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Episode. 39 중급 신격 (1)
리하르트가 뿜어낸 빛은 한순간이었지만 역병의 기운은 끈질겼다.
울컥-
목 달아난 칼고스의 몸뚱어리에서 오염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일대의 공기와 땅을 오염시켰다.
칼고스의 시체는 죽어서도 악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던 지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리오 성의 사내들도 불안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죽은 칼고스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역병의 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재빨리 시체를 처리해야만 했다.
“리하르트. 이 역겨운 거, 무슨 방도라도 있는 거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지크의 손가락이 거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도라, 없어.”
“뭐? 그럼……”
“지금 당장은 말이지.”
리하르트의 말에 좌중의 눈빛에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땅을 타고, 바람을 타고.
대륙 곳곳으로 확산될 역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 리하르트가 거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훅-
바람을 타고 강렬한 악취가 풍겨 왔다.
“쯧.”
놈의 뱃속에서 녹아내리고 있을 아티팩트와 무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얼음 왕관부터 시작하여 망토, 드래곤 투스와 백귀.
그것들 전부 한입에 삼켜졌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리하르트는 맨몸이다. 그나마 빛을 휘감지 않았다면,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을 터였다.
‘부정 한번 제대로 타겠군. 내 피 같은 무구들이.’
한숨을 삼킨 그가 거인의 몸과 머리를 짚었다.
그 자리에서 피어오른 빛이 두 역병 덩어리를 뒤덮었다.
“역병의 확산은 너무 걱정 마. 일단 봉인을 해 두었다.”
중급 신격에 이른 빛은 더러운 기운을 완벽히 틀어막았다.
격한 싸움 끝에 신앙을 대부분 사용해 버린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말을 멈춘 리하르트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동료들을 훑어본 그는 마지막으로 앨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이내.
리하르트의 몸이 허물어졌다.
“서, 성자님!”
술렁이는 사내들 사이에 기어 들어가는 음성이 들렸다.
“나 잠 좀 잔다…… 마법사들이 허튼짓하면 아델, 네가 깨워 다오.”
한 번 죽다 살아난 리하르트.
그가 지금까지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잠드신 건가…….”
잠에 들었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르드 성주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성자께서 쉬시기에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동의하오.”
그를 둘러싼 가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 준비를 하라!”
지휘관 하나가 명령을 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쥐어 짜내듯 외쳤다.
“……바렌 왕국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철컥.
새까맣게 물들어 버린 ‘갑옷 골렘’, 이른바 마갑병들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 뒤에선 마법사들이 하나둘 지팡이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그대들의 땅에서 쏟아져 나온 역병! 우리 또한 그 피해를 면치 못하였으며, 수많은 사상자와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하물며 그대들은 우리의 지원을 받아 자국의 재앙을 해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마법사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과 대가를 치르라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도 마다치 않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리오 성의 사내들은 눈만 꿈뻑일 뿐이었다.
“저것들, 왜 저렇게 매가리가 없어?”
“싸우자는 거 맞지?”
“저 상태로?”
속닥이는 기사들의 음성은 하나같이 태연했다.
마나가 일렁이지 않는 지팡이 는 그저 조금 단단한 나무 막대기일 뿐이었으니까.
“큭!”
그에 분통이 터진 것은 마법 연합의 가주들이었다.
전쟁의 명분, 하다못해 바렌에게 목줄을 채울 구실을 위해.
이곳으로 향할 때 세웠던 계획을 실행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한데…….
머리로는 당장 위협 사격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으나, 막상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자의 기운 때문이다……!’
마법사들의 시선이 쓰러진 리하르트에게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솔직히 말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장에 피어난 그의 빛은 마법사들에게도 커다란 의지가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흐으음~”
지크가 턱을 쓸었다.
템플나이츠도 묘한 눈초리로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그때 앨런이 나섰다.
“의미 없는 일이다. 지팡이 내려.”
그 말에 가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쏟아졌다.
이를 가볍게 무시한 앨런은 리하르트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해할 수가 없어.”
앨런의 눈엔 의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넌 대체 정체가 뭐냐.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사실, 앨런은 북쪽의 성자가 바텐베르크의 핏줄이란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다.
모리츠가 피를 토하듯 외쳐 댄 ‘리하르트’라는 이름은 흔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앨런은 지금 그의 신분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
앨런의 혼잣말을 들은 기사 몇이 시선을 내렸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리하르트.
기사들 또한 그에게 묻고 싶었다.
칼고스라는, 끔찍한 거인이 어째서 리하르트를 아버지라 칭했는가.
분명 놈에게 죽었을진대, 그는 어떻게 빛과 함께 다시 태어났는가.
그토록 거룩하고 찬란한 ‘격’은 무엇이었나.
“…….”
앨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듯 몇 분간 그렇게 서 있었다.
수많은 가설이 떠올랐다.
그러다 단 한 가지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호르시여.”
결국, 앨런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리하르트가 호르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에 귀결되었다.
‘계시’라는 이적을 몇 번이나 접했었기에 신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잘 아는 그였다.
그리고 리하르트가 조금 전 보여 준 힘은 그것과 몹시 흡사했다.
“이자의 몸에 머무르셨던 겁니까. 제가 아니라, 이자에게!”
질투심 가득한 음성이 기사들의 귀에 틀어박혔다.
챙-!
순식간에 리오 성의 정예들이 검을 뽑았다.
“당장 물러나시오. 한 번만 더 그런 눈으로 성자님을 내려다보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공기가 과열되었다.
마법 연합과 북쪽의 병력이 다시금 대치를 이루었다.
“하. 건방진 것들이.”
날붙이에 둘러싸인 앨런의 기세가 일렁이다, 이내 가라앉았다.
호르의 계시를 상기한 것이다.
“네놈들이 호르 님의 신도가 아니었다면, 싸그리 불태워 죽이는 건데.”
그가 부여받은 사명은 이단을 심판하는 것뿐.
같은 신을 섬기는 신도를 겁박할 권리는 없었다.
이윽고 앨런이 몸을 돌렸다.
“……돌아가지.”
◈ ◈ ◈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리오 성으로 복귀하는 길에 올라선 뒤였다.
“리하르트, 몸은 좀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참!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실래?”
“아, 좀!”
자꾸만 치근덕거리는 모리츠를 밀어 냈다.
그러자 아론이, 또 그 다음엔 기드가 내 시중을 들으려고 안달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서 오르드 성주가 허허로이 웃었다.
“조금만 받아 주시지요. 이게 전부 성자님을 염려해서 그러는 겁니다.”
“후…… 저도 알긴 압니다만.”
죽은 줄 알았던 내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잖습니까.”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그런 우리들의 뒤편엔 무려 1,000기의 마갑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마법사,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들인 것 같습니다.”
“흐. 그러게나 말입니다.”
성주의 농담에 킬킬 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남대륙의 자랑거리인 마갑병이 우리를 따르고 있는지.
전후 사정은 이미 전해 들은 참이었다.
“저 마갑병들이 심각하게 오염된 건 사실이니까요. 이 상태로 끌고 갔다간 남대륙은 파탄이겠죠.”
앨런의 지팡이에 남은 빛은 그들의 몸을 보호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미처 저것들을 정화할 여유는 없던 것이다.
차라리 파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마력은커녕 걸음을 옮길 체력도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적국의 땅에 머무르고 있을 수도 없는 법.
결국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치들이 그렇게 물고 빨던 골렘을 얻게 되다니…… 나 참, 저희를 겁박하려 들지만 않았다면 또 몰랐을 텐데 말입니다.”
성주가 정말 어이없다며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새까맣게 물든 마갑병을 뒤돌아보는 눈가엔 흐뭇함이 잔뜩 걸려 있었다.
“리오 성의 전력이 수직 상승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 성에 도착하기 전에 마갑병을 전부 정화해야겠어.’
앨런과는 다르게도 나는 날마다 신앙이 차오르니, 리오 성에 도착하기 전에 전부 제 색을 되찾을 것이다.
“참으로 아낌없이 주는 친구들이야.”
역병 전쟁에 이렇게 지원도 해 주고, 바렌을 위해 골렘도 기증해 주고.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중에 선물을 하나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 ◈ ◈
“정말 끝난 걸까?”
“끝났지. 끝나지 않았으면 다시 끝내 버리면 되는 거고.”
기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역병의 성 근방에 남아, 봉인된 칼고스의 시체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법사 놈들. 마갑병 때문에 모양 빠진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심상치 않기는 매한가지야. 그때처럼 분명 역병의 피해를 우리에게 돌리겠지.”
기사 하나가 그렇게 말하곤 주먹을 꽉 쥐었다.
강철 장갑이 끼긱,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역병 전쟁이 끝났다고 마음 놓지 말자고. 어디까지나 우리의 주적은 마법사 놈들이니까.”
“그래. 맞는 말이다.”
“근데 저거…… 좀 이상한데?”
“뭐가? 저 시체…… 어?”
돌연, 빛에 둘러싸여 있던 칼고스의 시체가 부풀기 시작했다.
“어, 어어……?”
“뭐야!”
대번에 검을 빼든 기사들이 안색을 굳혔다.
터질 듯 부푼 칼고스의 몸뚱어리.
거기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내, 기다란 검 한 자루가 빛을 뚫고 나타났다.
“저건 성자님의……?”
기사가 의문을 뱉을 새도 없었다.
쐐액-!
검이 허공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갔다.
경계를 서던 이들의 귓가에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아버지-!』