내용을 적는 것이었다.

‘성자님께서 이상한 꿈을 꾸면 고하라 하셨지. 혹시라도 잊기 전에 적어 놓자.’

한데, 한참 발자취를 남기던 펜 촉이 일순 멈췄다.

[……어느 순간부터 기드 님은 꿈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즐겨 입으시던 흉갑은 아론 님이 착용하고 계셨다.]

적는 것조차 꺼려지는 내용.

그녀는 꾸역꾸역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록했다.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다.

“부디, 제가 꾼 것이 그저 꿈으로만 남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록이 끝난 후엔 아침 기도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구석엔 불안함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날 오후.

그녀는 일정대로 왕도의 전도사들과 함께 왕실 비고를 찾았다.

“허, 허어…… 몇 번을 봐도 아름다운 석판일세.”

“호르께서 내려 주신 것이지. 이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야.”

비고의 중앙에 고이 모셔진 석판을 둘러싸고, 전도사들은 입을 모아 감탄을 토했다.

하늘에서 빛과 함께 떨어진 석판.

거기에 적힌 율법의 내용을 필사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메리는 율법의 첫줄을 눈으로 쫓았다.

‘첫째. 너희는 호르 외에 다른 것을 섬기지 않는다.’

가슴이 콱 옥죄였다.

꿈속의 마법사들은 다른 것을 섬겼다.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추앙했고, 호르를 쉼 없이 욕보였다.

‘왜 자꾸만 불안하지.’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 때였다.

석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녀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무척 따스하고 부드러운 빛이었다.

◈          ◈          ◈

까앙-!

철이 노래를 불렀다.

그 아름다운 음색 사이로 후르큼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급한 일 있으면 냉큼 처리하고 오던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한눈팔지 마라.”

“……눈치는 빨라 갖곤.”

리하르트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후르큼의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닌지라, 그는 다시금 후르큼의 등에 손을 대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벌써 며칠이 흘렀던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이 뜨거운 대장간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보람도 있었다.

까앙!

빛이 담긴 망치질.

까앙-!

그에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가는 쇠.

웅혼한 철의 소리가 연신 울렸다.

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 접해 본 리하르트조차 넋을 빼놓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광경을 똑똑히 견문하고자 했다.

그것은 후르큼도 마찬가지였다.

꿈을 꾸듯 몽롱하면서도 무척이나 생생한 정신이 망치질을 재촉했다.

청록색 불꽃으로 쇠를 붉게 달굴 때는 가슴이 설레었다.

쇠는, 두 사내의 관심을 듬뿍 받으며 새로이 탄생하는 중이었다.

‘된다. 이건 분명히 된다. 엄청난 검이 탄생할 거야!’

망치질이 거듭될수록 확신이 들었다.

마치 쇠가 계속 망치질을 해 달라고 보채는 것만 같았다.

“내 생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쉿!”

후르큼과 리하르트의 주변으로 난쟁이들이 모여들었다.

기껏 간만에 잡은 망치도 내려놓은 채였다.

까아앙-!

소리가 한층 더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청록색 불꽃이 쇠를 머금을 땐, 그 몸집이 배는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          ◈          ◈

숨이 턱턱 막혔다.

호흡을 반복할 때마다 폐가 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애가 탔다.

거의 완성에 가까워져 가는 쇠.

벌써부터 엄청난 예기가 피부를 찔러 댔다.

선물을 앞둔 어린애처럼 가슴이 뛰었다.

“흐흐…… 아름답구나.”

후르큼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애틋한 눈으로 칼날을 바라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손을 놀리지 않았다.

일분이 한 시간 같고,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기를 한참.

“이제 검 자루를 만들 거다.”

후르큼이 마침내 마지막 작업에 착수했다.

칼날을 만들고 남은 쇳물과 여분의 세계수 가지가 검 자루의 재료였다.

“세계수를 장작으로만 쓰면 아깝지. 잘만 가공하면 틀림없이 좋은 재료가 될 거야. 내 영혼이 그리 외치고 있다!”

드워프의 손재주는 명불허전이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수십 갈래로 나눈 뒤, 심혈을 기울여 엮어 올렸다.

마치 나무가 칼날을 휘감은 듯한 모양새였다.

마지막으로 검 자루에 쇳물을 들이부었다.

가지에 빛을 잔뜩 먹여 두었던 터라 허무히 녹아내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검 자루가 쇳물을 모조리 흡수하며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꿀꺽.

침이 절로 삼켜졌다.

솜씨 좋은 명장이 경건하게 날을 벼렸다.

숫돌이 그 몸을 훔칠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것이 내게 이로운 기운일지, 해로운 기운일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돼, 됐다.”

후르큼이 중얼거렸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역병에 녹아 사라지고 말았던 ‘드래곤 투스’와 비슷한 크기의 검신.

그 새하얀 날에 오색의 빛깔이 반짝였다.

“흐흐, 선녀로구나. 선녀야!”

후르큼이 코밑을 훔쳤다.

고된 작업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으나, 그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활력이 넘쳤다.

“인간. 이 검의 이름은 그대가 짓는 게 나을 것 같군.”

“웬일이야? 드워프들은 이름을 짓는 것에 애착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정말 아쉽게도 내 머리로는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이름이라.

고민은 짧았다.

아직 이름을 정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았어.”

“음? 무슨 소리냐?”

나는 손을 뻗어 검 자루를 쥐었다.

드래곤 투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설렜다.

아론이 말하기를 이런 설렘을 두고 인연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래, 이 검은 내가 만든 인연이었다.

다만 인연이라고 하여 다 좋은 연(緣)인 것은 아니다.

알버트와 칼고스.

나와 연이 닿은 존재는 둘 중 누구일까.

검의 이름은 그것을 확인한 뒤에 지어도 늦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리 말하며 검에 신앙을 흘려보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왔다.

『끄, 끄흐흐-!』

『이것 참 안타깝게 되셨습니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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