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Episode. 40 율법(3)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던 석판은 이내, 국왕의 눈앞에서 멈췄다.
둥둥 떠 있는 석판에선 음각된 빛이 일렁거렸다.
“…….”
국왕은 입도 열지 못하고 눈만 부릅뜰 뿐이었다.
의미심장한 리하르트의 미소를 보고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렇게 하늘에서 석판이 떨어져 내리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 석판에선 범접할 수 없는 ‘격’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무릎이 굽혀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적을 목도한 이들 모두 석판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것은 왕성의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템플나이츠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건 대체 뭡니까?”
“앞으로 신자와 신도들이 지켜 줘야 할 것들.”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오는 아론에게 리하르트가 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템플나이츠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도 호르의 신도이기에, 하나같이 그 내용이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피식 웃은 리하르트는 연설대 쪽을 향해 턱짓했다.
때맞춰 국왕의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첫째, 너희는 호르 외에 틀린 것을 신으로 섬기지 않는다.”
석판의 음각을 따라 읽는 국왕의 몸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둘째, 너희 마음으로부터 눈 돌리지 말라.”
그는 계속해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마치 호르가 국왕의 입을 빌려 제 뜻을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성들의 자세가 더욱 낮춰졌다.
템플나이츠의 눈가엔 경건함이 일었다.
“무릇 집단에는 규칙이 필요하지. 본래의 목적에 엇나가지 않게 꽉 잡아 줄 규칙 말이야.”
리하르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중급 신격이 되어 얻은 권능, 율법(律法).
그가 부여한 호르교의 규칙은 이러했다.
=====================
1. 너희는 호르 외에 틀린 것을 섬기지 않는다.
2. 너희 마음으로부터 눈 돌리지 말라.
3. 너희 소망을 망령되게 내뱉지 말라. 그것은 호르를 욕보이는 것과 같다.
4. 법과 율법을 동일시하며 거룩하게 지켜라.
5. 호르는 선을 추구하는 신이기에 악한 마음에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는다. 남을 상처 입히고 네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감히 호르로 치장하지 마라.
6. 앉아서 기도하는 이보다 행동하며 기도하는 네가 더욱 옳다.
7. 탐욕과 소원을 혼동하지 말라.
8. 사회적 규범에 의거하여 너희 스스로 살펴라.
9. 악인은 호르에게 벌 받지 않기를 소망할지어다. 신벌에는 자비가 없다.
10. 삭막한 곳엔 호르가 거하지 않는다.
=====================
리하르트가 가장 신경 쓴 대목은 다름 아닌 다섯 번째 구절이었다.
선인을 가리는 것은 어려워도, 악인을 가리는 것은 쉽다.
그가 규정한 율법은 선과 악의 구분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이것으로도 완벽히 구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율법이란 죄를 죄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기능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북대륙에 율법을 전파했습니다.』
『율법의 성향이 선(善)에 가깝습니다.』
『회개하지 못한 악인의 기도는 죄업에 따라 당신께 닿기 힘들어집니다.』
『선인의 기도는 당신께 더욱 가까워집니다.』
『선인에겐 더 큰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시스템 창이 리하르트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천천히 글자들을 읽는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 또한 이런 효과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의 연설이 전부 끝났다.
석판은 우선 왕실이 각별히 보관해 두기로 리하르트와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성자님을 뵙고 난 뒤로는 정말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살다 살다 하늘에서 석판이 뚝 떨어질 줄이야!”
산적을 닮은 귀족, 요르크 백작이 와인병을 들고 리하르트를 찾았다.
“트란티스 후작께서 그 광경을 직접 보셨어야 하는데 말이죠. 대업을 위해 떠나신 참이라 퍽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
어어, 하다 요르크 백작을 방에 들인 리하르트는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참, 성자님께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좋은 소식이요?”
백작이 씩 웃으며 와인을 내밀었다.
그 다음 말이 이어진 것은 서로의 잔에 와인을 따른 뒤였다.
“왕도에 호르교를 위한 건물을 지을 예정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그곳에 모여 함께 기도하면 신앙심에 이롭지 않겠습니까?”
리하르트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그 말인즉, 호르교의 신전을 짓겠다는 뜻이었다.
본래 각 나라마다 몇 개씩은 있던, 그야말로 종교의 위세를 나타내는 건축물.
“호르께서 분명 흡족해하실 겁니다.”
리하르트가 움찔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장소는 제법 알맞은 곳이 있지요. 다만 아직 바렌의 정세가 안정화된 것이 아닌지라, 건축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들 겁니다.”
“아, 그건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예?”
“좋은 인부들이 근처에 있거든요.”
고개를 갸웃하는 백작을 보며, 리하르트는 와인을 홀짝였다.
◈ ◈ ◈
“일단 후려치고 보자.”
“그러다 저번처럼 대차게 까이면 어떡하려고?”
“살살 꼬시면 어떻게든 되겠지. 잊지 말라고! 우린 인간들이 모시지 못해서 안달 난 드워프잖아!”
난쟁이들은 골목에 모여서 고견을 나누었다.
기적을 목격한 그들은 더 이상 휴거의 정보를 불신하지 않았다.
등불의 빛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에 충분했다.
다만 얼마나 적은 대가로 많은 빛을 누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이것들아!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었냐! 재현된 ‘명검 중의 명검’ 한 자루 말곤 안 된다니까!”
“족장!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미치지 않고서야!”
후르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족원들의 곱지 못한 시선이 야속했다.
“너희들…… 그 빛을 보고서도 전설이 못미더운 거냐? 나는 똑똑히 느꼈다. ‘명검 중의 명검’이 그 순간에 울었다고……!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딨냐!”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평소엔 친근하고 존경받는 족장이었으나, 전설 이야기만 하면 후르큼은 미친 드워프 취급을 받았다.
‘또 나를 미친놈 보듯 보겠지.’
후르큼이 속으로 혀를 찰 때였다.
부족원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알아. 그 전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서 하는 말이야.”
“족장이 그토록 바라던 전설의 검인데, 그걸 넙죽 내건다고? 일단 전설은 숨기고 봐야지, 이 바보 족장아!”
후르큼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크흡…… 너, 너희들!”
북받치는 감정에 후르큼이 부족원들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부족 간의 우애를 다지기엔 장소가 영 좋지 못했다.
척-!
어디선가 튀어나온 창끝이 난쟁이들을 향했다.
“성자님의 명령이다. 땅과 철의 종족, 드워프들은 우리들의 인도를 따르라.”
아론을 선두로 한 템플나이츠의 일원 스물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젠장. 들켰구먼.”
난쟁이들은 순순히 손을 머리 뒤로 올렸다.
서슬 퍼런 템플나이츠의 경계 속, 죄인들이 왕성을 향해 이송되기 시작했다.
“……족장.”
“왜.”
“저 앞에서 분위기 잡는 놈, 창 좀 봐 봐. 우리 쪽 무기 같은데?”
수석 대장장이, 라칸의 말에 후르큼이 눈을 가늘게 뜨곤 아론의 창을 바라보았다.
품평하듯 한참을 눈여겨보던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우리 쪽 맞군. ‘제법 쓸 만한 창’ 수준이야.”
후르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연신 눈알을 굴리던 드워프들도 따라 웃었다.
“좋은 기름이 발려 있어. 날도 잘 갈렸고. 꽤 애지중지 아낀 태가 나.”
“다행이야. 그래도 ‘제법 쓸 만한 수준’이라서.”
눈짓으로 대화를 나눈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척 보기에도 높은 경지에 오른 아론의 무구는 끽해 봐야 ‘제법 쓸 만한 수준’이었다.
즉, 템플나이츠의 무구가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와 일맥상통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들의 기준이었다.
‘이거, 입만 잘 나불거리면 생각보다 쉽게 거래할 수 있겠는걸. ‘좋은 무구’ 천 자루면 되려나?’
후르큼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왕성 내부로 들어와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선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계속 걸어라.”
템플나이츠의 성화에 드워프들은 복도를 쭉 걸었다.
그럴수록 성스러운 기운이 짙어졌다.
그리고 그 끝엔, 성자가 서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드워프가 아니라 두더지였나 보군.”
성자가 입에 담기엔 퍽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에 드워프들의 턱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아 다오, 인간. 나는 하얀 모루 부족의 족장, 후르큼이라고 하네.”
“……호르교의 성자, 리하르트.”
“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잠시 의문을 띄우던 후르큼이 재빨리 리하르트를 훑어보았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분위기는 과연 성자라는 칭호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허리춤에 매인 무기가 옥의 티였다.
아이스 크레센도.
드워프의 눈으로 보기에 그 검은 잘 쳐 줘야 쓸 만한, 여러모로 아쉬운 무구에 불과했다.
“리하르트라 했나. 느껴지는 경지는 드높기만 한데, 무구가 따라 주지 못하는군.”
“난 평가당하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스릉.
성자의 허리춤에서 한기 맺힌 칼날이 뽑혀져 나왔다.
“이걸로도 웬만한 건 다 벨 수 있거든.”
하나 후르큼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칼날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도발하려던 건 아니다. 그저 좋은 전사는 ‘좋은 무구’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렇지.”
“그럼! 여기 있는 인간들 전부 좋은 전사인 것이 느껴져! 한데 무구가 영 아쉽군. 그대들은 ‘좋은 무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가만히 서 있던 드워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을 포위한 템플나이츠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군침 돌겠지. 어서 미끼를 물어라.’
난쟁이들은 웃음을 필사적으로 삼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비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마침 리하르트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에게 무구를 주겠다는 소린가?”
“그렇다!”
“그 대가는?”
“우리 하얀 모루 부족이 이름값을 할 수 있게 도와 다오. 그…… 새하얀 빛으로 말이야. 모루와 망치에 빛을 듬뿍 담아 주면 될 것 같은데.”
리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야 무척 쉽다는 표정.
그에 조바심이 난 것은 오히려 후르큼이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간직한 염원이 있었으니.
“모루와 망치에 빛을 담아 주면 ‘좋은 무구’ 일백! 거기에 더해서 내가 원하는 곳에 한 달 동안 빛을 뿌려 주면 ‘좋은 무구’ 일천! 어떤가, 인간!”
그래서 결국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
잔뜩 안달난 음성이 후르큼의 목을 타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나 리하르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너는 또 이번에도 장난질이냐.”
“무, 뭐?”
리하르트의 몸에 거룩한 빛이 엉겨 붙으며 주변이 순식간에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웅-
우웅-
아론이 압수한 봇짐에서 웬 소음이 들렸다.
리하르트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어, 어어! 그거…….”
안색이 창백해진 후르큼이 손을 허우적거렸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으쌰.”
리하르트의 손에 끌려나온, 잔뜩 녹슨 검.
그 검이 애처롭게 울었다.
“내가 어지간하면 봐주려 했는데 말이지. 욕심이 과했다, 하얀 모루 부족아.”
“…….”
“이러면 좋겠군. 재현된 ‘명검 중의 명검’ 한 자루, ‘좋은 무구’ 천 자루, ‘쓸 만한 무구’ 만 자루. 그리고 리오 성의 성벽 보수와 근사한 건물 한 채.”
“어…… 떻게, 그걸…….”
드워프들의 손끝이 떨렸다.
그에 반해 리하르트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