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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24화 (124/216)

124화. Episode. 40 율법 (2)

이틀에 걸쳐 이어진 연회도 끝이 났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네?”

짐을 챙긴 지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말투는 유쾌했으나, 나와 모리츠를 향한 눈가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철혈이라 불리는 루드비히의 아들답지 않게 지크는 감수성이 풍부했다.

“형님! 꼭 벌써 가셔야 합니까?”

물론 모리츠도 마찬가지였다.

왕도의 정문 앞에서 신파극을 찍는 두 형제를 보며 나는 손을 내저었다.

“조심히 가. 가주께 기도 연습이나 미리 하고 있으라 전해 주고.”

“흐흐…… 그 말, 그대로 전해 주마.”

너스레를 떤 지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텐베르크의 둘째를 배웅하기 위해 귀족 몇과 템플나이츠가 정문 앞까지 따라 나온 상태였다.

“……뭐,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리오 성에서 전부 했으니까. 이만 가 보겠다.”

그는 곧 와이번을 타고 왕도의 허공을 몇 바퀴 선회하다 떠나갔다.

“즐거웠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대 바텐베르크의 차기 후계자시여!”

템플나이츠의 외침과 바렌의 감사 인사가 그 뒤를 따랐다.

“하아…… 정말 가셨구나.”

멀어져 가는 지크를 바라보던 모리츠가 몸을 돌렸다.

“아직이야.”

나는 왕도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붙잡았다.

이별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 법.

지크만큼이나 반가운 손님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참 타이밍도 좋아. 어떻게 이리 딱 맞춰 오셨대?”

손가락을 들어 북서쪽의 언덕을 가리켰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멀리서 보니 마치 꼬마같이 보였는데, 눈 좋은 기사들은 그들의 정체를 곧바로 눈치챘다.

“성자님. 저들은…….”

“그래. 땅과 철의 종족이다.”

고집불통으로는 세계 제일이요, 까다롭기는 왕족보다 더하다는 이들.

드워프.

오직 대장장이로서의 능력만으로 사대 종족 중 일각이 된 야장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선 한달음에 달려가 배웅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드워프에게 얕보이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저 난쟁이들은 자신이 만들어 내는 무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족속들이다.

원만한 협상을 위해선 이쪽이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했다.

물론, 저들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아는 나로선 자신 있는 일이었다.

“템플나이츠, 전원 발검.”

“발검!”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왕도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슬쩍 뒤로 물렸다.

일부러 경계를 세우며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른의 드워프들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흠, 뭔데 인간들이 길을 막고 서 있어?”

“이봐, 이곳이 바렌 왕도가 맞나?”

“지도는 네가 갖고 있잖아!”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그들 사이로 제법 연로해 보이는 난쟁이가 앞으로 나섰다.

“확실히 마기가 현저히 적군……!”

스읍, 하…….

스으읍, 하아…….

늙은 드워프는 몇 번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제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어?”

드워프 중 하나가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족장! 그때 그 인간 놈이 여기 있어!”

“저놈, 그때와 달리 온몸에서 빛이 나는데?”

언제 봤다고 이놈 저놈이라는 건지.

다만 이유는 알고 있으니, 따로 말할 건 없었다.

나는 족장이라 불린 드워프에게 집중했다.

“이곳은 바렌 왕국의 왕도다. 용건을 밝혀라, 드워프.”

“……우리 부족을 찾아온 놈이랑 다른 인간인가?”

“내가 먼저 용건을 물었을 텐데.”

나는 무표정을 가장한 채로 말했다.

어디까지나 저들은 내 빛이 필요해서 온 것이다.

손님은 손님답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드워프 놈들은 내 예상보다 더 괴짜였다.

“그대도 빛이 나는군! 하얀 사자보다도 더욱 진하게! 혹시 그대가 등불이라는 인간인가!”

슥-

순식간에 아이스 크레센도를 손으로 밀친 족장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내 허벅지에 철썩 달라붙었다.

킁! 킁킁!

다리에 코를 처박은 드워프가 연신 킁킁거렸다.

‘……때릴까.’

우선 한 번 기절시키고 시작할지, 퍽 진지하게 고심할 때였다.

“이봐, 쓸 만한 검 하나를 주지.”

족장 드워프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대신에 우리가 전설 속의 명검을 재현시킬 때까지 옆에서 빛을 뿌려라. 넌 빛을 자유자재로 다룬다지?”

그 얼굴엔 어딘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자기 요구가 거절당할 것이라 일절 생각하지 않는 자의 얼굴이었다.

“…….”

나는 턱을 쓸었다.

지금 이 얘기는, 쓸 만한 검 하나와 신의 힘을 맞바꾸자는 거다.

그 전설 속의 명검도 아니고.

그냥 쓸 만한 검?

“야, 꺼져.”

역시, 난쟁이들은 제 몸처럼 콧대를 꾹 눌러 줘야 제맛이다.

◈          ◈          ◈

쿵!

인간들만 쏙 들여보낸 정문이 굳게 닫혔다.

“…….”

후르큼은 황망한 얼굴로 정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풉!

그 와중에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푸하하하! 족장! 그러게 후려치기도 적당히 해야지!”

“다짜고짜 ‘쓸 만한 검’ 하나로 시작하는 건 좀 심했다!”

후르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도 인정하는 바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마기와 상반된 빛이 갖고 있는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그런 빛과 ‘쓸 만한 검’ 한 자루는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뒤도 안 돌아보고 문전박대를 할 줄은 몰랐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후르큼이 펄쩍펄쩍 뛰며 성을 냈다.

다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보초병들이 눈을 부릅뜬 채로 그들을 노려보는 중이었으니.

“더 미운털 박히기 전에 일단 후퇴하자고.”

드워프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보초병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번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 드워프들은 언덕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손엔 곡괭이와 삽이 쥐어져 있었다.

“족장,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우리가 무슨 두더지냐고!”

“나도 싫다! 그래도 명색이 드워프인데 굽히고 들어갈 순 없잖아! 우리가 비위를 맞춰 주면, 탐욕스런 인간 놈들은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무구를 원할 거라고!”

후르큼이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사실, 등불이란 놈의 빛이 정말 전설의 빛인지는 확신이 안 서. 어디 제대로 알아봐야겠어. 협상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지.”

콰직-!

그들이 바닥을 파헤쳤다.

땅과 철의 종족, 드워프들은 땅굴을 파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          ◈          ◈

“전하. 백성들이 왕성 앞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채비를 하시지요.”

바렌티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엔 백성들의 웅성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후에 예정된 국왕의 연설을 듣고자 모여든 인파였다.

국왕은 왕좌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복잡한 머릿속엔 얼마 전까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호르교를 두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심할 때.

왕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이었다.

긴 역사를 써 내려온 바렌의 정통성이 변질되지는 않을까.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오늘, 국왕과 왕실은 ‘북대륙의 방패’라는 이명을 버리기로 했다.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 후회는 없다.’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우려를 현실로 만든 것은 바렌의 선택이었으니.

“선조시여, 저희 바렌을 지켜봐 주십시오.”

늙은 왕의 눈에 정기가 흘렀다.

손으로는 바렌과 호르의 문장이 새겨진 깃을 쥐었다.

깃에선 실타래가 풀리듯 빛줄기가 넘실거렸다.

호르가 등을 떠밀었다.

왕은 그에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성의 상층부, 훤히 트인 연설대에 서자 사랑스러운 백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함성이 쏟아졌다.

선망과 존경의 눈길이 오롯이 그를 향했다.

‘나는…… 사랑받는 왕이구나. 백성들은 이 못난 왕을 믿어 주는구나.’

국왕은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연설대 옆에 뚫린 구멍에 깃을 꽂아 넣었다.

곧 연설이 시작되었다.

위엄 있는 왕의 음성이 온 왕도에 울려 퍼졌다.

한편.

“두더지들이 기어 들어왔네.”

왕성의 정원에서 연설을 듣던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 드워프들은 빛이 간절했던 모양이다.

“성자님. 어떻게 할까요. 명만 내려 주시면 큰 소란 없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만…….”

“일단은 내버려 둬.”

아론을 물린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왕은 열정적인 얼굴로 연설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바렌의 위기와 절망.

역경에 맞서 바렌을 지킨 리오 성과 영웅들.

그는 바렌이 겪은 어려움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이겨 낸 바렌의 이름을 드높였다.

“……우리는 성장했노라. 하여, 우리는 더 큰 뜻을 세웠노라.”

바렌티스 국왕의 눈빛에 결의가 어렸다.

“이제 바렌은 북대륙의 방패가 아니다. 호르의 교국(敎國)으로써, 자국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립할 필요가 있음이라.”

리하르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곁에 있던 아론과 기드도 조용히 국왕의 연설을 경청했다.

“우리는, 평화의 길에서 앞장서는 나라가 될 것이니.”

“그것이 곧 선을 추구하는 호르의 뜻이다!”

와아아아아아-!

백성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곳곳에서 호르와 바렌의 깃이 펄럭였다.

누구는 성가를 부르고, 누구는 호르를 연호했다.

◈          ◈          ◈

“이게 뭐다냐?”

“축제라도 하는 건가?”

한편, 막 왕도의 지상에 발을 디딘 드워프들은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모여 함성을 내지르는 인간들의 모습이라니.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 저 깃발! 빛난다!”

그 와중에도 후르큼은 귀신같이 빛을 찾아내곤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확실히 좀 전의 인간과 같은 기운이 느껴져.”

“빛을 다루기는 한가 본데? 저 정도라면 제법 특별한 무구도 만들 수 있을 거야.”

줄곧 시큰둥해하던 드워프들도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깃발에 담긴 신앙의 양은 무려 일백만.

마기에 속앓이를 하던 그들을 홀리기엔 충분한 힘이었다.

“바렌티스 국왕 전하 만세!!”

“바렌이여 영원하라!!”

“호오르으으으!’

인파로 다가가니, 인간들의 함성 소리가 골을 울렸다.

드워프들은 서로 손짓과 발짓을 섞어 대화를 나누었다.

“족장! 어떻게 할 거야?”

“……아직 전설의 빛인지는 확신이 안 가! 우리에게 필요한 빛이긴 하지만!”

“그놈의 전설 타령은 그만하고! 협상 준비나 하자고! 우선 ‘쓸 만한 검’ 백 자루로 해 보는 건 어때!”

그들이 그렇게 협상 계획을 세워 나갈 때.

국왕이 마지막 말을 끝마쳤다.

“이 시간부로 바렌은, 호르의 교국(敎國)임을 선포하노라!”

그러자.

하늘의 구름이 모두 개었다.

뻥 뚫린 하늘에서 찬란하고 거룩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권능 - 율법(律法) 발동.』

국왕도.

백성도.

드워프들까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도 전체를 휘감은 빛기둥은 마치, 하늘과 왕도를 연결시켜 주는 것 같았다.

“야, 야! 좋…… ‘좋은 검’ 백 자루!”

“미친놈아! 이건 최소한 천 자루부터 시작해야 해!”

드워프들이 부랴부랴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족장 후르큼은 입만 헤 벌린 채로 있었다.

그러다, 그는 황급히 봇짐을 뒤졌다.

꺼낸 것은 ‘명검 중의 명검’.

언제부터였는지, 그 검이 울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하늘과 검을 번갈아 쳐다볼 때, 후르큼은 다시금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떨어져 내린 것이다.

회색의 석판.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압도적인 신격이 담긴 석판이었다.

거기엔 빛으로 된 음각이 빼곡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후르큼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걸론, 안 돼.”

“뭐?! 족장! 그럼 만 자루까지?! 안 돼!”

그가 굳은 눈으로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재현된 ‘명검 중의 명검’ 한 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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