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Episode. 39 중급 신격 (2)
폐허를 지나고, 숲을 가로질렀다.
한참을 나아가니 저 멀리 높게 솟은 세계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딱 그럴 때였다.
쐐애액-
쾅!
하늘에서 새하얀 검 하나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
그것도 내 코앞에.
“뭐, 뭐야! 습격인가!”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기사들이 나를 둘러싸곤 사방을 경계했다.
나는 그들을 슬쩍 밀어내며 검을 바라보았다.
“이건, 백귀잖아?”
나를 반으로 갈라 죽일 기세로 떨어져 내린 검은, 요검 백귀였다.
“그게 어찌 성자님 앞에……?”
오르드 성주와 템플나이츠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칼고스의 뱃속에서 썩어 문드러졌을 줄 알았던 백귀가 이렇게 대뜸 날아오다니.
누군가가 뱃속에서 꺼내 이쪽으로 던졌을까?
“……말이 안 되지.”
콰각.
백귀를 뽑아 들곤 그 새하얀 검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얗다.
정말 하얗기만 했다.
백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요검 특유의 광기나 귀신의 형상 따윈 비춰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우선 잠시 휴식을 취하지요. 병사들도 많이 지쳤을테니.”
나는 행군을 잠시 중단할 것을 요구하곤 눈을 감았다.
백귀가 이곳으로 날아왔다는 건, 필시 칼고스의 시체에 이변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신안.’
곧장 놈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시점을 돌렸다.
경계 임무를 맡았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당황과 의문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대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병사도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눈을 돌려 시체 쪽을 바라봤다.
빛에 둘러싸인 칼고스의 시체는, 서서히 부피가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지독한 역병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도 아니다.
놈을 봉인한 빛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무래도 계속 주시해야겠어.’
사아아-
나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놈을 둘러싼 빛을 좀 더 견고히 만들어 놓았다.
◈ ◈ ◈
안 그래도 껄끄러운데, 칼고스의 뱃속에 있던 백귀는 찝찝함, 그 자체였다.
얼씨구나 들고 다니기엔 뭣했기에, 일단 신앙으로 칭칭 감싸 놓았다.
잠시간의 소란도 그렇게 진정되고, 우리는 다시금 행군을 시작했다.
“와아아-!”
그들은 리오 성에 복귀하고 나서야, 지금껏 억눌렀던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리오 성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일백 남짓의 병력들이 굵직한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성자님. 그쪽의 상황은…….”
“……축소화가 진행되다 못해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물론 내게 칼고스 측의 이변을 전해들은 오르드 성주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나도 틈틈이 신안으로 칼고스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전.
기어코 그 거대한 몸뚱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소식에 오르드 성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경계 인원을 더욱 늘려야겠군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며칠 뒤, 성에 남아 있던 일백의 병력이 폴린 성으로 출발했다.
그동안 나는 마갑병의 정화 작업을 끝내 놓았다.
“호. 장관인데.”
성벽 위에 주르륵 늘어선 일천의 마갑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겼다.
각각의 무력은 중급 기사에서 상급 기사 수준.
5개 기사단의 전력을 한 번에 얻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물론이고 수뇌부들의 입가에 든든함의 미소가 어렸다.
그러던 어느날.
승전보를 품에 안고 떠났던 전령이 돌아왔다.
술과 고기가 실린 마차와 함께 금의환향한 것이다.
“와!”
대번에 웃음꽃이 핀 병사들이 마차에 달라붙어 짐을 날랐다.
그 어린애 같은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넙죽 허리를 접었다.
리오 성 측 전령과 동행한 왕실의 귀족이었다.
그는 접은 허리를 펼 생각도 않고, 한참동안 감사의 인사를 쏟아 냈다.
“……하여, 리하르트 성자님을 비롯한 바렌의 영웅분들께선 저희 바렌 왕실이 준비한 연회에 참여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요약하자면 왕실에서 연회를 열겠다는 뜻이다.
참으로 거창한 왕실 초청 행사였다.
◈ ◈ ◈
리하르트의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그가 곧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아…… 또 악몽인가.”
요새 들어 이틀 걸러 한 번 꼴로 악몽에 시달린다.
온통 새까만 곳에 우뚝 선 붉은 거인.
칼고스의 모습이 자꾸만 꿈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씹어 죽일 놈이 진짜, 죽어서도 이 난리를…….”
이를 아득 문 리하르트의 시선이 방 한 켠에 놓인 물건에게로 향했다.
백귀를 보관한 목함이었다.
혹시 몰라 목함에도 빛을 칭칭 둘렀건만, 어찌 된 게 기가 허 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리하르트는 칼고스가 두렵지 않았다.
놈과 마주하는 꿈을 꿀 정도로 나약하지도 않았다.
심마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는데, 묵직한 뭔가가 가슴 한 켠에 들러붙은 느낌이었다.
사아아-
짐짓 불쾌하단 표정을 지은 그가 신앙을 일으켰다.
그제야 한결 나아진 기분에 리하르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상태창.”
[호르] [중급 신격]
▶? [교단 레벨 ? 3]
? 신도 ? 91,531
? 신앙 - 84,637,550
? 권능 - [신도 임명] [기도 받기] [신안] [계시] [율법]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50/500, [최하급 성기사] 260/300, [최하급 사제] 43/200, [하급 전도사] 5/50, [하급 성기사] 21/30, [하급 사제] 7/20, [중급 전도사] 0/5, [중급 성기사] 2/3, [중급 사제] 0/2
상당히 많이 변화한 상태창이 리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후후…….”
리하르트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칼고스와의 격전 끝에 바라 마지않던 신격의 상승을 이룬 그에겐 이 상태창이야말로 천금으로도 못 살 보물이었다.
“중급…… 중급이란 말이지.”
다른 것들도 많이 변했지만, 그가 주의 깊게 바라본 것은 중급 성기사 직위였다.
그는 복귀하는 길에 이미 중급 성기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승급한 자는 아론과 모리츠.
서로 경쟁 아닌 경쟁이 붙던 이 둘은 뜻밖에도 사이좋게 승급해 버렸다.
무엇보다 그들이 새로이 얻게 된 특기가 있었다.
공명(共鳴).
그것이야말로 템플나이츠가 진면모를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힘이었다.
그 둘로 인해 다른 직위의 신도들도 더욱 큰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권능은…….”
율법.
신(神)의 이름으로 규정하는 규범.
사실 율법이라는 것은 호르교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에 왕도에 가면, 더 많은 게 바뀔 거야.’
왕도행은 사흘 뒤에 예정되어 있었다.
리하르트와 함께 갈 인물은 지크와 템플나이츠 제1군이 전부.
“저희의 주적은 마법사입니다. 역병 전쟁이 끝났다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오르드 성주를 비롯한 바렌의 기사들은 어째서인지 왕도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곳에 남아 요새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떠오른 해가 다시 저물 때쯤.
그들은 병영에서 간소한 고기 파티를 여는 것으로 왕실의 성의를 받아 주었다.
“와! 마셔-!”
고작 맥주 한 잔과 고기 몇 덩어리지만, 사내들은 그것만으로도 흥이 오르는지 왁자지껄 웃어 댔다.
기사와 병사, 연합과 지원군.
그들은 서로 계급을 구분 짓지 않고 다 똑같은 동료인 것처럼 술잔을 부딪쳤다.
“호르를 위하여!”
“바렌을 위하여!”
느지막히 자리를 깔고 앉은 리하르트에겐 무척 흐뭇한 광경이었다.
“동생아.”
그런 그에게 지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나, 왕도를 방문한 뒤에 곧바로 본가로 돌아갈 생각이다.”
맥주잔을 내민 지크가 말을 이었다.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너와 모리츠, 그리고 이 성의 사내들과 함께 지내는 건.”
“그렇게 재밌으면 쭉 여기에 남지. 앞으로도 심심하진 않을 텐데.”
“흐흐. 그렇게 찔러 보면 이 형님이 넘어갈 것 같더냐.”
리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반쯤 호르교에 넘어올 뻔했던 것 같은데-,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지크가 본가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결정을 굳혔다는 말이니까.
“호르의 존재 자체는 믿어. 믿을 수밖에 없지, 기적을 몇 차례나 보았는데.”
벌컥, 지크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 그래도 나는 바텐베르크의 가주가 될 거야.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전부 내 힘으로 얻어 내고 싶어. 네가 아버지와 무슨 약조를 했는지도 알고 있고.”
그것이 지크의 신념이었다.
루드비히나 발락과 같은 종류의.
“그래. 응원할게.”
두 사람이 맥주잔을 부딪쳤다.
별안간 지크가 리하르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난 네가 장하다, 이놈아. 너무 장해!”
“가, 갑자기 뭐야?”
“형으로서 동생이 이렇게 훌륭히 자랐는데,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지! 마르크스의 건방진 핏덩이가 아주 기도 못 펴던데!”
질색한 리하르트가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대 바텐베르크 차기 후계자의 완력은 막강했다.
“어쩌다 보니 미리 작별 인사를 하는 꼴이 됐지만, 모리츠를 잘 부탁한다. 생긴 거랑 다르게 여린 녀석이라, 아버지께서도 너보단 모리츠를 더 걱정하실 거다.”
“아니, 이거 좀 놓고…….”
“그렇다고, 이놈아! 잘 부탁한다는 게 너보고 희생하라는 건 아니야. 둘 다 잘 살아야지! 한 번만 더 그러면 너 진짜!”
리하르트는 직감했다.
지금 자기를 붙잡고 흔들고 있는 지크는, 취했다.
끽해 봐야 맥주 몇 모금에 말이다.
“하아…….”
리하르트가 도움을 요청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전부 한 곳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으하하! 내가 바로 중급 성기사, 모리츠 바텐베르크다!”
“중급 성기사, 아론 마이어이올시다!”
위풍당당한 두 사내의 몸에서 빛이 번쩍였다.
둘은 중급에 올라 한층 더 찬란해진 신성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 저 주정뱅이들.”
신은 홀로 한탄했다.
◈ ◈ ◈
파란만장했던 고기 파티가 끝난 지 사흘.
리하르트 일행은 왕도로 향했다.
그들은 각 영지를 경유할 때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바렌의 영웅들!
어떤 영지에서는 주민들이 리하르트 일행의 뒤를 따르며 호르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특히 온몸에서 빛이 흐르는 리하르트는 더욱 많은 관심에 시달렸다.
몹시 불행하게도, 그 관심은 한밤중에도 계속되었다.
『끄흐! 끄흐흐!』
『아버지…… 아버지이…….』
목함이 스스로 열렸다.
그 안에서 백귀의 검신이 둥둥 떠올랐다.
이내 새하얀 검신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빌어 처먹을 아버지! 약해 빠진 아버지!!』
검신에 귀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붉은 역병 거인, 칼고스.
그가 참람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으…… 윽…….”
잠에 빠진 리하르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럴수록 칼고스의 눈에 희열이 번졌다.
『왜 그러십니까?』
『흐흐, 제 꿈이라도 꾸시는 건지요?』
검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와 리하르트를 뒤덮었다.
성자의 위격에 오른 자에겐 별 것 아닌 기운.
하지만 악몽 정도는 꾸게 만들 수 있었다.
『아! 황홀하다!』
『당신을 한입에 털어 넣었을 때보다도 더!』
영문도 모르게 검이 되어 버린 칼고스에겐, 이 시간만이 유일한 쾌락이었다.
무방비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괴롭힐 수 있는 힘!
『꿈에서라도 뒤져 버리십시오, 아버지!』
부르르-
백귀의 검신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 찢어 죽일 놈이.”
『……!』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리하르트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